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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종교개혁, 슈페너의 경건주의 운동제3종교개혁 부르며_4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불 지핀 경건주의
조효근/본지 발행인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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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호] 승인 2018.01.31  16: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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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루터파 교회 지도자인 필립 슈페너(위 사진)에 의해 시작됐다. 슈페너 사상은 독일뿐 아니라 영국, 그리고 뉴잉글랜드까지 전파됐다.

슈페너는 
<경건의 열망(Pia desderia)>이라는 책을 
1675년에 야심적으로 내놓는다. 
기독교의 이기주의적이고 교리를 뽐내는 행위들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근원적 가치에 공동체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1. 경건주의 등장

계몽기와 경건운동 중 어느 쪽이 먼저인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계몽사상은 1세기 후반에서부터 유럽의 지성계층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새 종교 운동을 표방하며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자기들의 작은 목표에 취해서 상대를 악으로 설정하는 자세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신앙 표준에 맞지 않을 경우 상대방의 신앙운동을 모두 사단의 행위로 몰아가면서 인명살상을 서슴치 않는 새 종교 운동가들의 행위 그 자체에 경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600년대가 끝날 무렵 프로테스탄트 일각에서는 자기네의 신앙적 독단에 대한 반성을 시작했다. 온통 유럽이 전쟁터가 되어가는 비참한 현실이 부끄럽고 유럽의 지성계가 신·구 기독교 현장을 혐오하고 있음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1) 경건주의 주창자 슈페너

경건주의(pietism) 운동이다. 교회는 교리적 시비가 아닌 신앙의 내적 경험과 행위 중심으로 신앙을 표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신칭의”에 매몰되어가는 한 시대의 반성이었으면 하는 요구에 따른 것이다. 이 같은 경건주의 운동가들의 활동은 자선사업과 사회 복지 운동의 사례에서 그 특징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운동은 “제2의 종교개혁”(The second Rdformation)으로 표기되었다.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루터파 교회 지도자인 필립 슈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경건의 열망(Pia desderia)>이라는 책을 1675년에 야심적으로 내놓는다. 기독교의 이기주의적이고 교리를 뽐내는 행위들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근원적 가치에 공동체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칫 마르틴 루터가 싫어하는 로마 교회의 덕목인 행위우선 신앙으로 비판받을 수 있었으나 그는 성직자의 재교육, 성경 중심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랑의 실현을 위한 자선과 복지, 그리고 해외선교 등을 강조했다.

슈페너 사상은 독일뿐 아니라 영국 그리고 뉴잉글랜드까지 전파되었다. 뉴잉글랜드는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자유로운 신앙을 원하는 이들의 터전인데 슈페너의 경건주의 유입으로 대각성기를 조성한 놀라운 전기를 마련했다. 서유럽은 물론 북유럽 일대가 계몽철학기 위세로 지리멸렬해가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에는 더없이 적절한 계기였다.

단숨에 유럽 기독교의 명망가가 된 슈페너는 경건운동의 지속을 위해 교육기관이 필요했다. 그는 할레대학(University of Halle)을 설립했다. 이 대학 출신들은 경건주의 주창자로 독일과 프러시아에서 지도자를 양성해 세계 각지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할레대학 출신들은 로마 가톨릭이 안에서 잃은 것 밖에서 찾자는 구호를 내걸고 예수회 운동(1540년 교황의 인허)을 의식했을까? 예수회 설립자인 이그나시우스 로욜라는 제2인자인 프란시스 사비에르를 1550년 이전에 인도, 중국, 일본 선교사로 파송했다. 예수회보다는 늦었으나 슈페너 그룹도 본격 해외 선교의 출발을 했다. 인도와 중국은 물론 조선 왕조 순조 2년에 군산 바닷가 주민들에게 선교활동을 했던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   tzlaff)도 할레대학 출신이다.

경건주의 주창자인 슈페너의 할레대학은 해외 선교 중심답게 언어학과 설치에서도 세계 최초인데, 선교는 물론 동서인류문화사에도 기여했다.

할레의 경건운동은 제2의 루터운동이었다. 이 대학은 루터의 개혁운동 기반인 비텐베르크대학과 후일에 병합했는데 루터의 “이신칭의”를 슈페너의 “사랑 행위”로 보완해가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필요조건이라 해도 될 것 같다.

