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종교개혁 부르며_ 5 계몽기 이성주의, 유럽 기독교 최대의 위기

뉴잉글랜드의 대각성 운동은 흩어진 신앙의 질서를 교회당 조직으로 흡수해가는 것이 중심이 되었다. 특히 한국교회의 특성을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계몽 사상가들의 이성적 접근을 교회 파괴 행위로만 생각해 기피해버린 여파가 공부하지 않은 한국교회를 만들어냈다.

 

▲ 프랑스 세느강 옆에 위치한 루브르 건너편의 성당

 

계몽철학시대

1. 계몽철학의 시대

계몽철학의 등장은 16, 17세기 유럽 종교개혁사 과정에 형성된 인간의식이 다시 한 번 더 개혁의 토양을 소원하는 인류 성장사 과정의 필요조건이었다.

18세기 초부터 세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 유럽 지성세계의 현상이었으나 유럽인 모두의 동의는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계몽철학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장 자크 루소 같은 경우는 계몽주의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였다. 계몽철학의 요구는 이처럼 나라와 개인의 소신에 따라 조금씩 달랐으나 대다수의 18세기 사상가들은 새롭고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몇 가지 기본적인 특성을 공유했다. 그들은 계몽사상이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이러한 자신감은 과학혁명이 제시하는 업적에 대한 신뢰가 크게 작용했다. 과학적 탐구로 자연은 연구·관찰·사고 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법칙에 따라서 작동한다고 보았다. 스코틀랜드의 비범한 인물인 데이비드 흄(1711~1776)의 <인간 오성에 대한 철학논집(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748)은 과학에서 계몽주의에 이르는 가장 직접적인 연결을 말해주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1784년 논문 <계몽주의란 무엇인가?>에서 동시대인들에게 “알려고 하라!”고 했다. 칸트의 계몽주의는 지적 독립선언을 의미했다. 칸트는 인류의 지성사를 어린아이의 성장에 비유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지속적인 미성숙에서 탈출해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계몽사상가들은 차츰 야심만만해지고 그들의 관심영역도 광범위해졌다. 그들은 모든 지식 그 이상의 영역에도 도전했다. 그들의 과학적 방법은 인간사뿐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물론 정치, 경제, 심지어 종교적인 믿음, 미지의 세계 원주민의 관습, 인간 본성에까지도 과감하게 접근하려 했다.

계몽 사상가들은 낡아빠진 습관, 믿음, 권위 등을 밝히는 이성의 힘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 이름은 대개 익숙한 임마누엘 칸트, 볼프강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영국의 존 로크, 아이작 뉴턴, 토마스 페인, 장 자크 루소,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등은 대체로 계몽주의자들로 철학과 과학 등에서의 비이성적 요구들을 향해 거센 도전을 했다. 18세기 계몽시대는 16세기 종교개혁의 반작용 또는 역작용 측면도 많다.

우리는 우화 같은 사건 하나를 알고 있다. 1762년 프랑스 툴루즈 지방법원이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장 칼라스(1698~1762)를 기소한 사건이다. 칼라스는 프로테스탄트 교도였고 당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긴장관계였던 지역에서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증인들은 칼라스의 아들이 가족과 결별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싶어 했다고 주장하면서 칼라스가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을 배신하려는 아들을 죽인 것이라고 치안판사에게 주장했다. 이에 칼라스는 두 번 고문들 당했다. 처음에는 그에게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사형선고의 의례적인 절차과정에서 공범들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그들의 이름을 밝히라고 위협하는 고문이었다. 그때 칼라스의 팔과 다리는 서서히 잡아당겨졌고 수십 리터의 물을 그의 얼굴에 붓는 물고문이 시작되었다. 그의 몸통은 이미 사형 틀의 바퀴에 짓이겨져가고 있었고, 그의 팔과 다리는 쇠막대에 의해 결단이 나고 있었다. 그때 망나니는 그의 목을 겨누다가 내려쳤다. 이 재판과 자백 등 형벌의 과정에서 칼라스는 결백을 주장했다. 그런데 칼라스가 죽은 뒤 2년 후 지방법원은 평결은 뒤집고 칼라스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그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사건의 전 과정에 대해서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유력한 계몽주의자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볼테르)는 칼라스 가족을 위해 그의 친구들을 찾고, 변호사들을 고용하고, 대중의 주목을 받게 하기 위해 사건의 적요, 편지, 논문 등을 발표하며 불관용과 무지 또는 종교적 광신주의의 파렴치 극을 고발하고 동료 계몽주의자들도 동원했었다.칼라스 사건에 대한 볼테르의 행동들은 계몽주의자들의 고전적 관심사였다. 인간의 자의적이고 억제되지 않는 권한 행사, 종교적 광신주의와 파렴치 행위로 부르는 등 그의 고발적 자세는 끝이 없었다. 칼라스의 재판과정의 비밀심문, 비공개 재판 상위 법정의 재심의 없는 하급심의 유죄 판결 후 그 이튿날 처형해 버린 사실의 야만성으로 법적 절차를 짓밟아버린 비이성, 부도덕이요 인간의 근원적 존엄까지 짓밟아버린 행위라고 질타했다.

