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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다
계인철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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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호] 승인 2018.01.10  11:3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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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침례교회 담임

종교 인구가 날로 줄어들고 있다. 한목협이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의식 조사를 한 결과 종교인구가 5년 전 보다 8.5% 낮아진 전체 인구의 46%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율이 이렇게 낮아진 것은 처음부터 종교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몸담았던 종교가 싫어서 떠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생각으로의 전환은 종교가 내일에 경험하게 될 현실을 오늘 현재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종교의 미래에 대한 핵심은 젊은 세대들의 이탈인데, 20대는 30.7%에서 15.9%로 이전의 절반이 종교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아직 등을 돌리지 않았더라도 출석하지 않는 종교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은 이들도 언젠가는 떠날 수 있다는 가정을 하기에 충분하다. 공동체 예배보다 인터넷, 스마트폰 등을 통한 예배행위로 혼자 드리는 예배를 선호하는 신자들도 5년 전보다 거의 3배에 가깝게 늘었다고 한다. 이러한 종교 거부 배경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종교가 스스로 그 원인들을 제공하였다는데 그 심각함이 있는 것은 종교를 떠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실망하여서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 실망의 종류들 중 기독교의 경우 담임목사의 세습이 단연 앞자리였다.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것들은 이기적, 물질적, 권위적이라는 그동안의 끊임없이 사회로부터 고발당하였던 원인적 배경들이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다는 지난해에도 모 교회의 아들 목사 위임, 몇 차례 교회 회의에서 부결되었음에도 계속해서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려는 또 다른 교회의 모습들을 비롯하여 이미 세습을 단행했거나 계획하고 있는 많은 교회들의 모습은 주님의 뜻을 운운하지만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아버지의 뜻만이 살벌하게 활개 치고, 성도들은 목회자의 볼모가 된 듯 목회자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포기한다. 이 또한 어떻게 주의 종에게 그럴 수 있느냐며 지극히 신앙적인 것 같으면서도 철저히 인본적인 위조된 신앙의 합리화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토록 지난해 종교개혁 500주년 목소리를 높이며 개혁을 외쳤어도 기독교의 모습은 변한 것이 별로 없다. 가장 많은 변화를 외쳤던 종교가 가장 변하지 않은 모순덩어리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되었듯이, 이제 한국교회는 다시 복음으로, 그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돌아가는 참된 변화가 진정 있어야 한다. 

성경대로의 변화와 돌이킴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교회, 목회, 신앙이 성경적으로 돌아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자에게는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닌 당연한 삶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예수님은 생명을 버리셨는데, 오늘의 교회 목사들 중 일부는 아무것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지금은 설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 외쳐왔던 설교대로의 삶이 중요하다. 만약 강단이 삶이 되지 않는다면 어느 날부터는 교회로 전도하러 가자고 외치는 말들과 목사를 하나님께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쳐 주자고 소리치는 함성을 목사들은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새해가 되었다. 종교인구, 특히 기독교인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성도가 계속해서 하나님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 교회와 목사는 말이 아닌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들이 함께 타락해 가는 성도들을 돌이키는 길은 목회자가 먼저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질적 세상관을 털어버리고 성경과 예수 마음을 가지고 그동안 신어왔던 육체의 신을 벗어야 한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 하나님의 목전이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인본적이고 세속적인 신발을 벗고, 제발 거룩해지자. 새로운 설교가 아닌 그동안 했던 설교부터 살아보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가 ‘종교의 의미와 목적’에서 명사화된 ‘종교’보다 형용사인 ‘종교적’으로 삶이 되어 있었다고 했던 것처럼, 이미 종교는 살아감, 즉 동사다. 특히 기독교는 명사가 아닌 동사다. 살아감으로 삶이 되는 진리다. ‘설교하다’가 아닌 ‘설교 살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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