2) 경건주의 운동의 프랑케

슈페너를 승계한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는 단순한 창업자의 승계자가 아니라 종교개혁의 기본원리를 기본 사상으로 선택한 행동가였다. 프로테스탄트의 기본원리는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의 두 기둥의 조화에 있다. 이신칭의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대속사에 있고, 이의 행동강령은 사제의 중보가 별도로 필요치 않은 천하 만인들의 제사권 행사에 있다. 기독교 역사가 슈페너를 제2 루터운동으로 자리매김해온 것은 신앙은 오로지 입술(고백)의 열매인 사랑의 행위로 완성된다고 한 스페너가 있고, 그의 또 다른 구체적 신앙운동은 신자들의 성경공부와 소그룹운동이다. 이 또한 생활기독교의 기초가 될 성경공부에 대한 최소한의 장치가 소그룹임을 프랑케가 보완하고 있다.

프랑케 운동은 소그룹의 성경공부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성경보급 운동을 서둘렀고, 일종의 프랑케 기관이라고 하는 무료시설로서의 학교, 고아원, 약국, 병원, 도서관 등의 사회사업 기관을 전 인류적 근대복지로 선언하고 행동했다. 민간운동으로서의 교회가 유럽 정부들보다 1백여 년 앞선 운동이니 이로써 경건주의 운동의 실력을 말해준다.

3) 공동체 운동의 진센도르프 백작

할레대학 출신 중 프로테스탄트 역사 인물 중 진센도르프(Zinzendorf, 1700~1760)가 있다. 진센도르프는 광대한 영지를 가진 귀족이다. 후덕한 신앙으로 소문난 그의 영지에 어느 날 5백여 명의 모라비아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지난 신·구교 30년 전쟁(1618~1648) 중에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삶의 터전마저 잃은 유랑 난민들이었다. 진센도르프는 자기 영지에 이들을 수용했다. 이들 유랑인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지만 진센도르프는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 그들 모라비아인들은 진센도르프를 중심한 신앙공동체로 발전했고, 이들 중에서 전 세계 각 지역으로 수백 명의 교사들이 파견되었다.

4) 경건파들의 헌신

경건주의 운동은 진센도르프와 더불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지와 재산을 내놓았다. 진센도르프와 그의 경건한 공동체는 인종, 신분, 종파, 국적까지도 가리지 않고 함께 살기 운동에 온몸을 던졌다.

그들에게는 계몽철학자들의 비웃음이 뼛속을 헤집는 고통 동반의 희생이었는지도 모른다. 계몽 사상가들의 비난은 종교개혁기 뒷감당을 못하고 있는 유럽교회, 특히 프로테스탄트 운동가들에게는 독초처럼 쓰라리고 위기감을 피하기가 버거웠다.

18세기는 산업혁명기 한복판의 과정이었다. 지속되는 전쟁으로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온통 생지옥이나 다를 바 없고, 그 가운데서도 빈부격차는 중세기보다 더하고, 상류 계층들은 부와 여유 속에서 즐기고 가난한 하층민들은 가난과 질병으로 지옥 같은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긴 농부들은 도시로 몰려들고 그들은 도시 빈민이 되어 가난한 하층민들의 숫자를 늘려가고 있었다. 독주에 취한 알코올 중독자들은 남녀 가를 것 없이 유럽사회를 더욱 슬프게 했다. 술취한 사내들은 길바닥에 누워 자다가 전쟁터로 끌려가고 함께 취한 여인은 아기에게 줄 젖이 모자라서 술을 먹였더니 아이도 함께 취하더라고 했다.

5) 경건운동의 확산

경건주의 운동은 유럽교회의 내적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는 요구를 저버릴 수 없었다. 가톨릭이라는 보금자리를 뛰쳐나온 개혁자요 혁명아가 될 수밖에 없다. “이신칭의”라 했다. 이신칭의는 그 본 성품이 단독적인 고백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신칭의는 교리적 속성이 강해서 그 자신 안에 내재한 복합성마저 멀리하려 든다. 내가 믿어 구원을 받는 그 대상, 내가 믿는 상대는 예수, 그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창조해낸 이신칭의는 내 대신 죽으신 예수의 목숨이기에 나의 믿음은 예수의 죽음 선택에서 온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는 중세 가톨릭의 행위 중심에 대한 혐오와 유혹을 계속해서 경계할 수밖에 없을까.

그러나 18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생존은 무조건 교리 중심에서 경험과 사랑을 지향하는 길뿐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건너는 과정에서도 빈곤과 무지의 함정에 빠진 유럽 기독교의 생존은 박애와 사회복지 운동을 통해서 출구를 찾는다.