종교개혁 이후 1600년대 말까지 2백여 년 동안 전쟁 없이 지낸 날들이 겨우 20일 정도였다고 평가할 만큼 특히 1600년대는 갈등, 분열, 전쟁, 그리고 군림하는 시대로서 네덜란드 혁명, 잉글랜드 혁명, 독일의 전쟁, 프랑스의 독재, 오스만트루크,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까지 유럽은 혼란의 소용돌이였다. 이러한 비극에 이어 1700년대는 철저하게 이론투쟁의 시대, 곧 철학의 시대였다. 15세기와 16세기 종교개혁 전후로 한 인문주의자들을 배격하고 배제시켜버린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한 논리적 반격이요, 재세례파 계층 학살과 신·구 기독교의 30년 전쟁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정치와 종교현실을 이성철학의 탁자 위로 불러내서 망신을 주고 결과론으로 정치나 종교까지도 이성의 지배 아래 두려 했다.


이성과 종교의 관계

이성 철학시대의 계몽주의는 성경, 교리, 신앙생활과 심지어 죽음문제까지도 종교의 독점 영역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기존의 종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자들은 볼테르의 입을 통해 종교가 왜 홀로 높은 자리를 독점하려 드느냐고 물었다. 드디어 유럽 기독교는 이성세계와 마주 앉았다. 어떤 경우는 이성의 저울대를 통과한 종파를 변호하고 또 다른 계몽주의자들은 종교 무용론, 곧 무신론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나 중세기 이전에서부터 절대적 위치를 지켜왔던 로마 가톨릭은 드디어 난적이기도 하고 강적이기도 한 이성주의자들 앞에서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무신론자들을 제외한 이성적 잣대로 기독교를 검증한 이신론(Deism)자들은 창조론에서 마치 시계만드는 장인처럼 창조주가 우주를 만들었으나 한 번 만든 뒤로는 자동적 원리에 따라서 돌아간다고 주장하고, 유일신은 야훼이고 예수는 그의 피조물이라 하여 정통 기독교의 삼위일체론 자체를 거부했다. 성경에서 예수의 말씀은 큐(Q) 자료로 분류하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유·무신론자 상관없이 사실상 신앙, 기적, 경전 등 종교의 기본적 조건들을 배반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같은 사태는 16세기 종교개혁기 신·구교의 위압적 행태에 대한 복수극이라고 하면 너무 거칠은 표현이 될까?

그러나 이성철학자들의 소원대로 기독교가 가까운 시일 안에 해체되지 않았다. 계몽철학이 기독교를 한낱 윤리적인 자리로 끌어내렸으나 이성과 윤리로 답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문제 앞에서 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인간은 이성의 힘만으로 완전한 선의 자리로 나아갈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 이간 이성의 저편에는 감성과 영성(영혼)의 존재 영역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18세기 계몽기의 요구 앞에 겸허해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가까운 시대인 1517년에서 1699년까지 저지른 신·구 기독교가 1700년부터 1799년까지의 계몽철학기의 요구에 정직한 답변을 해야 할 책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앞서 제시한 칼라스 사건을 통해서 건강한 철학자 볼테르가 (그렇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외쳤던 무엄한 이 말에 대한 책임도 16세기 종교개혁기의 신·구 기독교가 피할 수 없는 부채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볼테르의 발언을 가지고 그를 무신론자로 만들려 들지 말고, 그의 돌발적 비명을 18세기 계몽기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신·구 기독교는 19세기 이후 기독교를 다시 한 번 개혁하겠다는 겸허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뉴잉글랜드의 대각성기

