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종교개혁 부르며_2 / 기독교가 놓친 만인제사 원형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제사시대의 종결이고
또 이 행위는 제사이기에 이를 믿는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으로 제사시대를
뛰어넘는 새 시대의 등장일 수 있다.

 

만인제사(萬人祭司)는 모든 보편적 개개인들의 제사권(祭司權)을 가진 제사장(祭司長)을 말한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단독자의 신분으로 제사드리는 권리이다. 모든 개개인, 인류 모두가 제사장권을 행사한다면 또 다른 표현으로는 제사종교의 마지막을 선언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럼 제사시대의 마감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부자관계”로까지 상승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아담의 시대일 것 같다. 아담이 하나님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에덴의 성격이나 정서로 볼 때 에덴의 시기에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종교 이전 시대로 볼 수 있다.

인류에게 종교가 등장한 시기는 아담 부부의 ‘탈 에덴’, ‘출 에덴’ 더 정확하게는 ‘방출 에덴’의 시기 이후 카인과 아벨의 제사 대결에서 원시종교의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다음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종교시대’를 들 수 있다.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사는 독자, 또는 독생자의 제사이다. 독자이면 이삭이 제물이고 독생자이면 아브라함 자신이 제물이 될 것이다.

‘이삭’이 제물로 해석되어왔으나 이슬람이 등장하면서 ‘이스마엘’이 제물이라고 우기니까 ‘아브라함’을 제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포괄적이고 원형질에 가깝다. 아브라함이 제물이 되면 제사시대의 종결을 앞당길 수도 있다.

 

1. 성경이 제시한 만인제사

구약인들의 세계에서 만인제사는 아브라함의 모리아에서 찾을 수 있다. 100살에 얻은 아들, 아내인 사라의 생산기능이 끝난 뒤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났으니 이삭은 나사렛 예수와 매우 방불하다. 그리고 그가 제물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가계가 끝나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신이 제물로 끝나는 것이기도 하다.

한 인생이 후사를 두지 못하고 가족사를 끝내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족보가 끝장난다는 것 따위는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애는 하나님과의 약속에 따라서 해석해야 한다. 축복받은 민족의 약속(창 12:1~2)과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보다 더 많은 자손을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받은 인물이 아브라함이다(창 15:5). 그래서 이삭이 제물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약속의 파기다.

심각하다. 여기에 신비가 있다. 고뇌 끝에 아브라함은 제사의 마지막 단계로 이삭을 제단 불더미 속에 바치려 할 때 하나님은 인간(인류)을 더 설득해야 할 필요를 느끼셨다. 제물을 바꾸신다. 이삭 대신 숫양으로….

1) 숫양이 제물이 된 시대

제사 시대의 연장이다. 이스라엘 시대, 이삭이 유예된 제물이 되어 야곱을 낳았고, 또 모세의 시대와 다윗의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결정적 위기를 만나 긴급제물이 또 하나 필요했다.

2) 갈멜산의 엘리야

열왕기상 18장을 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목상 제사장 850명과 단독으로 제사대결을 한다.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은 남북조로 갈라져 있었으나 북왕조 인물로 엘리야가 마치 모리아의 이삭처럼 목숨 건 제물로 등장한다.

3) 예루살렘의 예레미야

엘리야의 불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지 3백여 년 후에 이스라엘은 북왕조는 멸망하고, 홀로 한 조각 유다가 남왕조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예레미야 혼자서 예루살렘을 지킨다. 당시 예루살렘을 위시한 유다국에는 5백여 명의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제외하고는 거짓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성전마저도 멸망한다, 다시 말하면 나 하나님이 버렸다고 말씀하셨는데 예레미야 혼자서만 올바른 예언을 했고 나머지는 거짓 예언자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목숨을 걸었던 아브라함, 엘리야처럼 예레미야가 홀로 죽기를 각오하면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지켜낸 것을 주목해야 한다.

4)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

이사야 53장을 이어받아서 예레미야가 등장했을까? 아니면 예레미야의 삶을 통해서 홀로 민족과 인류의 구원을 위한 모형으로서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이 등장했을까? 이스라엘 민족은 마치 말씀과 말씀을 따르는 자 사이에 큰 씨름판을 벌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드디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잘 알고 있는 마치 하나님의 속죄양, 제사시대를 단번에 끝낼 수 있는 제사 제물의 모형을 제시한다.

