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기획특집
무섭게 공격해오는 무신론자들제3종교개혁 부르며_ 6 인간(신) 존엄을 잃어버린 프로테스탄트
조효근/본지 발행인  |  dsr123@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1658호] 승인 2018.02.21  15:17:50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로마 가톨릭의 행위와 공로신앙을 극복해낸 자랑스러운 프로테스탄트가 기본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인간(모든 개인)을 소홀이하는 약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 발칸의 고도이며 수륙교통의 요지뿐 아니라 전략적 요지로 옛 유고연방의 수도인 세르비아. 200년 동안 40번이 파괴되고 다시 건설된 비운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칼라메그단 요새.


16세기 종교개혁의 기독교는 포괄적 호칭이 프로테스탄트의 이름이다. 지난 2017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이름으로 반성, 회고, 감사의 기회를 삼기는 했지만 그것은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에게 바치는 인사는 될지 몰라도 “16세기”에 대한 고백은 되지 못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 덕택으로 온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시간 때문이었다.

이는 “중세기”라는 깊은 밤이 지나고 전 인류의 새벽시간, 곧 “근세기”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시간이었다. 촛불 켜놓고 제사 지내거나 어둠 속에서 못된 짓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아침의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이 16세기였다.

가장 큰 변화가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시간,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바닷길이 열리는 “해양 실크로드” 시대로서 인류가 동과 서, 동서 문명의 조화와 융합을 이루어야 하는 시대요, 권력이 “왕권신수설”에 따라서가 아니라 모든 개개인을 통해서 나오는 시대로서 인류가 드디어 “개인”을 발견하는 시대였다.

그때 16세기 종교적인 천재인 마르틴 루터는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의 두 돌 판을 들고 마치 시내산의 모세처럼 인류 앞에 나타났었다. 시대 전환, 밤이 아닌 시대를 앞장서서 이끌어갈 수 있는 최신형 신학과 신앙의 카드를 가지고서….

그러나 루터와 개혁자들은 “이신칭의”로써 인간의 영적 구원은 만족시킬 수 있었으나 “만인제사론”은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역사의 눈으로 16세기 개혁자들을 바라보면 그들의 심령은 시대 변화, 곧 달과 별 세계 저 너머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아브라함처럼 듣기는 했으나 그들의 살림(몸)은 움직이지 못했던 중세인들이었다. 영적 음성인 하나님의 목소리는 듣고 말로 표현까지는 했으나 그들은 그들의 “갈데아 우르”인 현실을 떠나지 못했다. 16세기 개혁자들 어느 누구도 중세를 따라서 근세의 땅인 먼 미래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그들의 삶의 방식을 옮겨가지 못했다. 아브라함적인 말은 하고 있었으나 당시 문명의 최고봉인 메소포타미아(갈데아 우르) 같은 중세 방식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시내산 두 돌 판을 들기는 했으나 그들은 요단강 너머 가나안 행을 거부하고 그 산 아래서 아론의 금송아지들과 함께 다시 홍해를 거슬러 이집트로 되돌아가고 싶은 갈등에 찬 16세기를 허송했다.


1. 유럽의 민중(신자들)이 개혁자들을 의심했다.

인류 구원의 유일한 종교인 기독교가 중세 천년의 밤을 지나 새벽을 맞이한 16세기 아침에 이신칭의, 모든 믿는 자들의 그 믿음이 너와 나를 구원하셨다는 말씀을 붙잡고, 로마 가톨릭의 행위와 공로신앙을 극복해낸 자랑스러운 프로테스탄트가 기본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야 할 인간(모든 개인)을 소홀이하는 약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신앙이 뭔데? 비천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어 인간의 죄를 다 용서하셨다. 너 나와 함께 오늘 낙원에 이르리라 하신 예수, 죄악을 미처 다 회개하지도 못한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어주신 예수시다. 바로 그 예수께서 하늘보다 더 나를 사랑하셨는데 주 예수가 사랑하사 대신 피 흘려 죽으신 자들의 목숨을 종교개혁자들이 너무 가볍고 무가치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 유럽인들은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상하다? 왜 저러지? 유럽은 잔뜩 긴장해 종교개혁자들의 행위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1) 루터의 농민반란자들 대하기

농민들이 귀족들에게 저항하기 시작하기는 13세기 말부터 있었으나 루터의 “이신칭의와 만인제사론”을 받아들인 후 우리도 노예생활을 벗어버리고 인간인격으로 대접받고 싶다. 우리도 예배에 참여하고 싶다, 예배드리고 싶다, 목회자를 모시고 싶다고 하면서 궐기했는데 루터는 그들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고 말았다.

