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가실 때 예수님은 죽음의 
 마지막 시간까지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유대인들을 안고 가셨음을
 그리스도인들은 
 명심해야 한다.”

▲ 대속의 실체,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발견돼야 신앙이다.

기독교의 첫 단추가 유대인이다. 역사 무대 위에서 유대인은 기독교의 누구인가에 대한 접근을 다시 해야 한다. 이는 풍습과 전승에 따른 손쉬운 해석과 평가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먼저 예수님과 유대-이스라엘의 관계를 깊이 있게 살펴야 한다. 요한복음 8장을 살피면 예수님께 사사건건 시비와 도발을 일삼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충돌관계를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은 너희 같지 않았다…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하시면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이라 하셨고, 대화의 마무리에 이르러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로 마무리 지으신다.

여기 우리가 살피고 있는 요한복음 8장 12절 이하 대강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대립관계를 보이는 유대인의 행투, 그리고 예수님이 유대인을 향한 근원적인 기대와 연민을 먼저 헤아리면 좋겠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자기들의 관계를 거부하지만 예수님은 원격 관찰 또는 전체(역사) 관찰법을 통해서 유대인과 유대인의 (유일한)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경외심을 인정하시면서 그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사람들아! 당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나도 좋아한다. 그의 정확하고 진실한 신앙을 나도 사랑한다. 아브라함은 평생 동안 나의 때(메시아의 지상 강림) 보기를 열망했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지금도 내가 너희로부터 대접받지 못하지만 인내로서 너희 눈이 밝아져서 나 예수가 아브라함의 구세주이시니 또 너희 유대인의 구세주 됨도 너희가 믿고 따를 때까지 기다리시는 이 모습을 기뻐하고 계시는 것이다.
돌로 쳐서 죽이려고 잔뜩 준비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으면서도 본문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심판하시거나 내치시지도 않았고, 저주 따위는 결코 생각하지 않으심을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은 주목해야 한다.

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가실 때 예수님은 죽음의 마지막 시간까지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유대인들을 안고 가셨음을 그리스도인들은 명심해야 한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죽일 죄는 아니니 매질 좀 해서 내보내겠다고 할 때도 유대인들은 “바나바를 주시오!” 하면서 끝까지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은 사안을 똑바로 살펴야 한다. 세속인의 눈, 긍휼과 대속의 은혜를 모르는 자연인의 판단으로는 유대인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를 원수 갚음의 칼로 되갚아 주어야만 정의가 바로 선다 하겠으나 예수님의 법칙은 용서였다. 저희가 알지 못하고 저지른 죄이기에 용서다. 그 용서의 분량,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 하셨다.

그런데 기독교는 예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 많은 날 동안 유대인 모두를 향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의 날들, 로마제국이 교회였던 제국의 국교시절에 유대인들에게 적절한 관용을 베풀고 로마제국 영토 안에서 유다-이스라엘은 파리똥만큼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정히 얄미우면 예수님의 활동지인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길 따라 갈릴리까지 만이라도 유대인들이 머물며 살아가게 해 주었다면 오늘날 기독교와 유대인 관계가 이처럼 초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에 대한 용서나 관용을 말하기 전에 그들과 우리의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 가족, 또 대개가 갈릴리 출신인 예수의 제자들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유대인이었고, 유대 바리새파 랍비 신분은 모르겠으나 존칭으로는 랍비로 호칭했었다. 바리새파 중 샴마이가 아닌 힐렐-가브리엘-쟈카이로 이어지는 랍비나 랍반들과 지속적 우정을 가지고 생활했었다.

예수의 갈릴리 제자들 대개가 바리새파였고 일부가 열심당과 연계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열심당, 에세네파,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고, 부모와 형제들이었다.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보라. 신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등장했을 때 유다 왕 요시야는 종교개혁(BC 604년)을 시도했다. 그때 긴박하게 구약성경(히브리 성경)이  편집되지 못했으면 바벨론 포로기(BC 586년) 이후 격동 세월동안 유대인들은 성경책(구약)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벨로 포로기에 본격 형성된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있다. 그 수많은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페르시아, 흑해, 카스피 해, 중앙아시아, 아라비아, 에티오피아, 유대 사막과 황햐지대, 지중해 골짜기 등에서 야훼 하나님의 계시와 그 생명력을 보존해 주었고 믿음을 지켰기에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되어 메시아 예수가 천하 만인의 구세주로 역사 위에 등장한 것이다.

