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종교개혁 부르며_8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빚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실패의 조건을 내부에
가지고 있었어요. 로마가톨릭과
똑같은 형식조건과 방법으로는
이신칭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 시대 분별을 해보세요.
바로 교황권 교회가
중세기 식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세기 방법으로 이루고자
했으니 실패하는 것입니다.

 

▲ 마틴 루터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는 루터가 파문 후에 처음으로 만났다.

21세기 현재에서 기독교는 “르네상스-종교개혁-계몽기”를 한 묶음으로 세우고, 뒤늦었으나 다시 학습(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래 전서부터 필자가 해오는 과정입니다.

세계교회사를 펴놓고 중세와 근세의 전환점인 1517년의 전과 후를 살피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시도한 종교개혁은 절반의 성공에 머물게 됩니다. 절반의 성공, 좋게 말해서 절반의 성공이라 표현했지만 진리의 현장에서 절반(50%)이 참이라 할 수 없는 것이죠. 솔직하게 말하면 실패했다는 표현입니다.

최소한 1517년 출발한 루터와 츠빙글리의 개혁은 1525년에 좌초합니다. 폭력을 일삼았기 때문이죠. 루터나 츠빙글리는 1525년에 개혁자로서의 깃발을 내리고, 개혁시대의 새로운 지도부를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취리히의 츠빙글리 개혁그룹에는 변혁이 일어났어요. 츠빙글리의 7명의 제자들이 “재세례 행위”를 통해서 개혁시대의 변화와 질적 상승을 요구했어요.

기독교 역사책들을 보면 재세례파를 “급진주의자” 또는 “열광주의자”, “이단자”라는 고깔을 만들어 씌워주는데 다 틀린 말입니다. 그것은 팩트(fact)가 아닙니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취리히 재세례 운동가들은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 신앙”의 한계를 보았어요. 이신칭의의 열매가 만인제사(신앙고백 완성)인데 루터는 그가 사실상 불을 질러서 거대한 농민혁명이 된 사회변화 운동에서 책임회피를 하고 1525년 7월 10여만 명 가까운 농민군을 모조리 죽이는데 기여하고도 자기는 무죄라 했으니 글쎄요, 별도의 자리에서 셈을 한 번 하게 되면 루터는 최소한 사형에 해당할 수도 있는 유죄가 됩니다. 그가 받을 형량에 대해서는 재판관 몫이기에 정확도는 모르겠으나 유죄는 분명하지요.

츠빙글리도 그의 개혁그룹의 청년 7명이 자기고백이 없는 유아세례의 문제를 들고 나왔을 때 그들을 더 설득하고 아니면 리더 또는 지도자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했는데 그는 루터나 그밖의 개혁 정통파들과 함께 재세례 그룹을 학대하고 정통파들과 함께 재세례 그룹의 생명을 박탈하고 교회에서 쫓아내는데 합세했으면서 더 이상 자기는 무죄라 했지요.

그리고, 그들 제2 개혁자들을 재세례파라 했는데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시 세례를 받은 것은 세례란 자기고백, 선악 분별력이 최소한 갖춰져 있을 때 받아야 한다는 요구였습니다. 당시 유아세례란 사실상 로마제국의 국가교회시대부터 있어온 일종의 출생신고였으니 국가와 교회 관계의 분리, 곧 정교분리를 요구하는 그들은 재세례파가 아니라 이름을 붙이려면 새 개혁파(Neo protestant)라고 해야 옳습니다.

재세례파는 츠빙글리처럼 가톨릭에 한 발, 개혁 운동에 또 한 발 집어넣고 로마제국교회인 가톨릭을 떠나지 못하는 반쪽짜리 개혁파라 판단해서 본격 개혁, 재개혁운동을 시도했었지요.

재세례로 표기하는 취리히 출신 제2 종교개혁 그룹은 루터나 츠빙글리를 뛰어넘을 더 온전한 개혁 기독교운동이 분명했습니다.