“이신칭의”가 복음이면 그 “이신칭의” 말씀으로 구원받은 사람(신분과 상관없이)은 더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했을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사람을, 그것도 수만 명의 목숨을 그렇게 함부로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던가?

죽어가는 당사자들의 슬픈 탄식을 듣지 못했을까? 그러나 그 현장을 지켜본 신구 기독교 유럽과 유럽인 전체는 농민반란 세력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진압하는 현장을 다 보았다. 그리고 그들 가족을 어떻게 대접했는가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라면서 루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2) 칼빈의 지나친 율법독제

칼빈(1509~1564)은 마르틴 루터와 유사한 신앙체험을 통해서 개혁자의 길에 들어섰으며, 냉철하고 분석적인 신학자요 목회자였지만 그리고 그의 불후의 걸작인 <기독교 강요>는 1536년 초판 그리고 1559년까지 27차 수정보완 판을 거쳐서 무려 23년간 몰두해 얻어낸 그의 필생의 학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156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이룬 신학과 신앙전통의 업적은 지대하고 진지했고 그가 쓴 <기독교 강요>는 23년이라는 지속적 탐구와 개정판을 거듭한 과정을 거치는 등 조심성이 있었지만 사람 목숨을 너무 함부로 취급했었다.

칼빈은 1536년 스위스 프랑스어권 제네바에서 설교를 시작했으나 너무나 독단적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1538년에 제네바에 복귀한 뒤로는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루터처럼 주일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일(안식일)에는 그 어떤 세속적인 일을 해서도 안 되었다. 설사 안식일이 아닌 날에도 어떤 방종도 허락하지 않았다. 칼빈이 이끄는 제네바 정부는 목사와 장로 10~20명으로 구성된 ‘교회회의’가 도시인들의 공·사 생활까지 지배했다.

그들은 불시에 가정을 방문해 춤, 카드놀이, 극장 구경, 쾌락성 행위 등을 감시, 이러한 행위를 악마의 소행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여관집 주인이 식사기도를 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먹고 마실 것도 주지 못하게 했다. 여관 투숙객은 저녁 9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이를 위반하면 엄벌에 처했다. 살인, 반역, 간음, 마술, 신성모독, 이단들은 모두 사형(주로 화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칼빈이 제네바 통치권을 장악한 초기 4년 동안 사형 집행 건수는 58건이었다. 당시 제네바 전체 인구는 1만6천명 정도였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인간을 이처럼 다루어도 되는가? 이 방식이 교황권의 가톨릭에 비해서는 어떤가?


3) 개혁자들의 재세례파 살육

루터나 칼빈의 “이신칭의”적 프로테스탄트가 마 치 최후의 심판자들처럼 행세하는데, 1525년 등장한 아나밥티스트(재세례, 성인세례) 운동 프로테스탄트들은 어떻게 다루었던가? 무조건 죽였다. 재세례 행위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무조건,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어떤 경우 감옥에 들어가는 행운의 재세례자가 혹 있을지라도 그들은 그 안에서 수개월 안에 죽을 수밖에 없는 열악한 감옥뿐이었다.

무조건 죽였다. 루터·칼빈 등 개혁파들에게 잡히면 죽었다. 화형장에서, 맷돌 목에 걸고 강물 속으로, 생매장 식으로 죽어갔었다. 그때 하늘은 눈을 감았고, 가톨릭은 슬프게 웃었을까? 슬픈 웃음이 있다. 온통 서유럽, 북유럽 천지가 인간도살장이었다. 가톨릭 교황권에서 불러낸 프로테스탄트 내부의 인간 살육 행진이었다.
 

2. 유럽은 2백 년 동안 전쟁터가 되었다.

1525년 농민반란 사태부터 루터 사망의 해인 1546년, 루터가 세상을 하직한 즉시 작센주가 공격을 받았고 개혁의 비텐베르크 마르틴 루터의 모든 것이 집중된 곳이 가톨릭에 의해 침탈되었다. 그리고 신·구 기독교는 어린애들 땅 뺏기 놀이 같은 방식으로 교구와 교회 쟁탈전으로 확대되고, 드디어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전쟁은 이어졌고, 독일 온 영토가 전쟁터가 되고,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로 이어지는 혁명적 투쟁으로 죽이고 죽는 세월을 2백여 년 보냈다.
 

