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 234 ] / 사제 왕 요한 41

“파울로는 마치 자기가 기독교 대표라도 된 것처럼 난처해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실력이 엇비슷해 쉽게 승부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테무진 앞에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때로는 낯 뜨거운 처지가 되기도 했었다.”

 

▲ 내몽골의 한 마을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파울로는 테무진과 함께 한동안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테무진은 파울로를 통해서 서양 기독교에 대해, 로마 제국에 대해, 또 십자군 운동에 대해서 듣기 원했다. 그는 특히 유럽의 군사전략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궁금증이 유난히 많았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정면충돌하는 경우가 이해되지 않고 전쟁이 1백여 년 동안 계속되는 것도 자기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파울로는 마치 자기가 기독교 대표라도 된 것처럼 난처해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실력이 엇비슷해 쉽게 승부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테무진 앞에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때로는 낯 뜨거운 처지가 되기도 했었다. 당신들 기독교나 이슬람은 마치 전쟁을 놀이 하듯이 하는 거냐고 테무진이 말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한동인 한가롭게 지낸다 싶었으나 주변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테무진을 찾아오는 이들 숫자가 늘었다. 그들의 말하는 내용 중에는 자무카와 테무진 연합군에게 괴멸 당했던 메르키트족이 상당수 회복되었다는 말이 들렸다. 어떤 때는 테무진 휘하의 군사들도 바쁘게 오갔다.

테무진 부하 젤메가 와서 보고하는데 초원의 중심세력인 자무카가 자기 부하들에게 전과 달리 사납게 대한다는 말을 했다. 메르키트족과 전쟁을 치른 뒤 테무진 직계는 백여 명 정도가 자무카 그는 아래서 그럭저럭 지냈으나 평화로운 시간이 지날수록 자무카 사령관 휘하의 직계가 아닌 사람들 중 상당수 테무진의 온유함과 덕망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메르키트족을 전멸시키려드는 자무카에게 테무진이 정면으로 반박했던 때를 파울로는 기억하고 있는데 초원의 소위 비주류들 중에는 지도자의 인품을 따라 움직인다는 느낌을 주변에서 점점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각한 일이 일어났었다. 자무카의 부하 한 사람과 테무진의 수하인 젤메 사이의 일이다. 초원에 풀을 뜯는 말과 소, 양과 염소들 가운데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말들과 양, 염소 떼를 구분한다. 이 외에도 소, 낙타, 야크 등도 양무리에 포함했다. 다 같은 가축들이지만 말은 귀족에 해당한다. 초원의 전투나 부족이동은 속도전이기 때문에 말들은 군사만큼이나 소중했다. 주로 식용인 소나 양, 염소 등은 2등급이다. 말 관리자들은 귀족 대접, 양이나 그밖의 짐승들 관리자들은 하등급이다. 부족의 경계선 주변에서는 경비견들이 부족과 가축들을 지킨다.

승용마와 군용마를 지키는 군사는 자무카 휘하의 부대에서, 식용 등으로 쓰이는 양이나 염소 등은 테무진 휘하의 사람이 지키도록 자무카 대장이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테무진의 2인자에 해당하는 젤메에게 통보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초원 부족 사람들은 다 안다. 오늘부터는 자무카와 테무진은 공동 지도자가 아니라는 통보였다.

테무진 진영에서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테무진은 때가 왔구나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 진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목숨 건 결단을 내렸다. 그들 테무진 집단은 바로 그날 밤 늦은 시간에 말, 소, 염소, 양, 야크 등은 물론 그들의 게르와 살림살이를 소리 없이 정리했다.