6) 프랑케 계보의 요한 비커른(Johann Heinrich Wichern, 1808~1881)

요한 비커른은 프랑케 계보를 이어가는 루터교 목사였다. 그가 주목한 대상은 굶주리고 버려진 길거리 아이들이었다. 그는 1833년 함부르크에 “라우헤스 하우스(Rauhes Haus)”를 세웠다. 빈곤한 아이들을 위한 복지시설이었다. 고아원이 아니라 아동교육과 직업훈련을 위한 사회복지기관이었다. 1848년 비커른과 그의 동료들은 비텐베르크에 있는 루터의 무덤가에 모였다. 그들은 그들이 시도하는 “디아코니아”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자고 했다. 그들의 이 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종교단체의 운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 마을에 도서관, 일요학교, 병원, 진료소 등을 설립하고 알코올 중독자, 나환자 요양기관까지도 확대해갔다.

이밖에도 더 많은 사회복지나 인간 치유를 위한 시설을 마련하는 경건주의 운동과 마르틴 루터의 독일을 살펴보았다. 16세기 루터 이후 루터를 보충하고 보완해가는 마르틴 루터의 후예들은 복음의 완성도를 높이는 그날까지 쉬지 않을 듯하다.


2. 영·미국의 대각성기

1) 요한 웨슬리와 대각성 운동

요한 웨슬리의 복음운동이 없었더라면 영국도 프랑스와 같은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라는 역사학도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와 다르다. 프랑스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에서 사실상 제외된 국가요 중세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체제마저 거부한 독자적인 국가 운용이 가능한 귀족들과 교회의 권력을 의식하면서 절대국가 체제를 지켰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 함께 16세기 중반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대세를 이루었고 더구나 영국(잉글랜드)은 헨리 8세의 독자적인 개혁운동과 맞물려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출현기부터는 군주와 시민대표인 의회가 권력을 분점했으니 프랑스와는 다르다. 그러나 프랑스가 농경사회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때 영국은 기계문명을 동원한 산업사회를 맞이했고 17, 18세기 기간에 도시와 농촌의 갈등은 물론 도시화 현상이 프랑스보다 앞섰기에 프랑스 혁명보다 더 참혹한 혁명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을 생각할 때 요한 웨슬리의 복음혁명이 산업혁명 시도를 원초적으로 제거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웨슬리 운동을 기독교는 세계사 진단에서 피의 혁명을 차단시켜준 요한 웨슬리 운동이 할 수 있다.

(1) 요한 웨슬리 등장기의 영국

18세기 영국의 귀족과 부유한 중산층의 생활규모는 가히 왕이 누리는 조건과 비슷했다. 이에 비해 하층민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16세기 후반부터 국왕과 시민들의 통로인 의회가 구성되었고 인구 성장도 느슨했기에 하층민들의 생활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들어 인구 급증현상은 프랑스 파리가 3배 성장일 때 영국 런던은 12배로 급격한 도시 팽창을 이루면서 비교적 안정적이던 부와 빈자들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도시 하층민들이 유럽사회 현상과 같이 비참해져가고 있다.

(2) 요한 웨슬리 소명과 진센도르프

요한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사무엘 웨슬리 목사의 열다섯 번째 아들로 1703년에 태어났다. 그의 성장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는 옥스퍼드 장학생 출신이었고 스물두 살에 집사목사, 스물여덟 살에 장로목사의 수순을 밟은 영국 국교회 소속이었다. 모범적인 목사로 살고 싶었던 그는 그의 모교이며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 친구들이 마련한 옥스퍼드 홀리클럽이라는 소그룹의 지도목사이기도 했었다. 그는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뉴잉글랜드(미국)를 오가면서 주로 인디언 계층 선교에 몰두했다.

요한 웨슬리의 성격은 메도디스트 곧 규칙주의, 법식주의자라는 애칭을 주변으로부터 얻을 만큼 쉽게 말하면 모범생이며 모범생 인물들 양성을 목표로 했었다. 그러나 그는 내면의 숨은 갈등이 있었다. 그 자신의 착한 욕망을 뒷받침해주는 영적 평안을 경험하지 못했다.

한 번은 뉴잉글랜드 선교 중에 낭패를 겪고 도피하다시피 본국으로 가는 대서양 위의 선상에서 큰 풍랑을 만났다. 어찌나 큰 풍랑인지 배가 뒤집힐 듯했고 그는 심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 배의 한쪽에서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며 열광하고 있었다. 모라비아 교도들이었다. 진센도르프 백작의 지도를 받는 유랑 전도단이었다. 웨슬리는 그들 가까이 가서 물었다.

