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종교개혁 부르며_3 / 만인제사 없는 이신칭의는 위선

1. 성경이 제시한 만인제사

“이신칭의” 신학은 바울이 성안하고 루터가 본격 제의했으나 그것의 성취는 “만인제사”라는 벽에 부딪치면서 아직까지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완전성에 이르지 못했다. 만인제사는 이신칭의와 별개로 논의할 때는 정치학이 되지만 함께 묶으면 조직신학이 된다.

마르틴 루터가 더 깊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인제사”를 꺼내들고 16세기에 뛰어들면서 거대한 돌풍현상을 일으켰으나 유럽교회는 큰 희생과 좌절을 겪었다. 루터는 주로 교황권의 도덕성 문제로 “개혁”을 요구했으나 그 사안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었다. 특히 루터는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혁명적 과제임을 모르고 섣부른 손으로 만졌다가 혼쭐이 난 것이 바로 “만인제사론”이다. 억압된 중세 천년의 유럽사를 너무 쉽게 취급했음을 미처 몰랐었다.


2. 지식에 기초해야 했다

이신칭의의 근원이 예수의 십자가에 있고, 십자가 신학의 태동과 그 성숙과정의 날들을 미리 알았다면 너무 경솔한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십자가 신학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에 그 시원을 두고 있다. 아브라함 개인의 신앙과정만 보더라도 이 신학적 요구가 얼마나 큰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갈데아 우르에 살 때에 그의 부친이 달 신의 제사장 일을 했다. 그는 부친의 신앙과 자기 신앙 간에는 고통스러운 갈등이 있음을 일찍부터 깨달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기존 삶의 기반 모두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나안 지방으로 떠나와서 살다가 100살 되어서야 얻은 아들, 하늘의 별, 바닷가 모래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자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통해서 얻은 그 아들 이삭, 바로 그 아들을 모리아에 바치면서 마련한 십자가 신학의 원시형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신학에 기초하여 이룩한 “이신칭의”까지가 2천 년 걸린 결과물이다. 이신칭의 신학을 발견한 바울의 로마서(3장 22절 이하) 이후 1500년 만에 루터는 힌트를 얻게 된다.

 

1) “이신칭의”는 도(道)의 경지와 같다.

이신칭의 신학은 아브라함, 바울, 그리고 루터에 이르기까지 수천년에 걸려서 마련된 것으로, 결코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신학이다. 마치 구도자가 평생 몰두해야 할 만큼, 또 평생구도에서도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을 만큼의 각오를 해야 하는 자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신칭의”는 그 스스로 자기 증명을 다 하기가 쉽지 않은 과제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절차를 말씀하신 일이 있다(눅 18:25). 부자가 천국 가는 일이란 낙타의 바늘구멍 통과나 다를 바 없다는 말씀이시다.

또 다른 경우는, 아흔 아홉 마리를 우리 안에 두고 잃은 양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산을 헤매시는 목자 이야기(눅 15:4~)에서도 말로 하기가 쉽지 않은 어떤 비밀에 있는 듯하다. 바울의 경우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한다(엡 4:13) 했는데 이 또한 바울답지 않은 논리의 불확실성이다. 사람이 예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한 표현이다.

바울의 글에는 이 같은 불확실한 논리 전개가 거의 없는데 말이다.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러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을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8~9) 하였다. 이 말씀이 당시 빌립에게 명쾌한 답변이 되었을까?

우리는 명쾌하지 않다. 나(예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가 쉽게 우리 마음에 안착할 경우 정통신학이 오늘날처럼 고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또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으로 사시지만 이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라는 정통 기독론이 교회 안에서까지 시비 거리가 되는지라 교회가 하나님의 모습을 온전히 제시하기가 어렵다.

빌립아! 내가 너와 이토록 오래 함께 있었는데 내게 하나님의 모습(생김새)을 묻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쉽고 또 어렵다. 왜 이렇게 쉽지 않을까? 


