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종교개혁 부르며 루터의 아이슬레벤 임종시간 엿보기

▲ 16세기 개혁자 루터, 츠빙글리, 멜랑히톤(왼쪽부터)

 

루터는 세상을 하직하기 위해 그의 활동지 비텐베르크에서 그가 태어난 고향 아이슬레벤으로 왔다. 온지 한 달이 채 안되어 그는 이 풍진 세상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역시 의인이요 현인인가보다. 죽음의 시간을 미리 알고 하나님의 품으로 가야 할 시간 20여일 전에 격전지 비텐베르크를 떠났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격렬한 개혁자 선봉에 선 지도자가 지휘봉을 미리 놓고 제2선으로 물러났고, 죽음의 시간까지 예측한 사람이다.

 

●● 그래도 그대는 내 동역자

그러나 루터가 개혁운동의 마무리 과정에서 끝내 마음이 편치 않았던 사안은 울리히 츠빙글리(1483~1531)와의 불화였지 않았을까? 출생일 한 주간 차이의 사실상 동갑내기요 독일과 독일어권 스위스 취리히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 가톨릭에 대해 저항을 시작한 외로운 시대의 동무요 동역자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츠빙글리의 여러 평가 중 그의 강의학교(텍토리움)를 소홀히 평가할 수 없었다. 이 학교의 수준은 고등교육기관의 출발점이고 츠빙글리의 학구적 성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부분을 생각할 때 츠빙글리가 인문주의적 인물이요 인문주의자로 분류된다 할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할 때 츠빙글리 학교인 텍토리움 제자들 중에 콘라드 그라벨이나 펠릭스만츠와 같은 유력 인물들 소위 “재세례 운동”으로 발전한 츠빙글리의 일곱 제자들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라벨이나 만츠 등이 급진적 개혁을 요구했다고는 하지만 루터의 사망 직전의 시간인 1546년 2월 초에 그의 생애 모두를 회상할 때 츠빙글리와 연관된 부분들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츠빙글리를 비 신앙적 인물로까지 몰아붙였던 그의 혹독한 비판을 그는 취소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루터는 자신보다 15년 먼저 취리히 제1차 카펠 전투, 제2차 카펠 전투(1531년) 선봉에 섰다가 순교한 츠빙글리의 최후에 대한 혹독한 평가와 농민반란(1525년)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토록 해 수만 명의 농민군의 죽음, 수만 명의 농민군 가족들의 파멸을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솔직히 말해서 츠빙글리는 신앙 동지들과 함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톨릭 세력을 향해 전투하다가 전사했고, 루터 자신은 그의 만인제사론을 따르는 농민군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사정없이 진압하도록 영주들에게 권고했으니 말이다.

또, 다시 말하거니와 츠빙글리의 제자들 7명이 츠빙글리의 개혁이 정직하지 않고 가톨릭 세력의 정치집단인 의회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고 비난했던 것, 또 그들 재세례 급진 개혁 세력이 비폭력적인 자세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폭력 앞에 저항하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떠올려 보았다.

 

●● 더는 내게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아이슬레벤 고향집에서 하나님 품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준비의 시간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이제 나 마르틴 루터의 시간은 끝나간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를 기다린다. 더는 내게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 

나의 정직한 개혁자 임무수행을 말할 때 사람들은 나를 향해 프로테스탄트의 교황이라고 비웃고, 비텐베르크의 천둥번개라고 한다지만 그래 어느 누군들 해 보거라! 일을 하다보면, 묵은 것을 뜯어 고치다보면 독선과 폭력성의 모습을 피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절대권을 가진 교황을 꾸짖다보니 내가 교황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고, 많은 견해들이 내 갈 길을 막아서서 훼방 놓을 때 나는 불호령도 사양치 않았을 터이니 그래서 내가 “천둥번개 노인” 소리도 감수해야 했었다.

투쟁적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늘 사용하는 말처럼 루터 역시 “내 인생의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고 했을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변명하고 싶은 울리히 츠빙글리에 대한 그의 평가는 자기 나름대로 피할 수 없었다.