“목숨이 두렵지 않으냐?”

“이보시오. 신자는 이럴 때 더 크게 찬송해야 하고 부르실 때는 기쁨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임을 모르시오.”

개망신을 당했다. 영국에 돌아왔으나 목사는커녕 한 사람의 평범한 신자 노릇도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에 런던의 올더스케잇 거리 예배자들을 만났다. 진센도르프의 제자들이었다. 보슬비 내리는 석양. 설교자도 없어 보이는데 앳된 청년이 책 한 권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것은 루터의 로마서 강해서였다. 청년은 책의 서문을 읽었다. 믿음으로 의로워지느니라, 하는 부분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한순간 요한 웨슬리의 가슴이 후끈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 몸에 어떤 신호가 왔다. 그때부터 요한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 가까이에서 그가 신앙적 격려를 받고 있음을 느꼈다. 그 때가 1738년 5월 24일, 그의 나이 35살이었다. 그는 서서히 강단에 설 수 있는 자신감을 얻어갔다. 그러나 그는 하루는 자신이 있고 또 하루는 자신이 없는 듯 들쑥날쑥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꾸준히 지켜내지 못했다. 웨슬리의 비중을 헤아렸을까. 모라비아 교도들은 웨슬리가 진센도르프의 지도를 받도록 하는 등 그의 영적 성장과 성숙 과정을 치밀하게 살핀 것으로 알려졌다.

요한 웨슬리는 드디어 산업혁명기 도시 빈민들, 광산촌, 노동자 계층들의 일터 등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는 부지런했다. 그는 1738년부터 1791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53년 동안 크고 작은 집회에서 설교했는데 전기 작가 (A)의 기록에 의하면 하루 평균 7회인데 어떤 날은 17회, 또 적게는 5회였다고 했다. 놀라운 추진력이고 돌파력이었다. 영국 각 도시는 물론 영국의 식민지인 뉴잉글랜드(미국)를 오가면서 그는 부지런히 복음을 외쳤다. 그가 설교하면 듣는 자들 중 넘어지고 쓰러지는 등 회개와 회복의 은사를 맛보는 사람들이 그의 복음 전파의 열심을 독려했었다.

그가 그토록 복음전파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이유는 당시 계몽철학자들의 기독교 비판, 심한 경우는 기독교 무용론까지 들고 나오는 현상과 도시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이 인류 구원을 말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한없이 무력해지고 사회는 마치 무정부 상황으로 말려들어가는 현상에 위기감을 느꼈던 것일까.

(3) 요한 웨슬리 복음운동의 성공

웨슬리가 활동하는 동안 영국의 산업사회는 상당한 수준으로 안정되어갔다. 이웃나라인 프랑스는 대혁명기(1789~1799)에 돌입했으나 영국은 비교우위의 안정기에 들어갔다. 튜더 왕조의 중간기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경쟁할 때에 헨리 8세의 로마 제국의 교황권과 단절하고 독자적인 개혁을 선언한 이후, 엘리자베스(1558~1603) 시대는 종교와 정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제압하고 해양대국으로 입지를 분명히 했다. 17세기는 공화정과 왕정 복고의 과정을 거치기도 했으나 명예혁명(1688년 무혈혁명)의 성공으로 입헌군구정을 안정시켰다. 드디어 웨슬리 활동기 만년에 이르렀을 때는 새로 독립한 미국(1776년 독립)을 식민지에서 해방시켜주고도 복음운동의 성공을 말할 수 있었다. 뉴잉글랜드 시절인 대각성기(1750년대 이후)를 이끌었던 요나단 에드워즈나 죠지 휫필드가 요한 웨슬리와 무관하지 않았다. 미국의 대각성기 인물들이 계몽철학의 반동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도 있는 슈페너의 경건주의운동 흐름을 따랐으며, 또 경건주의 운동의 할레대학 출신인 진센도르프의 신앙 전통을 승계한 웨슬리는 신학적으로도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 신학과 그가 보완한 경험적 이신칭의 신학일 수 있는 프로테스탄트 중간기를 책임지는 사명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대영제국”이라 감히 말할 수 있는 토대를 영국은 18세기 말에 성취하기 시작했다. 세계사 최초의 공업국이요 산업혁명을 성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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