3. “이신칭의”가 어렵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말인데, 바울의 표현을 루터는 너무 쉽게 시장바닥 같은 세상으로 끌어냈다. 바울 같은 천재도 조심스럽게 그것도 얼마간의 모호성까지 동반한 표현으로 접근했는데 루터는 마치 자기가 최신 발명품을 만들어낸 양 주의사항도 첨부하지 않은 채 대중적 언어로 조심성 없이 내놓았다.

1) 그는 교황권에 대한 견제만 생각했을까?

믿음으로 의로워진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를 표현하기 위해 이신칭의를 대용어(대칭어)로 사용했음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교황이 면죄부를 팔면서 행위신앙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대응 언어로 이신칭의를 사용했다면 이는 대들보를 잘라서 이쑤시개로 사용한 꼴이다.

바울의 로마서가 말하는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로워진다 했을 때 “믿음”은 세속어 또는 사전적 어휘가 아니라 “계시어”이다. 계시어라 함은 여기서 “믿음”은 “예수”, 십자가 죽음을 통과한 “부활 예수”의 동의어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저(앞뒤 생각 말고) 믿기만 하라는 식의 5일장 끝물에 떨이 물건 팔아넘기듯이 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구원은 아무나 와도 좋기는 하지만 매우 값비싼 생명의 구원임을 망각하게 하는 표현법으로는 안 된다. 바울은 본디 그리스형 철학자다. 그의 글이나 말은 기본적인 논리에 근거해서 표현한다. 그런데 바울의 “믿음”이라는 표현이 한국어의 믿는다, 믿어라, 믿기만 하라는 어법으로는 부족함을 알아야 한다.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용어가 믿음이라는 계시성을 따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 믿음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한국의 언어는 언어기능 자체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2) 십자가 죽음의 세례를 받은 믿음이 곧 인간의 구원이다.

“이신칭의”라는 신학적 언어는 홀로 십자가에 달려 나와 너를 대신해 죽은 대속의 죽음이 담보된 그 예수를 믿는 것임을 뜻하는 것인데 이를 표현해줄 어휘를 단어나 숙어의 범주 안에서 만들어낼 길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수식어를 동원하거나 이런 저런 설명어를 끼워넣어야 겨우 그 윤곽을 표현해내는 길밖에 없다.

그러니 앞뒤 뚝 잘라내고 이신칭의가 우리의 구원이라는 고도의 신학적, 구원사적인 뜻을 함축한 이신칭의를 쉽게 해독(解讀)해내기는 쉽지 않다.

 

4. 만인제사와 이신칭의

루터는 이신칭의를 내세울 때 이신칭의의 또 다른 표현이 만인제사임을 알았을 것이다. 이신칭의를 아는 사람은 만인제사를 알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신칭의와 만인제사는 존재 그 양면성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신칭의의 성립은 만인제사의 동반에서 성립된다. 만인제사  이신칭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사 교회의 이름으로 제국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이른바 카타콤 300년 동안 사투를 하다가 완성도 한발자국 전에 콘스탄티누스를 만나서 기독교 최고의 자리를 그에게 양도해 버렸다. 이 때문에 중세 일천년이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형벌이기도 하다. 그래서 죽은 듯이 무덤의 세월처럼 살아있었다. 간신히 근세사가 열리는 16세기의 아들들(루터와 개혁자들)의 시대에 “이신칭의”를 말하고 “이신칭의”의 결정적 표현양식인 “만인제사”까지를 동원했으나 이 둘이 제대로 만나기로는 그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1) 성질 급한 비텐베르크의 루터
 

루터가 너무 성질이 급했다. 루터는 1515년경부터 그의 신학자적인 자질에 따라서 “이신칭의” 신학은 어느만큼 성숙도를 보였다. 그리고 “이신칭의” 신학의 개척자요 십자가 신학의 표상처럼 등장한 그는 1525년 농민반란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그의 신학적 완성도를 의심 받는다.

