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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현재에서 기독교 개혁 모색제3종교개혁 부르며_9 르네상스
조효근/본지 발행인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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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호] 승인 2018.03.21  12:5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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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보티첼리의 봄'

루터는 정치역학에 대한 학습은 넉넉하지 못했다…
교황권의 보호에서 영주(군주, 군왕)권으로 보호막을 바꾸는 수준의 단계적 개혁자로서의 자기 한계를 읽을 수 있어야 했다.


나는 21세기 오늘에서 더딜지라도 우리가 찾아가야 할 기독교, 영광의 그날을 찾아내야 하는 기독교의 오늘과 내일을 겸손하게 배우고 싶다.

 

기독교의 16세기 개혁은 인류문화사 차원에서 “종교개혁”으로 호칭하고 있다. 모든 종교들의 세계사적인 입장에서도 대표성을 지녔다 해서 기독교뿐 아니라 일반사에서도 대표성을 인정해 “종교개혁”으로 호칭해 준다. 고마운 일일 수 있다. 그만큼 인류의 16세기는 신·구 기독교의 혁명적 전환에 깜짝 놀라야 할 것이다. 기독교 구파인 로마 가톨릭의 16세기는 반(半) 정도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상대인 프로테스탄트 측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반(反) 개혁으로 급변하게 되었으나 18세기,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상당한 수준의 개혁을 이루어낸다.

로마 가톨릭은 신·구 기독교가 발칵 뒤집혔고 가톨릭의 향후가 “교황제”를 지켜내느냐, 아니면 “교회총회”제로 전환하느냐까지를 거론했고, 방정맞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위력으로 “가톨릭 이러다가 해체되는 거 아닐까?”까지 했던 위험스러운 때인 16세기 바로 그때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렸다. AD 1545년 12월 13일부터 1547년 6월 2일까지 제1기 회의가 열렸다. 제2회기는 AD 1551년 5월 1일부터 1552년 4월 28일까지, 제3회기는 AD 1562년 1월 18일부터 1563년 12월 4일까지 열렸다.

그토록 어려운 1500년대에 날마다 수녀원이 폐쇄되고 수녀들이 시집가지 않겠다면 식모살이나 사창가로 가야 했거나 수사들이 수도원이 물리력에 의해 폐쇄되어 갈 곳이 없어지면 떠돌이가 되기도 했었고, 자고 일어나면 가톨릭 성당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당으로 바뀌고, 영주들이 집단으로 프로테스탄트로 옮겨가면 선택의 여지없이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되거나 집과 직장, 농토를 포기하고 떠나거나, 전쟁이 터질 경우는 끌려가서 총알받이가 되거나 했던 1500년대에 로마 가톨릭은 트리엔트공의회를 무려 17년 동안 회기를 열어놓고 공공성을 지켜 지켜내려고 힘을 모았었다.

16세기를 지나서 17세기의 군주권과 시민권 충돌과 신·구 기독교의 세력다툼 때문에 지키기도 힘들고 프로테스탄트와의 전쟁도 힘들었을 때, 18세기 계몽기의 혹독한 시련과 프랑스 혁명기를 거쳐서 19세기 말까지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기 작전에 최소한 본전은 지켰다고 확신했던 로마 가톨릭은 AD 1869년 12월 8일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196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81세 노령의 요한 23세의 선언으로 드디어 세계성을 보완한 현대사의 가톨릭 개혁사를 열었다.
 

1.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제3개혁시대

시대는 어느덧 21세기이다. 16세기에 일으킨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사 500년이 지나고, 1천년 가다듬어야 개혁이 완성된다고 보면 기독교 개혁사는 이제 반환점을 막 돌아서 향후 또 500년의 장도에 올라야 한다.

우리는 루터, 쯔빙글리, 칼빈의 이름을 백번 자랑해도, 저들이 프로테스탄트 출발점에서 그 많은 시련과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는데도 정직하고 용기 있는 기초기반을 다져서 오늘에 이르렀음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무조건 존경한다.

다만, 시대로서의 한계나 개개인의 능력은 별개로 평가해도 늦지 않다. 오히려 로마 가톨릭의 철옹성보다 더 강력한 구조의 틈새를 냈고, 더 노력해 길을 열었으니 여호수아 요단강 돌파, 이스라엘의 여리고 성 혁파보다 더 장렬한 승부가 될 것이다.

