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종교개혁 부르며_10 이신칭의와 만인제사

이신칭의와 만인제사는 하나다.
다만 이 둘은 오묘이기도 하다.
이신칭의는 십자가에서 죽어가
는 예수이고, 만인제사는 무덤의
제2일과 제3일 아침의 부활 예수이다.
부활 예수, 부활 제자, 부활 신자
가 교회시대의 예수 사람들이다

 

내가 마르틴 루터(1483~1546)를 공부하기 시작한 때는 1961년도였다. 그때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도를 넘었었다. 내가 가장 부끄럽기도 하고 추악하게 생각한 것은 분열되는 과정의 교회들 간에 폭력인데 그것이 너무나 세속적이었다. 갑자기 한국교회에 뛰어든 세계교회협의회(WCC) 파동이 교회운동사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던 순진한 한국교회를 심각하게 괴롭히던 때였다.

아직 신앙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한계 때문이었을까. 그때는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반대파 세력에게 몽둥이를 맞아 피 흘리면서 병원으로 실려 가는 당시의 한국교회, 교회당 잠가놓고 자기들만 사용하는 싸움 등등은 신앙의 참과 거짓의 싸움이기보다는 탐심의 욕망을 이겨내지 못한 그 시대의 한국교회에 대한 아픈 상처였다.

그런데 나는 1959년 <세계교회사>(송락원 저) 한 권을 읽었다. 페이지가 600쪽이 더 되었으니까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는데 메모노트에 평을 써가면서 또 책에는 빨간 색연필로 줄을 그어가면서 공부했었다. 그때 나는 세계교회 발전사에도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가 참 많았음을 발견했고 한국교회 상에 대한 의문과 분노가 있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내 눈에 들어온 인물이 마르틴 루터였다. 그때 한국교회는 10월 말일 주간을 부활절 전 주간과 함께 한 주간 내내 특별집회를 가졌고, 신자들은 최소한 2~3일씩은 금시하면서 주 예수의 부활과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영웅적 인물인 마르틴 루터를 추앙하고 흠모했던 때였다고 지금도 내 기억은 동의하고 있다. 그런데 루터에 대한 의문이 몇 개 있었다. 이해되지 않은 루터의 행태 중 잔인한 인간이라고 의심하게 된 부분은 농민반란을 폭력진압한 동조자였다는 점, 또 하나는 수도원과 수녀원을 인위적으로 폐쇄한 일들과 더 서글펐던 것은 시집가지 않겠다는 수녀나 수사들을 억지로 마치 보쌈 식으로 개개인의 인격을 짓밟으면서까지 억지 부리던 일, 자기가 그토록 주장했던 “이신칭의”와 “만인제사론”의 두 교리를 스스로 짓밟고 방치했다는 점 때문에 그 무렵 나는 루터의 종교개혁 지도자 자격은 1525년도에 끝났다고 보았다. 1526년부터 1546년까지 후반 20년은 루터를 종교개혁자라고 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려왔다.

그리고 루터에 대한 소수자 의견 속에서 내 공부는 진행되었으나 근래 “종교개혁 5백주년” 행사로 말미암아 루터나 16세기 개혁자들의 자료가 많이 쏟아져 나왔다. 루터의 책 번역, 연구와 평가, 칭송 등 종류의 책들이 상당수 쏟아져 나와서 추가공부 중이다.
 

1. 그래도 루터가 그립다

1517년 루터가 비텐베르크 예배당 현관 문짝에 내걸었던 95개 조항을 통한 교황권의 각성과 변화를 요구했던 내용은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당시 유럽사 또는 세계사의 중세와 근세의 전환점에 대한 시대의 변화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기존이 천동설과 지동설, 필사본 시대와 구텐베르크 활자와 대량인쇄, 왕권신수와 시민선택권과 군왕(군주) 혁명시대, 그것들의 집약이 신분사회의 변화에서 오는 노동자가 농노(동양은 노비) 신세를 극복해야 한다는 인간사회의 변화요구는 상당히 절박한 시대였다.

바로 그 시대에 떠밀려버린 순수한 수도사 출신 마르틴 루터를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도 미숙한 나이에 첫인상으로 살펴본 루터에 대한 평가를 지금도 화석처럼 고집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오늘은 루터에 대한 한 부분을 가다듬어보았으면 한다. 루터의 이신칭의를 살펴보자.
 

2. 이신칭의와 21세기 교회

대개 루터를 십자가 신학자라고도 한다. 이신칭의는 십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최소한의 압축인데 간단히 몇마디로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하면 “이신칭의”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아 예수를 다 표현하기 쉽지 않다. 이신칭의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가 되겠고, 제3일 아침에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부활은 그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이신칭의 신학과 신앙의 완전성 확인으로 십자가 예수의 열매가 부활이고, 루터의 신학적 대응으로는 “만인제사”이다. 다시 말하면 이신칭의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은 참 신앙이고, 만인제사는 육안으로도 보이는 이신칭의의 영적 열매요 가치이다.