루터는 가톨릭 귀족(영주)들보다 지혜롭지 못했다. 가톨릭 사람들이 농민반란 처리를 루터에게 위임하자 루터는 자신감 있게 떠맡았으나 폭력으로 폭력을 대응한 결과 수만 명의 아까운 생명들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악마적 방법론으로 폭력을 제어할 수는 없다. 또 폭력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우리들의 구세주는 무조건 폭력 거부, 결코 폭력을 용납지 않으신다. 폭력 앞에 내 목숨을 내던져버릴망정 폭력과는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바 있다.

2) 개혁자들이 불러들인 폭력

마르틴 루터가 농민반란 세력들과 시비하고 있을 때 “만인제사론”의 세력이 등장했다. 취리히 쯔빙글리의 제자들 일곱 명이 재개혁론(재세례)을 들고 등장했다. 그들의 사상적 배경을 보면 루터의 만인제사론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 그들 사상이 재세례파라 했으나 핵심사상은 “만인제사론”이다. 1525년 1월 21일 그들 재세례파라 이름하는 취리히 친구들이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했다.

그때 그들에게는 한나절의 기회도, 해명, 변명, 변증의 시간을 주지 않고 정통개혁자(제1개혁자)들이 달려들어 잡아 죽였다. 가차 없이 벌레 죽이듯이 밟아 죽이고, 땅을 파고 산채로 매장하고, 목에 맷돌 묶어 강물에 던지고, 불태우고, 사지를 찢어 죽이는 등 미쳐도 그렇게 미친 자들이 없었다.

나치나 공산당 사람들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왜 그렇게 쉽게 사람이 사람을, 그것도 프로테스탄트끼리 서로 조금 다르다고 죽였을까? 16세기는 종교개혁과 함께 유럽(북서유럽)이 미쳐서 광란하던 때였다. 루터나 칼빈이 살아있는 때부터 죽이고 죽기를 시작해서 1799년 프랑스 대혁명이 대체로 끝나기까지 유럽 프로테스탄트는 300여 년 동안 참으로 많은 희생을 부르고야 말았다.

3)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의 갈등

“이신칭의”가 캐논(The Canon)이지만 이를 증명하는 방법은 “만인제사”이다. 만인제사란 천하 만인이 하나님 앞에 제사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말함으로 완전한 신앙, 완전한 구원을 말하나 이는 필연적으로 “이신칭의”의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서로간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단일성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이신칭의”는 씨앗이 되고 만인제사는 그 열매랄까, 또 원인과 결과랄까, 아니면 한 존재의 양면이 되기도 한다.

요즘 종교개혁 500주년을 전후해서 “만인제사론”을 지나치게 단순 강조하는 사람들이 교회라는 실체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고, 그럴 경우 교회가 경계하는 불상사가 있기도 하지만 이 둘은 피할 수 없는 “생명의 자기 동일성”을 가진다.

흔히 교회가 모이기를 소홀이하는 자들이 만인제사론자들이라고 시비하는 일이 있어도 문제지만 (무교회파처럼) 그 같은 걱정을 끼치는 만인제사 행위도 또한 자기 완성에 빈틈을 보였음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현실은 만인제사 없는 이신칭의의 맹목성은 위선으로 귀결하게 된다. 열매 없는 나무 신세라고 할 수도 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음이라는 것과도 같다.

기독교인들이 일반인들에게 욕먹는 부분이 “위선”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신앙은 그 사람의 내면에 정직성과 겸손, 더 나아가서 희생하는 자세이다. 이러한 덕목들은 혼자서도 교회를 대신하고 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는 바로 그 신앙의 기본이 만인제사에서 마련된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는 만인제사로 화답하여 기독교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계속) 

조효근/본지 발행인

* 본 기획지면은 종교개혁이후 개혁 대안 및 의견이 있는 필자들의 자진 참여를 위한 공간으로 마련했습니다. 목회자나 성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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