제2 개혁 재세례파는 정교분리 요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만인제사”와 “폭력거부(비폭력)”라는 예수의 기독교가 언젠가는 되찾아서 온전한 기독교 시대를 반드시 실현해야 할 “두 명령”을 실행했습니다.

제2 개혁 재세례파는 가톨릭이나 16세기 개혁자들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저 두 개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면서 16세기 개혁전선에 뛰어들어서 이 놀라운 예수의 명령을 지키다가 혹독한 시련을 겪었지요.

“이신칭의”를 들고 나왔으면 그것의 마침표인 “만인제사”가 동시동작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루터는 “이신칭의” 신학 정립을 그가 교수 자격을 획득한 때부터 그의 신학으로 선택했을 것입니다. 루터의 이신칭의는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kham)의 신학적 발상이 그 기반을 이루었다 해야 합니다. 오캄의 신학은 스콜라 철학의 중세기 완성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건너편에 선 신학적 성향이기에 루터는 신학적 선택이요 경향일 수 있습니다. 오캄이나 아퀴나스 모두 이신칭의의 마침표가 행위 완전임을 모르는 바 아니고 루터 역시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루터는 자기가 제창한 “이신칭의”와 “만인제사”가 “쌍둥이”임을 알았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외면한 결과를 냈습니다.

1. “만인제사” 동반하지 못하면 “이신칭의”는 미신이고 위선이 된다.

조금은 조심스럽고 매몰찬 표현이 되기도 하지만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500년을 보내면서, 지난해 우리는 루터 칭송으로 장식된 기념책자를 한 20권을 구해서 살펴보았는데 한국교회나 세계의 프로테스탄트의 앞날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있음을 보았어요.

기독교가 16세기적 한계에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는 벗어나기 힘들겠구나 하는 절망 때문입니다. 16세기 개혁이 곧바로 17세기쯤은 루터나 칼빈의 뒤를 이을 개혁자들이 등장해서 16세기 개혁의 빈틈을 보완해야 했는데 1백년이 아니고 5백년이 지났는데도 “중세기적 한계” 안에 있는 루터나 칼빈의 찬가만 부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자기 평가가 없다, 종교개혁을 해서 500년을 살아보았으면 자기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나왔던가? 나올 때 가톨릭을 향해 무슨 말을 했던가? 결별의 방법은 옳았던가? 그리고 교황을 향해 사탄이라 했고, 나오면서 수도원과 수녀원을 때려 부술 때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수녀들을 억지로 시집보내고 신부들 장가보낼 때 그때 무슨 마음으로 그리했던가? 가톨릭과 교회를 분할할 때, 영토를 쪼갤 때 어떤 방법을 선택했던가? 보름스에서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심문을 받고 비텐베르크로 귀환할 때, 그때 그가 바르트부르크로 갈 수 있었던 계획은 어디서 나왔던가?

작센주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호의요 선택이었으니 바로 그날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은 예수의 순수에서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황권의 보호에서 교황을 반대하는 귀족과 영주권의 슬하로 프로테스탄트들을 집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잖아요. 편가르기는 유럽 기독교를 두 조각내버렸습니다.

“이신칭의”는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사하는 방법론 또한 예수의 방식이어야 했어요. 예수는 유대 이스라엘과 싸우면서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교권이나 세속 권력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제자들 로마제국과 대결하던 카타콤 300년 때도 16세기 같은 폭력성이 전혀 없이 이겨냈어요. 다시 말합니다. 예수는 따르는 자들에게 가이사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 하셨어요.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 줄을 몰랐을까? 이신칭의가 무엇인가요? 그것이 예수의 죽음과 의에 참여하는 것임을 몰랐단 말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몰라서 1천여년 동안 묻혀 둔 줄 알았습니까?