3. 계몽기 여세로 무신론 신학(철학) 등장

우리는 본 지면을 통해서 상당히 솔직하고 심각한 프로테스탄트 유럽의 16, 17, 18세기의 우려되는 현실을 살펴왔다. 그런데 계몽철학기 후기에 이르러 우려했던 무신론 철학이 전면에 등장했다.
경건운동의 본산 할레대학 출신 슐라이어마허가 베를린대학으로 왔을 때, 거기서 슐라이어마허는 헤겔을 만났다. 크게 말해서 슐라이어마허나 헤겔은 자유주의 신학자요 철학자라 했을 때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헤겔철학의 좌파 중에서 포이에르바하가 무신론자의 대표가 된다. 그 뒤를 이어서 칼 마르크스, 엥겔스, 니체 등으로 순서를 따라서 19세기 유럽 기독교를 정신 차릴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16세기 개혁운동의 빈틈을 확인한 루터의 제자들 중 슈페너는 물론 유럽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그리고 대각성 운동으로 이어지는 복음운동의 결전장에서 악전고투를 했던 진젠도르프, 요한 웨슬리, 조지 휫필드, 에드워즈 등은 복음을 지켜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무신론 철학자들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은 결국 1,2차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오면서 기독교가 주도해온 세계사를 발기발기 찢어내고 말았다.


1) 포이에르바하의 음모

헤겔 좌파들은 스트라우스(Straus), 스타이너(Steiner),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 등이다. 특히 포이에르바하의 논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 요구의 이상화나 대상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인본주의적 무신론에 따라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했다. 포이에르바하의 이론을 이어받은 니체는 “무신론의 원천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루터는 자연과 은혜를 단절시키고 신앙의 주체적 접근만 보존해 인간을 하나님과 직대면시켰으며, 이로 인해 인간이 대신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얼굴을 갖게 되었으니 무신론은 기독교의 연장신학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무서운 논리를 들어보았는가? 이 같은 니체의 논리를 마음속으로 접근해보라. 무엇인가 느낌이 있을 수 있다. 자연과 은혜를 관계 단절했다는 말이 무엇일까?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을 직접 대면시켰다는 말은 또 무엇일까?

다른 말로 니체의 생각을 표현해본다면 예법도 모르고 자기 모범도 갖추지 못한 인간이 하나님의 안방으로 신발 신은 채 뛰어들게 했다는 말이 아닐까? 또다시 말하면 “이신칭의”나 “만인제사”라는 하나님의 언어를 함부로 남용한 결과가 하나님의 지밀한 지성소를 저잣거리에 내다놓고 싸구려 물건 팔듯이 했다는 말이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면 루터나 칼빈의 언행이 마음에 켕긴다. 루터는 어찌하여 시정잡배를 함부로 구중궁궐로 끌어들였나? 칼빈의 경우는 당신은 어찌하여 <기독교 강요> 한 권 집필하는 데는 수정과 개정을 27번이나 하고, 또 집필 기간이 23년이나 걸릴 만큼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으면서 “제네바의 하나님” 노릇까지 하면서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죽였던가?

크게는 16세기의 루터나 칼빈의 후학들이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모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포이에르바하나 니체에게 무신론 신·철학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았을까?

그들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아도 16세기 프로테스탄트가 낳은 자식들이 유럽의 무신론이고 칼 마르크스이며, 나치나 볼셰비키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과오 부분 또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책임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2)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배신하지 마라!

오늘 우리 기독교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책임종교이기에 인류사 진행 가운데 있어온 우리들의 현재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류 구원사의 장자요 적자이기에 기독교는 프로테스탄트 역사 5백년의 공과 과를 가슴으로 수용하고 오늘, 21세기의 날 이후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를 깊이 기도해야 한다. 포이에르바하의 제자 니체가 한 말, 어떻게 하자고 하나님과 인간을 직대면시켰느냐? 모세는 하나님의 뒤통수밖에 보지 못했다는데, 너(나)는 어찌하여 조심성이 그리도 없느냐?

예수께서는 하나님 한 번만 보여 달라는 제자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지” 하셨고, 친국 가는 길 모른다 하는 자에게 “나는 길·진리·생명”이라 하셨다. 이때 “나는”이라는 일인칭 어휘가 고유명사인지 보통명사인는 가르쳐 주지 않으셨는데, 어찌하여 인간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를 없애버리려 드는가? 유대인들이 우리보다 모자라서 성소와 지성소의 간격을 두었을까?

오늘의 우리는 하나님 모시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조효근/본지 발행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460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16길 73-6(연건동)  |  대표전화 : 02-3676-3082~5  |  팩스 : 02-3676-3087
신문등록번호 : 서울 다 06483  |  등록일 : 1988.5.31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조효근  |  이메일 : dsr123@daum.net
Copyright © 2013 들소리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