여호수아의 히브리는 광야 40년의 집단훈련과 또 모세도 건너지 못한 요단강 돌파의 선별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결집력은 물론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요수아, 예수아)의 힘의 결집인 여리고성에 비해 루터나 칼빈 시대의 16세기는 훨씬 더 복잡했었다. 특히 강력한 세력과의 대결이 힘들었다. 앞서 서론에서 가톨릭의 저력을 말했듯이 가톨릭은 종교개혁기가 전쟁 시대로 돌입한 1545년부터 1962년까지 4백여 년 동안 3차례의 공의회를 열만큼 여유가 있었다. 또 국제적인 조직력과 1천년 이상의 역사 경험을 동반한 세력이니 여기에서 골리앗과 다윗의 물맷돌 대결 같은 수준의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실패 확률이 많았었다.
 

2.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결정적 위기

1521년 보름스 재판정. 그때 로마 교황청 대표들, 신성로마제국 혈기 방자한 21세 나이의 카를 5세 황제 앞에서의 마르틴 루터는 회의장의 분위기와 군왕의 위세, 로마 가톨릭의 권세 앞에서 잔뜩 주눅 들었었다. 황제의 질문공세에 루터는 입이 얼어붙어서 답변을 못했다. 목소리가 목줄기를 넘지 못했다. 그날의 기록은 필립 샤프의 교회사 전집 제7권 독일편을 살펴보면 루터가 얼마나 진땀 흘리고 있는가가 잘 묘사되어 있다.

다행히 루터가 잠시 쉴 시간을 달라 하는 요구를 했고, 황제가 넉넉하게 재판을 내일로 연기한다 했기에 그 다음날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대장부다운 모습을 되찾았었다.

그런데 황제가 약속한 대로 루터를 무사히 비텐베르크로 가도록 조치했는데 당시 가톨릭은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때 살해하기로 모의했다. 그러나 루터는 죽지 않았다. 재판의 전후 과정은 물론 금번 개혁의 성공은 루터를 보호하는 세력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 사람, 루터를 도와서 앞날을 도모할 은인의 등장이다. 그 사람은 작센주 선제후 프리드리히 공이다. 작센주는 당시 독일은 물론 신성로마제국의 세력 안에서도 선두급이요 영토가 대한민국 남북을 합친 것보다 크다.

바로 프리드리히 공이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는 루터의 마차를 통째로 가로챘다. 가톨릭 세력이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보안유지를 해 루터를 자기의 겨울궁전인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안내했다. 루터는 그 다음해인 1522년까지 그곳 안가에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그의 개혁사상을 가다듬었다.
 

3. 그러나 개혁사는 정치사였다

마르틴 루터는 개혁자로서의 신분확보는 물론 그의 사상 내용들이 구텐베르크 식 인쇄술의 도움으로 서유럽 전체로 전파되었다. 루터는 유럽 무대의 별처럼 등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정치역학에 대한 학습은 넉넉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공에게 이끌려 바르트부르크로 갈 수밖에 없었던 날의 운명을 빨리 계산했어야 했다. 교황권의 보호에서 영주(군주, 군왕)권으로 보호막을 바꾸는 수준의 단계적 개혁자로서의 자기 한계를 읽을 수 있어야 했다. 루터는 칼빈으로부터 아버지 같은 존경을 받았으나 칼빈의 제네바 원칙에 대해서는 공부가 부족했다. 칼빈의 제네바는 루터의 무대에 비해서 작아보였으나 세속권세의 함정은 피할 수 있어서 칼빈의 개혁은 정교 분리 원칙을 생각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루터의 개혁은 그 당시로는 가톨릭으로 단일화 되었던 유럽을 두 조각냈다는 오해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재세례파 농민전쟁기를 거치면서 아, 나는 더 이상 “대표개혁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나님 나를 구원하소서. 내 바통을 이어갈 개혁자를 보내주소서” 하면서 몸을 낮추고 프로테스탄트 역사는 전체 인류사의 균형을 빨리 찾아내야 하는 세계사의 문제로 볼 줄 아는 혜안이 열렸어야 했다. 일본의 우찌무라간조는 “그리스도인이면 모름지기 4백년 앞을 내다봐야지”라고 했는데 말이다. 뿐만 아니라 1536년도에 자기보다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에라스무스 신부의 인문학과의 만남을 생각했으면 후환을 줄일 수 있었는데….

앞 문장 종결을 짓지 않고 말을 잇는다. 이는 강조법으로 독자들이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 지금은 21세기다. 루터나 칼빈 시대를 구설수에 올릴 일이 아님을 안다. 우리는 그래도 우리의 선진들이 피눈물 흘리며 물려준 역사, 프로테스탄트 5백년을 더 깊이 통찰해야 한다. “경험이 선생”이라 하신 어머니의 유훈을 겸허하게 받으면서, 나는 21세기 오늘에서 더딜지라도 우리가 찾아가야 할 기독교, 영광의 그날을 찾아내야 하는 기독교의 오늘과 내일을 겸손하게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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