성찬론에 있어서 츠빙글리의 상징설은 용납하기 힘들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뒤집어엎고 교회를 두 조각낸다는 결과에는 동의하지 않았었다.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부분들을 수정하면 된다고 확신했다. 그가 제시한 95개 조항 반박문 어디에도 가톨릭과 결별해 새 교회를 따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교회가 프로테스탄트와 분열해 서로 등 돌리는 모습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있음이 한탄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성찬론”만 분열하지 않으면 갈라선 교회들이 그 어느 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화체설을 배반하는 츠빙글리의 상징설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4일 동안 마르부르크 회의를 가졌던 1529년이 너무 아깝다. 그때 그 시간들, 대화하고 서로 양보를 주고받으며 개혁의 중요한 도약기가 될 수 있었던 마르부르크, 그때 츠빙글리와 형제로서의 악수를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던 그날은 비극이었다.

신학과 인문학적 견해가 다르다 해도 장차 우리 신·구 기독교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최소한도의 근거인 성찬론의 일치, 특히 당시 츠빙글리의 상징설과 나 루터의 변체설(화체설) 두 주장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호소를 한 번 더 했더라면, 또 그때 마르부르크에서는 실패했더라도 내가 내 친구 츠빙글리의 제자들과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었더라면…, 루터의 임종시간은 다가온다.

95개 조항 격문을 그해로부터 어느덧 30년이구나. 학창시절부터 돌이켜보면 자기 자신을 천재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수도사 시절 역시 영성이 탁월하다거나 뛰어난 지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 인생, 참 어렵구나!

다만, 내 안에 있는 영적인 그 무엇이 나를 짓눌렀다. 과연 내가 주 예수의 평화를 소유한 인물인가? 자신이 없었다. 거룩한 도시의 순례과정에서도 내 마음 속에서 치열하게 싸움질하는 자아와 또 자아, 이들 중 하나는 사단이었고 또 하나는 주의 은혜로 포장된 나 루터의 욕망이었을까?

루터는 95개 조항 건의문을 비텐베르크 예배당 출입문에 내걸어놓고 교황청의 답변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교황청의 답변이 아니라 성난 유럽인들의 환호에 휩싸여 단숨에 유명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바빠도 비텐베르크 이후 평생동안 1년에 신구약 성경을 두 번씩 읽었던 인물이다. 그는 자기 절제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열망을 가슴 터지도록 부여잡고 살아왔다.

루터는 자기 검증에 대한 솔직한 한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유대인을 싫어했으면서도 개혁자 루터의 최고 최상의 동반자는 유대인 필립 멜랑히톤(1497-1560)이었음에서 루터를 알 수 있다. 

루터의 개혁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제후 헤센의 필리프 이야기는 유명하다. 제후 필리프는 유부남이었는데 재혼을 원했다. 첩을 두거나 본처와 이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본처나 다름없는 정식 부인을 원했다. 아무리 진정시키려 해도 필리프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자칫 복음주의 운동의 선한 군주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루터는 필리프에게 구약 족장들의 사례를 들려주면서 “조용히 추진하라”고 귀뜸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조용히 끝날 일이 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는 범법행위로 규탄했고 가톨릭 편에서는 루터 공격의 빌미로 삼기도 했었다. 이는 루터의 허술한 점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의 개혁운동의 동반자요 지원자라 해도 무리한 훈수였다. 

루터는 또 자기 약점 고백에는 정직했다. 그는 내숭 떠는 위선자를 싫어했다. 그는 그의 젊은 날 이후 성욕에 대한 고통을 여러 번 호소했었다. 그는 성욕의 위력을 알았다. 젊은 날에는 이 욕정을 이겨내고자 여러 형태의 고행을 했었고 심지어 추운 날 차가운 마룻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불같이 솟구치는 욕정에 휘둘리기도 했었다. 그럴 때의 감정을 표현할 때 “발그레한 볼과 백옥같은 다리”가 머릿속에서 오락가락 할 때의 고통을 말했다. 또 “청춘의 사랑은 불같이 뜨겁고 술처럼 취하게 하여 정신을 못차리게 한다”면서 비명을 지르기도 했었다.