테무진 무리의 야반도주를 자무카는 보고받았다. 테무진은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임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같은 몽골족이지만 테무진은 성골, 자기는 진골 급이다. 부하들이 바로 오늘 밤이 잠재적 경쟁자인 테무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자고 했다. 그러나 자무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테무진은 이미 나의 상대가 아니다. 더구나 그는 나의 ‘안다’이기에 함부로 죽일 수는 없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한밤중에 야반도주한 테무진 무리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잠을 편히 잤는데, 다음날 아침 자무카는 깜짝 놀랐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에 콧노래로 답할 형편이 아니었다. 상당수 휘하 부족들이 테무진 진영을 향해서 빠져나간 것이다. 테무진 성품의 온화함이 하층민들 눈에 보였던 것이다. 계급을 엄격하게 계산하는 초원 부족들의 눈에 노예 출신이 분명한 젤메가 테무진 진영의 2인자 노릇을 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봐 온 자무카 진영이 크게 흔들린 셈이다.

자무카는 보고를 받고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겉으로는 자기 진영에서 짐만 되는 것들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날로 더해가는 테무진의 인기가 무서웠다. 테무진 진영은 놀라운 변화가 계속되었다. 새로운 지도자를 따라서 나온 그들 중에는 흩어져 지내는 부모형제와 일가친척들을 불러들였다. 12세기 말에 인간 차별이 없는 지도자요 명문가 중 명문가이면서도 노비 계층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는 지도자, 전쟁이 벌어질 때를 제외하고는 늘 누더기 옷을 즐겨 입고 자기 소원은 평범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테무진의 덕망은 자무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민심의 지지로 나타났다.

계속해서 테무진을 찾아나서는 초원은 장관이었다. 한반도 전체의 열 배는 된다는 몽골 초원은 말을 몰고 오는 사람들, 소와 양 떼를 몰고 오는 테무진 맨들이 봄날의 푸른 몽골 초원을 희고 붉고 검은 색깔로 바꿔버리고 있었다.

하루는 늙은 대장장이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테무진 군막 근처로 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이칼 호 서쪽 타이가 지대에서 먼 길을 걸어 온 것이다. 몽골보다 훨씬 더 추운 시베리아 깊은 숲(침엽수) 속을 떠나서 참으로 먼 길을 걸어서 오고 있었다.

초원으로 간다. 초원의 냄새가 난다. 곧 가까이 초원이다. 이렇게 노래하며 테무진을 찾아오고 늙은이의 마음은 들떠 있었다. 20여 년이 조금 더 되었을까. 테무진의 부친 예수게이가 몽골국의 대장군이었을 때 앞으로 자신의 가솔들을 돌봐달라고 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예수게이는 첫아들을 낳았었다. 이름은 테무진. 테무진은 예수게이가 전투 중에 인품과 기량, 그 용맹성이 뛰어난 장수와 담판겨루기를 하는데 그를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어서 그때 자기가 죽인 그 적장 이름을 자기 첫아들 이름으로 불렀다고 들었다. 예수게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 당했다는 것까지는 그가 알고 있었다. 그 후 테무진의 가족은 노예로 전락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의 이름이 초원지대에 울려퍼지는 때에 우랑카이족 자르치우다이 노인도 그 이름을 듣고 알았다. 큰아들은 전란 중에 잃어버렸으나 건강한 둘째 아들은 데리고 테무진 군막 가까이에 왔다.

테무진은 낯선 늙은이가 아들인지 모를 사내 하나와 둘이서 그를 잘 안다고 우겨서 들여보낸다는 보초병의 보고를 받았다. 그는 군막 밖으로 나왔다. 초원은 이름 그대로 자유와 여유가 넘쳐흐르는 느낌을 주지만 군웅이 할거하던 테무진 초기의 몽골 땅은 잠시만 방심하면 목숨이 위태롭다. 먼저 초원의 종족이 아닌 삼림지대인 우랑카이족이면 일단 더 치밀하게 경계해야 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늙은이와 한 소년이 눈앞에 나타났다.