5) 골고다의 예수 제사

예수의 등장이다.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이 있다. 제사의 상징부인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예수는 말한다. 예수가 이 말씀을 선포하는 자리가 모리아이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부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언덕 바로 그 자리이다.

바로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하나님께서 매우 심각했던 모리아 제단(창 22:2~19) 그날로부터 2천여 년 가까운 구원사의 날들 중 어느 날,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 잘못된 예루살렘 성전의 한 모습을 본다. 장사꾼들의 현장이고 도적떼의 소굴이었다(눅 19:45~46).

그때 예수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일으키리라’(요 2:19)고 했다. 바로 이 선언이 단독자의 제사선언이다. 여기서 ‘이 성전’은 ‘예수 자신’을 말한다. 이 성전을 헌다는 것은 성전인 예수를 죽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고 하나님이시다. 예수가 아들의 자격만으로 죽었다면 제사시대 종결을 단언하기가 어려우나 예수는 아들이고 또 아버지 자신이기도 하다(요 14:9~11).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제사시대의 종결이고 또 이 행위는 제사이기에 이를 믿는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으로 제사시대를 뛰어넘는 새 시대의 등장일 수 있다.

이런 형식으로 예수가 말씀하신 ‘이 성전을 헐어라’를 해석하는 것도 신학적 접근일 수 있다. 특히 공관복음에서는 마지막 유월절 전 주간에 성전으로 달려가서 내 아버지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곳인데…, 또는 내 아버지 집을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하시면서 채찍을 집어드는 행위에서는 성전의 가치가 훼손되는데 대한 예수의 분노를 보게 되지만 요한복음 2장에서는 이거, 왜 이러지?가 된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의 공생애 마지막 사건이 요한복음에서는 공생애 출발점에서 성전에서의 언행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성전에서의 문란 행위를 공생애 출발점으로 옮긴 행위는 공관복음과의 시제(tense)의 변화가 일단 예사롭지 않다.

제자들의 글 특히 바울의 경우는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를 성령 안에서의 교회로 말하면서 예수와 신자의 관계를 ‘이신칭의’(롬 3:21~22)로 정리하고 있다.

바울의 ‘이신칭의’를 로마제국(가톨릭) 교회로부터 되찾아내면서 마르틴 루터는 ‘만인제사’를 붙잡는다. 이를 다시 말하면 루터의 이신칭의와 만인제사는 두 겹으로 단단하게 장치한 인간구원론이 되겠다.

 

2. 마틴 루터의 만인제사


만인제사는 마틴 루터의 상징성까지 보여주는 그의 사상적 총체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 사제직에 대한 대응책으로 성경 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만인제사론’을 끄집어냈다. 그 이전의 사람들이 ‘만인제사론’을 몰랐다기보다는 제자들 시대와 카타콤 시대로 표기할 수도 있는 콘스탄티누스 등장 이전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과 헬레니즘을 상대로 마치 육탄전을 하듯이 살아온 관계로 만인제사론 같은 고급 사상을 거론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예수의 종교 종결론에 대한 종교시대의 끈질긴 세력들의 저항으로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만인제사론은 사실상 예수 재림기의 주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루터시대는 만인제사론이 마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과 같다고 할까. 기독교는 루터시대가 아니라 오늘 21세기 현재에도 만인제사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최소한 만인제사론은 메시아 예수의 진면목의 깊이를 알아야 한다고 할까. 유대교·기독교·이슬람 간의 갈등이 갈등일 수 없는 수준까지 뛰어올라서야만 가능한 어느 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

 

1) 루터의 초기 만인제사론

루터의 만인제사는 그의 로마서 강해(1515~1516년)서에서 나타나고, 1520년 경 그의 신약성경에 대한 설교에서, 그리고 1521년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에서 그 면모가 드러난다.

그의 만인제사론은 단숨에 서유럽 일원에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특히 루터가 등장하기 전부터 있어왔던 농민반란세력에게는 불더미에 기름을 끼얹을 만큼의 폭발성으로 나타났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고급스러운 신학적 공격용으로 사용했을 법하지만 16세기 초 지구인들의 욕구에 마치 핵무기를 던진 것과 같았다고 할까.