 

●● 다재다능하고 정직한 성품의 사람

루터는 또 마지막 시간이 가까이 오는 1545년 경, 그러니까 지상의 날이 1년 쯤 남았을 때 이런 고백을 했었다. 내 몸을 괴롭히는 고약한 질병들, 그중에서도 악마들과의 싸움은 유명하다. 루터는 플루트나 기타를 즐겨 연주했고, 직접 가사를 쓰고 작곡과 편곡도 했다. 그가 만든 찬송가는 40편에 이르고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같은 찬송가는 세계적인 걸작이다. 당시 루터는 저술가로서도 유명하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영어로 편집한 책이 무려 55권이나 될 정도로 다작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매 주일 세 번의 설교, 엄청난 분량의 논설, 성경해설, 편지쓰기, 번역 등을 하면서 쓴 책이 55권이면 한국어판으로는 100권정도 되지 않을까. 말년에 루터는 펜만 잡으면 글이 술술 나온다고 했었다. 그러나 루터는 글 못지않게 작곡, 노래, 악기 다루기, 자연을 음미하기 등 다재다능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질병, 악마들과 온밤 싸우기, 자기 진단으로는 노화에서 온 것이기도 하고 과로와 만성화된 긴장, 요즘 말로는 살인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또 담석증을 앓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성경읽기,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성경의 완전성과 인간 이성의 불완전성을 안타까워하기도 했었다. 성경의 완전성과 인간 이성의 불완전성을 탄식하면서 인간들이 성경을 이성에 의존하여 해석하려드는 무모함을 경고했고, 심지어 “이럴 줄 알았으면 결코 전도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복음서의 가치를 알았던 복음주의 강자가 이런 말을 했음을 우리는 알아들어야 한다.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말씀들까지 설명하고 해석하려고 덤비는 사람들은 바보라고 루터는 단언했다.

 

●● 딸 레나의 죽음 앞에서

루터는 우리가 아는대로 1525년 6월에 카트리나와 결혼하여 6남매를 두었다. 그들 중 가장 사랑했던 딸 레나가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때 루터는 “아가, 너에게는 잘된 일이고, 나도 영혼의 행복을 느낀다마는 육체가 서러워하는구나!” 하면서 크게 통곡한다. 죄를 지을 사이도 없이 순수한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갔으니 잘된 일이고 행복을 느낀다 했다. 그러나 이도 그의 진실에서 나온 말이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말은 “육체가 서러워하는구나!”라는 뒷말이다. 육체의 저 세상의 날들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어린 딸 레나의 식어버린 육신 앞에서 그는 슬픔의 분량을 줄여보고 싶어서 잘 된 일이니, 행복 운운 했지만 어린 딸을, 너무 너무 사랑하는 아리따운 어린 딸의 식어버린 육체를 바라보는 깊은 아픔을 말하다가 통곡을 한다. 마르틴 루터의 인간다움, 너무나 인간다운 한 모습이다.

 

●● 루터, 영욕의 날과 결별한

한때는 그를 프로테스탄트의 교황이라고 했던 교회들과 개혁자들이 상당수 그에게 등을 돌렸다. 사방에서 탐욕에 젖은 신자들의 타락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복음운동을 지원했던 제후들의 등 돌림, 처음과는 달리 복음서에 대한 감사가 줄어들고 황제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역을 야금야금 침범해 오고, 드디어 자기 평생 쌓아온 탑들이 무너져 내린다.

또 루터가 세상을 뜬 다음 해에 그의 개혁운동의 요람인 비텐베르크가 가톨릭 세력에게 함락되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포로가 되고 폐위 당했다. 복음 혁명의 좌초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비극은 루터에게 보여주지 않으시려고, 그 비극의 좌절 1년 전에 루터를 하나님의 품으로 부르셨을까.

내 인생을 억지로 포장할 수는 없다. 역사는 과거를 어버이처럼, 현재를 친구처럼 소화해낸다면 앞날을 스승의 가르침으로 배우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법이다. 내 뒤를 따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아,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기 이전에 복음을 완성해 가야 할 나의 후진들아, 나 루터를 사정없이 짓밟으면서 너희 길을 가라…!!

조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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