홍종락 / 번역가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새로운 다짐으로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되었다. C. S. 루이스는 결코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이 걸핏하면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다니’ 하며 시간의 흐름에 낯설어하고 깜짝 놀라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아이 축축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며 그것은 인간이 영원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한 가지 증거라고 말했다. 쏜살처럼 지나가버린 한 해를 아쉬워하기보다 오히려 영원에 대해 묵상하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겠다.

또 하나, 내가 업으로 하는 일을 대하는 자세를 한번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다. 나는 개인적 관심과 생계의 필요에 의해 번역 일에 뛰어들었다. 평소의 관심과 인연과 상황에 의해 시작한 기독교 번역가의 일을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새 중견 기독교 번역가가 되었다. 심지어 ‘대표적’ 기독교 번역가라는 과분하다 못해 지나친 말까지 들어본 적이 있다. 나는 그냥 그대로인 것 같은데, 나의 실제 모습이나 수준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는 포지션에 놓인 셈이다. 그럼 이제 어떡하나.

어디 번역가만 그렇겠나. 정도 차는 있겠지만, 어른이 되고 어떤 분야에서 꾸준히 일하다보면 다들 겪는 상황이리라(그런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최악의 반응은 자기가 대단한 뭐라도 된 듯이 거들먹대고 올챙잇적 시절 모르는 개구리마냥 해당 분야의 초심자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무시하고 윽박지르고 어떻게든 이용해먹으려는 것이겠다.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훨씬 소심한 죄인들이 겪는 유혹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차피 실제 모습과 비치는 모습, 이 둘 사이의 괴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응법이 있겠다. 하나, 그 거리를 끊임없이 부각시키고 자신의 실체를 자꾸만 스스로 폭로하는 전략도 가능할 것이다. 난 그런 사람 아니오, 그냥 밥벌이일 뿐이오, 내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마시오. 우상파괴 전략이다. 지나친 자기포장이 난무하는 시대에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겠다. 하지만 지나치면 자신이 응당 맡아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겠다.

또 하나, 두 모습 사이의 괴리를 끊임없이 인식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되, 이 모든 판 자체를 나만의 선택과 우연, 상황의 결과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판의 주인을 인정하고 그 판에서 주어진 역할을 하면서도 안식하는 것이다. 역할에 부응하기 위해 정진하되 끊임없이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부르신 분이 채우시리라,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두 번째 대응법 안에는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긴장이 들어있다. 가치 있는 모든 일이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안겨주는 피할 수 없는 긴장이다. 긴장을 이루는 두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이 일의 성패가 온전히 나에게 달린 것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하는 면. 2) 나는 나보다 훨씬 더 큰 판의 일부로서 이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극히 작은 역할을 감당하는 데 불과하며, 이 일 전체를 선한 계획과 뜻, 능력으로 이끌어가는 분이 있음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면.

1)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게으르고 악한 종이 될 테고, 2)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주제넘게 구는 오만방자한 자가 되거나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 것이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1)을 위해서는 성실하게 맡은 일을 감당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지 싶다. 이를 악물고 비장하게 하자는 말이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허투루 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자는 말이다. 몸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모든 일을 감당하기에 이르도록.

2)의 해결책은 경험과 기도가 아닐까.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실패의 경험이다. 실패를 하더라도 좌절하고 주저앉지만 않으면, 그 경험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해지는 기회, 그래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더라는 여유와 내성을 키울 기회가 된다. 물론 그 모든 과정에서 상황을 그분에게 맡기는 기도가 함께해야 그럴 수 있으리라. 내년에 무슨 일을 하게 되건, 그런 자세로 감당하리라 다짐해본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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