루터의 만인제사론은 천동설이 지동설로 교체되는 세계관의 시대, 구텐베르크의 활자와 인쇄술의 등장, 해양 실크로드 시대의 본격화, 유럽의 팽창, 오리엔트 문화의 도전 등으로 질식할 것 같았던 교황권 시대가 산산조각 날 만큼의 위력이었다.

2) 잘못 건드린 화염검

루터는 만인제사론을 발표한 후 종교개혁 세력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농민반란군, 또 그들을 지원하는 인문주의 세력들, 급진 개혁세력들, 봉건 영주들 중에 교황권의 횡포를 벗어나고 싶은 신흥 영주들이 루터 주변에 몰려들었다.

루터는 종교혁명을 개혁으로 알고 덤벼들었다가 본인 자신이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몰되어간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농민반란군 통제가 되지 않았다. 영주들은 골치 아픈 농민반란 사건을 루터에게 전폭적으로 위임해버린 지경인데 루터의 실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루터는 농민반란군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수준을 극복하지 못했다.

3) 루터가 요리한 만인제사론

루터가 입에 담은 만인제사론은 완전한 비폭력 카드였다. 그 선언자는 만인제사의 주인공으로 오직 한 사람 메시아 예수다. 앞서 언급한 아브라함, 엘리야, 예레미야의 삶을 보라.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을 상대했다. 그들의 완전자이신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폭도들에게 잡히기 전에 제자들 중 하나가 대제사장 집 수종자 한 사람의 귀를 잘랐다. 그때 예수는 칼 거두라!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한다 하셨고, 골고다에서 죽으실 때 역시 완벽한 비폭력 무저항이었다. 더 설명이 필요 있는가?

4) 루터는 만인제사론을 포기했나?

마르틴 루터는 농민반란군을 진멸한 후(1525년 7월) 모르기는 해도 엄청난 후회와 좌절을 맛보았을 것이다.

루터는 1530년 이후에는 기독교의 조직 속에서 목사직과 감독직에 대한 윤곽을 밝힌다. 이는 만인제사설이 이미 무정부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초기의 만인제사설의 후퇴 또는 유예이기도 하겠다.

이보다 먼저 루터는 ‘만인제사장’ ‘일반제사장’을 구분했다. 이 두 개념은 비슷한 듯하지만 다르다. ‘만인제사장’은 ‘모든 사람(신자)이 조건 없는 제사장’으로 일반 신자로서의 제사장, 또 세례 받은 자로서의 제사장으로 만인이 모두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이는 가톨릭의 특정한 신분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자’와 구분하는 지위를 말한다.

만인제사장과 분리해 ‘일반제사장’은 특별한 서품이 없이도 사제의 역할을 하는데 ‘목사’직도 일반 제사장으로 분류했다.

루터는 일바직 제사장은 누구나 위급한 상황에서는 공적 사제직을 행사할 수 있지만 공적 예배 때에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전하는 하는 ‘목사’직의 일로 모든 (교회) 공동체가 선택하고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루터의 만인제사설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다. 그러나 모두가 목사는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의 언행은 대개 자기 편의에 따라서 변했다. 그는 1520년 만인제사장 언급을 처음 했을 때, “믿음이 전부다. 믿음만이 진정한 제사장이요 믿음은 누구라도 제사장 외에 다른 것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인은 목사다. 모든 여자들도 목사다. 젊은이나 노인이나 주인이나 종이나 여자나 소녀나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않은 사람이나 여기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고 선언한다.

지극히 선언적이고 감정적이다. 그래서 무책임일 수 있다.

루터는 만인제사론 해석은 1517~1520년, 1520~1523년, 1524~1529년, 그리고 1530년 이후로 단계별 변화했다. 1530년 이후는 로카 가톨릭과 완전 결별로 목사직과 감독직이 뚜렷이 나타난다. 이신칭의는 만인제사론과의 동반관계로 환경 따라서 해석이 바뀔 수 없는 메시아 예수의 몸체인데 말이다.

(계속)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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