예수님이 하늘의 별로 떠 있다가 어느 날 이 땅 위에 뛰어내려 오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사, 아브라함에서 예수, 예수님의 교회에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까지로 쉼 없는 역사, 끊기지 않고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날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그럼 그런 사고방식 속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대속(代贖)의 은혜를 모르고 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기 쉽다.
 

대속과 부활은 교회의 생명

대속의 희생양, 이 원리는 아브라함의 모리아 이삭 제단 때부터 예수 십자가 골고다에서 완성될 때까지 유대인이나 구원의 자리에 초대받은 이방인 모두에게 최상의 은혜요 은총이다. 유대-이스라엘은 속죄 제사를 매일, 매 안식일마다 희생제로 드리면서 마지막 날 “단독자의 제단”에 메시아가 오르는 제사종교 완성까지를 훈련했던가.

예수 십자가 죽음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둔감했던 유대-이스라엘이 메시아 예수를 죽이는 실수(실패)를 했으나 기독교가 유대인을 향해 “하나님이신 메시아를 죽인 자들”이라고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할 대상으로 외면해서는 안 될 현안이 등장했다.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 죽인 자들, 그들의 불순종에 대해서는 책망을 받아야 하겠으나 기독교, 부활 예수의 생명라인에 선 기독교는 유대인과 더불어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을 외면하는 자들 모두를 외면하고 응징하거나 저주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는 용서받은 자들의 종교이기에 용서해야 할 필연적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용서란 그 기본적 속성이 무조건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용서의 횟수를 묻는 시몬 베드로의 최고치인 “일곱 번” 앞에서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를 예수의 용서로 역제안 하신 바 있지 않던가.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 하심은 무한 수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용서가 이루어질 때까지,  시제 상으로는 진행형, 무한 진행형이다.
용서해준다 해도 용서를 비는 자에게 용서한다는 논리는 하나님의 법칙이 아니다. 예수 십자가가 대속죄의 설득력을 가지려면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된다. 먼저 대신 죽으심이다. 그 죽으심에 동참한 자의 부활 생명 또한 생명의 기본 법칙이다.

예수 십자가 죽으심과 동시에 곧이어 다시 사시는 부활과 성령이 강림하여 부활 예수와 믿는 교회가 만나게 되며 예수(성) 영이 함께 하는 성도(교회)는 예수의 권능에 동반하게 되었다.
 

예수의 비밀 속에 담긴 유대인 신앙법

기독교는 아브라함과 유대-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유대-이스라엘의 순수와 정통성을 가진 “하나님의 생명”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신명기, 시편, 이사야 등 세 권의 책만을 인용하신 예수는 “메시아의 모형”을 볼 유대-이스라엘이 기록한 그 책들로 제시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이스라엘은 메시아 예수의 99% 조건을 확보한 하나님의 기반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유대-이스라엘의 계시 확인법, 계시 수여법을 철저하게 배워야 한다.

오늘의 기독교가 관념화 되고, 이원론적 유일성의 갈등 속에서 허덕이는 헬레니즘을 쉽게 용납하고, 깊은 고민 없이 그것들을 수용함으로 유대-이스라엘의 셈어적 순수를 놓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유대-이스라엘이 획득한 99% 정확도를 가진 메시아의 청사진이 그냥 쉽게 얻어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 기독교는 유대-이스라엘과 비교할 때 메시아의 그림(계시성)에 뒤떨어지고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7~28)와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1~22).

이 두 구절을 생각하면서 읽어보라. 예수 다시 오실 때 그때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를 만날 자도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열려 있다. 차마 기독교인들이 생각지도 못한 자들이 거기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다시 오심을 영접할 자들이 의외로 많으며, 기독교인들의 독점의 틀이 무너질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모세가 요단강 건너기를 여호수아에게 미루고 요단강 건너편에 머물게 되니까 모세가 버림받은 줄 착각한다. 그러나 모세는 2차, 3차로 요단강 건널 자를 인도하기 위해서 거기에 머물고 있다고 봄이 옳다. 그렇다면 유대-이스라엘 또한 그리스도인에게 요단강 건너기 선수를 내주었다고 그들의 구도 행(求道行)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들은 2차, 3차의 패자전 승부사들과 동행하는 대열에 함께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기독교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나라를 우리에게 독점권을 주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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