우랑카이족 노인은 테무진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말을 꺼냈다. “나는 자네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를 맺은 자르치우다일세. 자네가 태어난 후 어린 시절 한동안 나는 자네 아버지와 같이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나의 형님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 당했지. 그때 나는 예수게이 형님에게 내 인생과 내 자식들을 바친다 했는데 자네 가문이 풍비박산 되면서 나 역시 내 부족 우랑카이족을 찾아갔다네. 그런데 그때 예수게이 형님과 약속했던 내 자식이 있었어. 자네보다 한 살 아래야. 그 아들을 전란 중에 잃었다네. 내가 데려온 이 아이는 후에 태어났는데 대단히 총명해요. 아버지 예수게이의 ‘안다’인 이 늙은이가 아들을 자네에게 바치네. 수하로 거두어 주게. 내 형님인 자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함일 뿐 다른 소원은 없다네.”

테무진은 처음에는 무덤덤한 표정인듯 싶었는데 그의 아버지 ‘안다’이면 자기에게는 작은아버지가 아닌가. 몽골인들은 의형제(안다)를 친형제처럼 대하는 전통이 있다. 코스모폴리탄적이라는 거창한 표현 이전에 대몽골 초원 다 혈통 공동체 사회의 아름다운 풍속이라고 볼 수 있다.

“네, 숙부님. 어찌 저 아이뿐인가요. 숙부님을 제 아버지처럼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너 형님께 인사 올려라! 이 아이 이름은 수부타일세, 자네보다 한 살 아래 놈은 젤메인데 아까 말한 대로 전란 중에 잃어버렸어. 아마 노예생활이나 하다가 지금쯤은 죽었을 거야.”

자르치우다이 노인은 슬픈 낯빛으로 잃어버린 첫아들 추억에 잠긴다. 자기 앞으로 다가온 수부타이의 두 손을 붙잡고 그의 눈매를 바라보던 테무진은 늙은이의 입에서 젤메가 튀어나오자 마치 감전이나 된 듯이 그 육중한 몸을 들썩이며 놀란다.

“뭐, 뭐라 하셨소. 젤메! 내 곁에도 젤메가 있는데…?”

테무진이 젤메를 찾아오라 명했다. 수부타이. 장차 징기스칸 전쟁사의 최고봉 수부타이(AD 1176~1248) 장군이 후일 징기스칸이 되는 테무진 앞에 나타났다. 역사가들은 수부타이를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전술적 탁월함은 한니발과 로마 제국의 스키피오 장군의 버금이고, 책략가로서는 일렉산드로스와 줄리어스 시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한다. 그는 73세에 사망할 때까지 32개 민족의 국가들을 점령했고, 65차례의 대격전에서 승리했다.

이처럼 위대한 징기스칸의 제2인자인 수부타이를 모르는 서양 역사가들, 군사전략가들.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의 스탈린은 이 수부타이 군사 전술전략을 미리 배워서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를 무릎 꿇렸음이 역사적 진실이다.

수부타이를 자세히 뜯어보는 테무진은 그의 눈에다가 자기 눈을 마주 박아버리기라도 할 듯이 뚫어지게 본다. 그때 테무진의 호출에 젤메가 허겁지겁 그들 앞에 나타났다.

“젤메야, 너 이 어른 알아?”

테무진은 흥분했다. 혹시, 혹시 말이다. 노예 신분으로 떠도는 젤메를 거두어 내 식구 만들어 살아왔고, 지금은 테무진 몽골족의 제2인자인 젤메가 혹시 자르치우다이 노인이 잃어버린 아들인지 누가 아는가?

“젤메, 젤메라니…? 이 자가 젤메….”

하면서 노인은 테무진과 젤메를 번갈아 바라본다. 어느새 젤메 곁으로 가서 그의 얼굴을 바로 세운다. 눈빛과 눈빛, 아버지와 자식일까? 자르치우다이는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행위는 자기 감정을 추스르는 것이다. 노인이 젤메의 뒤통수를 더듬더듬 만지고 들었다. 뒤통수 어딘가에 상처자국이 하나 있다. 그걸 찾는 중이다. 노인이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더니 젤메의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이 자식, 이 놈아. 너 어디 떠돌다 여기 있느냐. 내 아들아!”

자르치우다이 늙은이는 젤메를 껴안는다. 테무진은 좋아라 했지만 젤메는 노인의 눈물이 범벅된 주름진 얼굴을 멍하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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