1517년 유럽의 기독교는 이미 예견된 혁명기에 돌입했다. 14세기부터 르네상스(Renaissance)와 인문주의(Humanism)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서 중세적인 기독교주의를 향해 도전을 시작했다. 르네상스나 인문사상 운동은 옛 그리스-로마의 고전시대의 복고이며, 로마 기독교의 인위적 권위에 도전을 시도했다. 이는 기독교의 천상주의 또는 유토피아성 세계가 좌절하기 시작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운동의 파장을 미리 예견할 수 있었다면 16세기 종교개혁이 보다 더 안정감을 가진 스케줄을 따르는 절차를 밟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시작으로부터 유럽의 종교개혁은 그 성격이 “혁명”이었음을 모르고 입춘을 맞이해 봄맞이 청소정도로 생각했을까. 기독교의 예측은 빗나가고, 16세기와 그 다음 17세기를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고, 특히 1600년대 1백여 년 간은 갈등과 전쟁, 광신과 미신적 행위로 말미암아 유럽의 신·구 기독교는 스스로가 자신들을 믿을 수 없는 사태로 부도덕하고 또 무정부적 사회현상을 빚어내고 말았다.

그래서 일어난 운동이 18세기의 계몽기, 즉 이성주의 시대의 대두였다. 쉽게 말하면 너희 기독교를 우리는 믿을 수 없다. 이성(reason)의 검증을 받으라. 기독교가 유럽 땅에 등장한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합법적으로 종교의 모든 행위 자체를 이성적 검증으로 대신하라는 것이다. 신성모독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기독교의 절대 위기였다.
 

1. 뉴잉글랜드(미국)의 분위기

뉴잉글랜드는 영국 식민지 환경 속에서 1700년대 중반에 유럽 본토에서 불어오는 이성주의, 또 심할 경우 무신론 상황으로까지 전개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먼저는 신은 야훼이며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 하지만 우리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일 뿐이라고 하니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앙은 물론 하나님은 인격체도 아니고 우주 환경을 한 번 만들어 놓은 후에는 만물의 질서는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계몽기의 여파는 식민지 상황의 불안정한 미국에서는 사회 분위기가 유럽에 비해 더 많은 고충이 있게 되었다. 일상생활뿐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도 나태하고 무질서하며 마치 악성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회 분위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경건주의 운동에 이은 진센도르프의 헌신적 도움을 힘입은 요한 웨슬리의 복음운동이 1740년을 전후로 하여 뉴잉글랜드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각성의 출발점이 되는 소각성기의 출발점이라고 할까.

좀 더 배경을 넓혀서 말하면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운동가들 중에 독일 슈페너의 경건운동의 여파로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 지역을 오고가며 활동하던 진센도르프 운동이나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 그리고 요한 웨슬리의 초기 친구였던 조지 휫필드가 돋보이는 시대였다.

휫필드는 1741년까지 요한 웨슬리와 함께했는데 교리적 이해로 따로 활동했으나 휫필드의 화려한 웅변력은 청중을 들었다 놨다 할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요한 웨슬리는 어눌할 만큼 차분한 설교였으나 그에게서는 매우 영적 현상이 탁월해서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지 않고는 그의 집회장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의 대중집회는 수천여 명이 모이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각성운동이라 이름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회심을 요구했고, 복음의 기본사상을 선포했던 순수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집회로 특히 뉴잉글랜드인 미국의 변화가 탁월했다.
 

2.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기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대모데 에드워즈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죠나단 에드워즈 가문은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경건한 가정에서 그가 잘 성장했고, 예일대학의 교수를 거쳐 매일 13시간씩 말씀을 연구하며 기도에 매진하는 노력으로 복음사역자의 사명을 준비했다. 그는 설교를 준비하는데 엄청난 역량을 집중했던 인물이다. 그의 말씀 연구의 시간은 집요해 언제나 한 손에 펜을 든 채로 읽었다.

