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및 학교 차원에서 처음 드린 홍대실 권사 추모예배-47주기

행촌동 신학교 건물 건축 봉헌, 
현 성결대 부지 22,000여평 기증-
교단과 학교 발전 초석
 

▲ 홍대실 권사

성결대 설립자 고(故) 김응조 목사가 그 뜻을 펼칠 수 있었던 데는 그를 도와 신학교 건물을 마련한 홍대실 권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 홍 권사를 기리는 추모예배가 교단 차원에서 처음으로 열려 화제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총회장직무대행 윤기순)와 학교법인 성결신학원 이사회(이사장직무대행 민중기)는 3월 15 오후 2시 30분 성결대학교 예성80주년기념관 2층 홍대실홀에서 홍대실 권사 47주기 추모예배를 드렸다. 

교단 임원 및 교수, 직원, 학생, 유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예배는 민중기 목사(법인 이사)의 사회, 이강춘 목사(교단 총무)의 기도가 있었다. 이어 윤기순 목사는 ‘어떤 분이셨을까?’(막 10:45)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기러 오셨다는 삶을 홍대실 권사가 그대로 이어받은 삶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김국환 목사(교목실장)가 홍대실 권사에 대한 약력을 소개했으며, 윤동철 목사(총장)의 환영사와 김종현 목사의 격려사, 유족대표인 고병헌 회장(넷째 사위)과 김두성 목사(증경 총회장)의 추모사, 나세웅 목사(평의원회 의장)의 축도로 진행, 그의 뜻을 기렸다.

이날 예배에 참석한 한 관계자는 “김응조 목사를 추모하는 예배가 있었는데, 홍대실 권사 추모예배가 교단 차원에서 뒤늦게라도 이뤄져 다행”이라면서 “그분의 헌신이 있어서 교단도 학교도 초석을 이루었는데, 그 삶을 훼손하지 않고 학교 발전에 헌신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배 시간 내내 이 관계자는 그분의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그분의 뜻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고 한다.
 

▲ 교단 및 학교 발전에 공헌한 고 홍대실 권사 47주기 추모예배가 교단 차원에서 처음으로 개최됐다. 이날 예배에서는 생전의 홍 권사의 삶을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 홍대실 권사의 빛나는 헌신의 삶

1901년 평남 용강군에서 출생한 홍대실 권사는 19세에 장학섭 씨와 결혼했으며, 25세에 평북 입석 장로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았다. 3년 후인 1931년 30세에 평남 용강군 진지리에서 초가집을 얻어 진지리성결교회를 개척하고 집사로 봉직했고, 그 이듬해 신개척해 1년 후 부군의 헌금으로 40평 교회를 세웠다.

1943년 일제 탄압으로 전국 성결교회 교단이 강제 폐쇄됨과 동시에 성결교회 장로, 집사들 300여 명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교회 부흥을 위해 이성봉 목사를 초청해 재건예배를 드렸으며, 1.4 후퇴 때 월남하여 부산 온천성결교회에서 집사, 부인회 회장직을 역임하며, 피란신학교와 피난민 성도들을 돌봤다.

1954년 서울로 상경한 홍대실 권사는 성결교단의 모교회인 중앙교회 집사로 봉직하면서 교회 부인회 회장 및 성결교회 신생부인회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다년간 봉사했다.

성결교회가 분열되고 김응조 목사는 후학들의 배움터가 제일 시급하여 1962년 9월 2일 서울 충정로에 있는 자기 집에서 성결교신학교를 임시마련하고 49명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듬해 50여명이 더 모집되어 개인 집에서는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김응조 목사는 기도 중 홍대실 권사를 찾아가라는 응답을 받고 홍 권사를 찾아가 홍 권사의 도움 없이는 학교를 유지해 나가기 힘들다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당시 중앙교회는 예성에 속해있는 교회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963년, 11월 10일에는 행촌동 성결교신학교 건물(238평 3층 건물)을 단독으로 지어 봉헌했으며, 1968년에 성결교신학교 제4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성결대(당시 성결교신학교) 부지 22,228평을 기증했다.

이외에 성락원 사업에 적극 협조하여, 70여 평의 대지 및 건물을 구입해 봉헌했으며, 1968년 성락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은퇴 여교역자와 미망인 사모를 돌보기도 했다.

1971년 3월 2일 주님께 부름을 받은 홍대실 권사는 본인은 평생 밤색치마 회색저고리 한 벌로 생활하고 신발은 터진 고무신을 꿰매 신는 등 청빈한 삶을 살았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전 재산을 바쳐 헌신했다. 1963년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에 238평의 3층 벽돌건물을 지음으로 김응조 목사를 도와 성결대학교의 전신인 성결교신학교를 세우는 데 공헌했다.

이후 경기도 안양에 소유한 땅 22,228평을 학교 부지로 추가 기증하여 학교의 안양캠퍼스 시대를 열게 했다. 그밖에 홍대실 권사는 평양 진지동교회, 강릉교회, 온양교회, 묵호교회, 속초교회, 백은교회, 고길리교회, 대전교회 등 8곳의 교회를 단독으로 건축 봉헌하며 생전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결교회의 발전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했다.
 

+ 자랑스러운 어머니

가족들은 그를 자랑스러워했고, 그 뜻을 기리고 있었다.

홍대실 권사의 넷째 사위인 고병헌 회장(주시회사 금비)은 “어머니는 하나님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절약하고 헌신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해서 최선을 다하셨다는 것이 훌륭하고 빛나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또한 “참다운 진리를 전파하는 성결교회의 확대가 몹시 필요했던 시기에 어머니는 많은 교회를 지으시고 기둥이 되는 신학교 세울 결심을 하셨다”면서 “단순히 여자의 몸으로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판단하시고 실행한 어머니가 참으로 존경스럽고 훌륭한 어른이라고 자부하고, 긍지와 신념을 가지고 어머니가 남기신 그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받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넷째 딸이자 고병헌 회장의 아내인 장명숙 권사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평범하지 않았다.

“나한테 어머니는 어렵고 무섭고 활동적이었고, 안팎으로 일을 많이 하셨고, 강한 분이었다”면서 “친구들 어머니처럼 자상하고 따뜻한 어머니 모습보다는 부지런하고 쉬는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사셨고, 당당하고 당신의 믿음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이 있고, 어느 자리에서나 누구한테나 전도하셨고, 하나님을 향해 헌신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홍대실 권사의 장손인 장철호 장로는 “할머니는 저를 중앙교회로 데려오셨고 기도원도 많이 데리고 다니셨다”며 “교회 일을 정말 열심히 하셨지만 본인은 한복 치마저고리 한두 벌로 나실 정도로 정말 열심히 절약하시며 교회를 세우시고 후학을 세우시는데 헌신한 분”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육신을 위한 생업은 구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닙니다’라고 평소에 말씀하시며 청빈한 삶, 강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간 사람 홍대실 권사의 삶의 자욱은 오늘도 후세에 생생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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