바로 이 부분이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그 모습이 된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현상이 교회에 대한 착각이다. 특히 한국교회 신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유럽교회 평가 부분인데, “가로되 유럽교회는 없다. 망했다”이다. 이는 유럽을 잘못 보고 하는 말일 뿐이다. 유럽을 보는 눈이 부족해서 유럽의 교회가 한국 신자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유럽 특히 서유럽과 북유럽은 유럽 그 자체가 교회다. 다른 말로 하면 유럽교회는 발람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천사의 칼(민 22:23)처럼 미숙자의 눈에는 유럽 수준의 교회가 보이지 않는다. 유럽은 잘못을 잘 저질렀다(지난 과거사).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곧바로 회개한다. 유럽은 1815년까지 루터 이후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으나 1800년대가 가기 전에 반성과 회개를 열심히 했다. 그래도 1, 2차 세계대전을 막지는 못했으나 1991년까지 세계를 통째로 먹으려 했던 소비에트연방(소련)과 그 위성세력들을 지구상에서 소멸시켰다. 이 힘과 능력이 유럽교회의 자산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한국교회가 배워야 한다. 공산당 세력이 대한민국 북쪽에 똬리 틀고서 남쪽의 대한민국과 교회를 노려보고 있다. 바로 이때 한국교회에게는 유럽교회가 소련의 깃발을 내리게 했듯이 북한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순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지금 북한 공산당의 유혹과 현란한 변신술로 대한민국을 노리는데, 이때 한국교회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 싸움에 교회가 나라의 젊은이들과 함께 이겨준다면 대한민국은 영원한 칭송의 대상이 될 것이다.
 

3. 이신칭의와 만인제사는 하나다

한국교회 일각에서 “만인제사”를 말하고 있는데 우선 신학적 검토가 필요하다.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은 루터나 칼빈 시대에 이미 가톨릭의 성속(聖俗) 이원적 계급신학에서 탈피했다. 그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공헌 부분이다.

그래서 성직계급과 평신도계급은 우리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신학 근거에 없다. 성직은 계급이 아니다. 교회의 스승이고 지도자로서 목사이고, 당회나 그 밖의 기관에서도 목사와 장로 동급 대상이다.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통합측 총회장으로 한영제 장로가 계셨던 예도 있고, 앞으로도 교회 안에서 때가 되면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목사만이 설교는 물론 성례 집전자로 한정되지 않는다. 특히 유럽이나 미국은 더더욱 그렇다. 한국교회는 미국신학을 선호하지만 미국은 신학교 졸업자에게 졸업과 동시에 “설교자 자격증”을 준다. 그가 목회를 하면 목회자가 되고 목회직무를 중단하거나 마치면 목사 호칭을 하지 않고 “설교자”로만 남는다.

한국의 과도적 현실에서 목사가 제왕적 직분인 듯하지만 그게 아니다. 목사는 또 종신직도 아니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성장과정에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만인제사 운동과 목회자는 갈등도 있을 수 있겠다. 이는 만인제사 운동이 평신도 전문운동이라는 오해나 착각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 만인제사 운동으로 한국교회가 더욱 건강하게 되려면 이를 대립관계로 삼지 말고 함께 이루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이신칭의”와 “만인제사”는 두 개의 교리가 아니다. 이 둘은 하나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는 성소와 지성소, 이방인과 선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의 관계로서 신약신학, 또 예수의 가르침 중 최고의 품격을 이루는 걸작이기도 하다.

이신칭의와 만인제사는 하나다. 다만 이 둘은 오묘이기도 하다. 이신칭의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이고, 만인제사는 무덤의 제2일과 제3일 아침의 부활 예수이다. 부활 예수, 부활 제자, 부활 신자가 교회시대의 예수 사람들이다.

바로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의 이 원리를 아는 자들이 예수 메시아를 지상 세계로 부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조직 속에서 목사와 평신도 관계를 교권관계로 만들지 마라. 목사가 교권자 노릇하는 시대는 곧 끝난다. 교회 목사가 은퇴하면서 자식 중 똑똑한 자에게 교회를 넘겨준 일이 세습이라고 괴로워하지 마라. 교회당이 사업체 승계처럼 되었던 시대는 곧 끝난다. 이를 “되었던 시대”라고 우리는 자신 있게 과거처리해야 한다. 더구나 “대교회”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자. 대교회가 어디 있나. 대교회가 대교회 행세하면 그것은 “대재앙일 뿐”이다. 이 같은 풍조는 흐름이다. 유행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북한의 “절대사회주의” 즉, 아주 무자비한 공산세력과 곧 정면승부 할 날이 오고 있다. 좌파 정부가 그 길을 앞당겨 놓았다. 또 이는 한국교회가 세계 평화와 인류 진보 역사에 아주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찬스가 되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이 로마와 카타콤을 이겨낼 수 있었듯이, 유럽교회와 유럽인들이 공산당 세계 지배사를 종결시켰듯이 한국교회가 이신칭의와 만인제사가 하나의 자리임을 깨닫게 되면 지금보다 일곱 배 아니 칠십 배의 힘을 쓸 수 있다. 한국교회여! 너희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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