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락/ 번역가


돈을 받고 처음 번역한 책이 신학책이었다. 처음 맡은 일감이었고, 진작부터 해보고 싶었던 번역 일을 맡을 뜻밖의 기회가 주어진 터라 열심히 했다. 스승도, 노하우도, 개념도 없이 그냥 열심히 했다. 그런데 원고를 보내고 한참 지나 빨간 줄과 물음표에다 때로는 대안 번역까지 제시된, 편집자의 고뇌와 한숨이 느껴지는 지극히 친절한 피드백을 받고서 비로소 번역작업의 기본과 맞닥뜨렸다. 번역은 외국인 저자의 사상과 표현을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오롯이 한글로 전달하는 작업이라는 기본 말이다. 편집자의 안내를 받아 비로소 나는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식하며 번역에 임할 수 있었다.

신학책에 이어 신앙 에세이로 분류할 만한 책을 맡았을 때, 새로운 장르와 저자를 만난다는 흥분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교차했다. 그런 느낌은 이후 설교집을 처음 번역하게 되었을 때도, 소설 번역을 앞에 놓고도, 겁도 없이 철학책을 맡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기본적인 외국어 독해력과 한글 문장력, 독서와 상식과 검색으로 승부하는 전업 번역가에게 평소에 더 읽은 주제와 덜 읽은 주제가 있을 뿐, 새로 만나는 저자의 모든 책은 번역에 있어서는 미답의 영역이었다. 그냥 알고 지내던 친구를 연인으로 만날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을 상대하게 되듯, 독자로서 읽는 저자와 번역을 해내야 하는 상대로서 만나는 저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그러나 새로운 장르와 저자를 만나는 것은 위기이기도 했다. 원래 알던 사이처럼 전혀 어려움 없이 수월하게 번역이 되는 저자와 장르가 있는가 하면, 심하게 삐그덕거리고 머리 아프고 속도도 더디고 결과물도 신통찮은 저자와 장르도 있었다. 번역을 시작하고 몇 년 간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자괴감에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왜 이렇게 일이 안 되지? 왜 속도가 안 나는 거야? 이걸 번역이라 할 수 있나? 과연 번역가로서의 자질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근본적인 회의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나중에 보니 그런 부분은 원래 어려운 부분이거나, 내가 잘 모르거나 약한 부분이었다. 평상심을 갖고 시간을 더 들여 궁리하고 지식을 쌓고 찾아보면 될 일이었다. 이 과정에는 원문의 난이도와 수준을 직시하는 현실인식과 더불어, 몇 차례 체를 거르듯 이루어지는 번역 공정이 정착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잘 안 되는 부분을 만나면 머리를 쥐어뜯거나 좌절하지 않고, 체를 거르듯 일정 정도 수준의 번역문으로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했다. 어려운 대목이라도 큰 그림이 잡힌 맥락 속에서 어설프게나마 한글로 등장할 때는 상대하기가 수월했다.

요즘은 경제학 고전을 번역하느라 고전하고 있다. 찾아보고 읽고 궁리하고 번역하고 고치고 또 고친다. 번역한 책이 백 권이 넘으면 뭐하고 십몇 년 번역하면 뭐하나. 경제학 번역자로서 나는 초보자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편안해진다. 중간중간 에세이나 연설문, 문학적 냄새가 나는 대목을 만나면 힘차게 날아오르지만, 경제학적 논증을 펼치는 대목이 나오면 다시 엉금엉금 기어간다. 그럼 경제학 서적의 번역에서 발전을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른 장르에서 했던 것과 동일한 과정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번에 루터 입문서인 <처음 만나는 루터>(우병훈, IVP)에서 신학적 교리와 내가 번역가 생활에서 배운 교훈이 만나는 것을 보며 짜릿함을 맛보았다. 루터의 칭의론과 성화론의 적용을 다룬 대목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칭의가 굳건하면 성화는 더욱 견고해질 수 있다. 성화에 실패할 때마다 신자는 다시금 이신칭의의 가르침으로 돌아간다. …바로 그 자리에서 성화는 다시 시작된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발전한다는 것은 언제나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화의 도상에 있는 신자는 루터와 함께 매일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여, 내가 주님을 향하여 살기 시작할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

여기, 칭의와 성화의 관계의 절묘함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내게는 그것이 신학적 교리에 그치지 않고 삶의 근본적 원리로 다가왔다. 발전은 기본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 별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란다. 새롭게 시작하고, 다시금 바른 방향으로 살기 시작하는 것이 핵심이다. 발전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늘 새롭게 다시 시작한 결과이자 부산물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 외의 다른 발전의 길은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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