그때마다 그의 손에는 펜이 들려 있고 책 옆에는 기록할 노트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 매일 승마를 했는데 승마시간에도 자주 길 옆에 말을 탄 채 서있기도 했고, 종종 잠을 자다가도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했다는데, 그때는 비몽사몽간에 떠오른 생각들을 노트에 기록하는 시간이었다고 전한다. 그는 깊이 연구한 성경을 설교에 활용했으며, 광범위한 신학 탐구(사색) 집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그가 평생에 사용했던 노트가 1천4백여 권이고, 그 자료들이 후손들에 의해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교수요, 학자, 학교 운영자요 목회자이기도 했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0년 영국에서 건너온 조지 휫필드와 선교 동맹관계였고, 휫필드는 요한 웨슬리 신학과의 거리 때문에 뉴잉글랜드(미국) 선교에 주력했는데, 에드워즈와는 칼빈 신학의 일치와 경건한 생활까지 어울려 당대의 흐트러진 뉴잉글랜드 청교도적 분위기를 일신하고 대부흥을 이끈 대각성기의 쌍두마차였다.
 

3. 뉴잉글랜드 대각성기와 세계 기독교사의 흐름

18세기 초부터 유럽, 특히 프랑스를 중심해서 일어난 계몽기 사상가들을 프랑스어로 ‘필로소프(phiilosophes)’라고 했는데 그러나 당시대의 데이비드 흄과 임마누엘 칸트를 제외하고는 감히 독창적인 철학자들이라 하지 않았고 그저 ‘자유로운 사상가’를 말해서 필로소프로 호칭했다(<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 주디스 코핀·로버트 스테이시, 소나무). 그들은 볼테르, 베이컨, 뉴턴, 존 로크, 몽테스키외 등의 주요 인물들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적 종교관을 가지고 신·구 기독교에 접근해왔으나 일부 급진계층은 무신론적인 이성체계로까지 발을 옮겨가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 중 몇몇은 아예 종교 무용론까지로 기울어가기도 했으나 기독교가 또 그들에게 무력하지만은 않았다. 일찍이 기독교 형성기에 고대 그리스 스토아 철학이 기독교와는 신사적인 각자의 영역을 나누었으며, 중세 가톨릭 전성기에도 그리스 형 헬레니즘은 스토익 철학체계로 자리 잡았으니 18세기 계몽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 정도의 무대에서 기독교의 철학적 적응력은 당시대 유행하고 있는 관념철학이나 또 뒤따라오는 낭만주의를 정통 기독교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계몽기 철학사상가들이 공부 좀 합시다, 프로테스탄트여! 아무리 종교개혁이 감격스러워도 맹목적 신앙은 미신으로 흘러가고 인간적 열심은 광신도의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유럽과 뉴잉글랜드의 경건운동과 대각성 운동은 성격 차이를 드러내고 말았다.

슈페너의 경건운동은 이성철학의 계몽기 사조를 복음운동으로 함께 발전했다. 빵보다 더 값이 싼 술 때문에 가정파탄은 물론 거지와 부랑자들이 거리를 활보할 때 그들은 사회사업운동을 통해서 사회를 개선해나가고, 교육운동으로 무지를 벗겨내고, 디아코니아 운동을 통해서 함께 살아가는 기독교로 바꾸어가고, 도서관 운동, 병원, 알코올 중독자 치료소를 만들고 국가단위의 사회복지 운동으로까지 기여하는 독일의 슈페너 운동은 그래서 제2 루터운동이라고까지 호칭하고 있다.

뉴잉글랜드의 대각성 운동은 흩어진 신앙의 질서를 교회당 조직으로 흡수해가는 것이 중심이 되었다. 특히 한국교회의 특성을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계몽 사상가들의 이성적 접근을 교회 파괴 행위로만 생각해 기피해버린 여파가 공부하지 않은 한국교회를 만들어냈다. 뉴잉글랜드 대각성기 조나단 에드워즈의 공부하는 목회자 지향이 아니고, 조지 휫필드의 당대 부흥 설교자 스타일의 한국교회를 만들었다는 생각까지도 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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