가톨릭 사람들에게 이신칭의를 요구하되 그들이 따르지 않겠다 하거든 그럼 우리들 몇몇이서 이신칭의는 물론 만인제사의 가르침을 이루어보고자 하니 우리가 따로 예배함을 용납하라고 하면서 조용히 조심스럽게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배나 신앙행위에 부담주는 것을 최소화시키면서 따로 나와서 예수의 가르침을 이루어가려는 겸허함이 있어야 예수의 제자요 “이신칭의” 교리를 확립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예수의 것이니 예수의 방법대로 했어야지요. 아니면 프랜시스 수준 정도는 시도했어야죠.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실패의 조건을 내부에 가지고 있었어요. 로마가톨릭과 똑같은 형식조건과 방법으로는 이신칭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 시대 분별을 해보세요. 바로 교황권 교회가 중세기 식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세기 방법으로 이루고자 했으니 실패하는 것입니다.
 

2. 16세기는 근세기다.

중세와 근세의 차이는 가치관의 간격입니다. 중세와 근세의 갈림길은 천동설과 지동설에서 구분되고, 왕권신수설과 시민 선택권의 차이에서 구분됩니다. 16세기는 기록역사로 볼 때 근세기가 틀림없어요. 그러므로 지동설 시대로서 국가운영은 시민선택에 의해 통치자(지도자)를 선택하는 시대입니다. 하나 더 추가하면 도그마 강요가 아니라 “다름”의 양해와 “관용”이 일상화되는 사회의 구성 조건을 가집니다.

도그마(dogma) 일방통행시대는 중세입니다. 도그마 식 가치관으로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전환할 수 없어요. 그래서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점쟁이라 비웃었고 교황은 갈릴레이를 이단자로 몰았어요. 이 정도의 무식으로는 과학을 만날 수 없고 자연과 친화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아끼고 사랑할 수는 더욱 없어요.
 

3. 르네상스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는 르네상스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대표자 에라스무스와 불화했어요. 16세기의 루터는 그의 몸은 중세기에 묶어두고 꿈만 16세기 하늘에서 유랑했던 인물이었을까요? 루터뿐 아니라 그와 그의 개혁동지들도 하나같이 폭력과 살생에 익숙했었으니 예수의 용서와 사랑법은 어찌됩니까?

앞서 말했지만 16세기 개혁자들은 제2의 개혁 그룹인 재세례파 사람들을 왜 그렇게 쉽게 죽였던가를 묻지 않을 수 없군요. 왜 그랬을까? 그들은 인간이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때,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때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또 그들은 16세기 종교개혁은 반드시 권력과 교회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또 하나 그들은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의 분류를 거부했고, 그리고 절대 조건이 비폭력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버러지 한 마리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준을 가진 재세례파들이 왜 정통파 16세기의 루터나 츠빙글리, 칼빈의 사람들에게 짐승이나 버러지처럼 죽어갔어야 했을까요? 불태워 죽이고, 목에 물맷돌 달아 강물에 던져서 죽이고, 사지를 찢어죽이고, 산 채로 땅 속에 집단으로 묻어 죽이는 행위를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행사했던 인간들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에게 동의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이었습니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는 그래서 18세기 계몽기 사상가들에게 무신론자들이라고 평가받았어요.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르네상스의 인물인 에라스무스와 만났어야 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평화주이자였어요. 바로 에라스무스 시대 인문주의자들과 16세기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먼저 만났어야 했단 말입니다.

에라스무스(1466-1536)와 루터(1483-1546)는 사실상 동시대 인물이고 사회적 신분만 에라스무스가 얼마간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에라스무스가 낳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는 종교개혁 시대의 두 인물평을 하기도 했었지요. 훗날 우리가 보다라도 두 인물이 왜 함께 할 수 없었을까? 루터시대 이후 300년, 또는 500여 년 동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차지하기, 영토 확보하기의 더러운 진흙탕 싸움을 바라보면서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가치관 조율이 가능했더라면 종교개혁은 훨씬 더 순조로왔을 것이고 오늘의 인류는 더 많은 은총을 힘입었을 터인데 하고 후회해 봅니다.

에라스무스는 평화주의자였습니다. ‘평화’라는 주제는 늘 그의 중심에 있었어요. 그가 1510년 교황 레오 10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의 관용, 인내, 성스러운 가르침(교리) 등을 통해 세상을 정복했듯이 우리는 무기보다는 삶의 경건함으로 투르크인들을 더 잘 굴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1517년 그가 발표한 <평화와 불평>에서 “무엇보다도 진지하게 평화를 희구해야 한다. 오늘날 일반 대중은 교묘한 암시와 선전, 잉글랜드 인은 프랑스 인의 타고난 적이라는 주장 등에 의해 전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왜 잉글랜드 사람이 프랑스 사람들에 대해 악의를 가져야 하는가? 왜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선의를 가지면 안 되는가?” 하면서 분쟁과 갈등에 대한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지한 “정당한 전쟁”마저도 혐오했습니다. 그는 “가장 선한 전쟁도 가장 악한 평화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평화주의자였어요.

로마 가톨릭의 아버지요 루터의 큰 선생인 아우구스티누스나 중세 가톨릭의 교리 사상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선의의 전쟁론마저도 악으로 규정할 만큼 한 평화주의자가 루터의 선배요 동지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그들은 왜 서로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 정신의 핵심을 소화했으나 루터는 르네상스 정신을 수용하지 않았지요. 그 내용은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와 루터의 “예속 의지”로 구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류 정신사 측면에서 보면 에라스무스는 근세인, 루터는 중세인으로 구분해도 될까요? 그래서 다수의 뜻있는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갈등과 결별을 안타까워하지요.
 

4. 르네상스를 거부한 종교개혁은 계몽기 덫에 걸렸다.

르네상스 시대가 있었기에 종교개혁의 문을 열었으나 1525년 이후 폭력과 살생의 방법을 동원했던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계몽기의 과학적 이성 앞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수라는 이름으로 계몽기 저울대를 피하여 중세주의 방식으로 프로테스탄트 앞날을 어둡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재세례 운동과 농민 전쟁 절정의 날인 1525년 1월, 또 7월부터 폭력의 집단화를 불렀고, 또 루터가 사망한 다음해인 1547년, 칼빈이 세상 떠나기 2년 전인 1562년부터는 독일과 프랑스에서 루터파와 프랑스 칼빈의 제자들인 위그노와 가톨릭 사이에서 국가 단위 전쟁의 출발점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그 날들 이후 1787년 프랑스 루이 16세가 “관용 선포”를 하기까지 서유럽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수백 수천의 날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했습니다. 1699년까지는 2백여 년 동안 전쟁과 전투가 없었던 날이 20여 일일 뿐이라고 할 만큼 유럽의 신·구 기독교는 전쟁을 즐기면서(?) 사람 죽이는 재미(?)까지 보면서 살아왔느냐고 묻고 싶을 만큼 흉악한 세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악한 소행이 하나님의 기록 문서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을 것이죠. 부끄러워요. 왜 그 같은 결과를 냈을까? 가톨릭은 모르겠으나 프로테스탄트는 1787년 루이 16세의 “관용 선포”의 날까지 “중세 암흑기”의 꿈속에서 헤맸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계몽기의 요구는 프로테스탄트나 가톨릭이 함께 갚아야 할 빚일 것입니다. 그 빚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탕감이 될 수 없지요. 이 빚을 갚으면서 루터를 찾고 칼빈을 불러 제2의 개혁을 하자고 해야 합니다.

제2의 개혁은 비폭력의 방법과 서로를 용납하는 관용을 원칙으로, 개혁의 시간은 자기 수준에 맞도록 여유를 주는 식이어야 합니다. 내가 아직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면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합니다. 혹 내 평생, 당신과 하나 되기는 어렵다고 호소하는 이가 있더라도 서로 생긴 대로를 존중해가면서 자기 책임에 걸맞는 상급에 만족하라면서 인류(인간) 공동체 참여를 용납할 수 있어야만 인류의 안녕과 평화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조건 아래서 제2, 제3의 개혁의 연속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 가까이 다가서는 기독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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