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저자 김용규

인문학으로 본 하나님,
숭앙의 대상 넘어
우리 삶에서
땀내 나는 씨름 벌이는
인격적 속성 부각

기독교 위협하는 종교는
이단이나 사이비종교가 아닌
바로 ‘데이터교’,
삶의 문제를 하나님이 아니라
데이터에게
묻는 당신, 돌아서라!

 

인문학으로 보는 ‘신’을 주제로 책을 쓴 지 8년 만에 나온 개정증보판 <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IVP)에서 가장 큰 변화는 ‘욥’에 대한 해석을 더한 것이다. 자녀, 재물, 건강 등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잃은 욥이 가장 갈망했던 것은 그것들의 회복이 아니라 견신(見神), 즉 하나님을 보고자하는 몸부림이었던 것에 주목한다.
다양한 대중 철학서와 인문 교양서를 집필해온 저자 김용규(67)는 오늘날 기독교에게 위협은 ‘무신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가치 상실을 부르는 AI시대의 도래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묻기보다 ‘데이터’를 신봉하는 현실이라는 것. 이런 때일수록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라고. 인문학의 언어로 본 하나님, 책은 단지 숭앙의 대상으로서 신이 아닌 인간 삶의 곳곳에서 함께 호흡하며 마주하는 문제들과 땀내 나는 씨름을 벌이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게 한다.
서양문명의 심층에 자리한 기독교의 신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조명한 책으로, 존재로서의 하나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인격자로서의 하나님, 유일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살폈다.
<편집자 주>


 

▲ 저자 김용규

●● 욥, 하나님의 존재를 묻다

△ 책머리에서 ‘다시 쓴다는 마음으로’ 고치고 확장했다고 하셨는데, 이전 책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 인문학적인 측면에서 신과 서양문명에 접근하는 관점은 크게 바뀐 것이 없지만 내가 이 책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신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강화되었다.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신’을 ‘하나님’으로 바꾼 것이다. 원고를 일괄적으로 바꿔놓고 보니 더 와 닿더라. 그것과 함께 우리 삶에 끊임없이 참여하는 신의 인격적 속성을 부각시켰다. 기존의 책보다 200자 원고지 800매 분량이 늘어났다. 편집의 묘로 분량문제를 해결한 출판사에 고맙다.

책을 풀어가는 두 가진 관점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영역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으로 신학, 철학, 과학뿐 아니라 문화, 역사, 미술, 음악에 깃든 하나님에 대해 살폈다. 또 하나의 관점은 기독교 교리와 신학을 구축해온 ‘이중적 논법’과 ‘양립주의’ 사유 방식으로 신에 대해 접근했다. 안셀무스가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고 한 것처럼 학문과 종교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 1천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전체를 새롭게 다듬기란 상당한 작업이었을 것 같다. 어느 부분에서 인격적 하나님이 부각되었나?

- 4부 ‘하나님은 인격적이다’에서 욥의 이야기를 새롭게 넣으며 중점적으로 다뤘다. 기존에는 아브라함 이야기만 있던 것에 욥의 이야기를 더한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부조리 문제를 다뤘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살에 주신 이삭을 별안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 바다의 모레와 같이 민족이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면 언약은 어찌되는 것인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일언반구 없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다. 그는 아들과 모리아 산으로 향하면서 일체의 이성, 일체의 인간적 타산, 곧 자기 자신을 철저히 부수고 버리고 체념한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 없이 아들을 죽이려 했다면 그는 미치광이 광신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날 그 산에서 아브라함이 구해 낸 것은 삶에 스며드는 부조리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전율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이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인류의 제2의 아버지’라고 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불합리한 것,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믿는 ‘제2의 인류’, 즉 기독교인이라는 새로운 인간 유형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실현해 보이신 이가 예수다. 신이 인간이 된 성육신, 죽어서 다시 사는 부활 등은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것인데 가능성을 열었고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다. 그래서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요 혁명의 종교다.

욥의 이야기도 죄 없는 자가 당하는 고통의 문제, 하나님의 부조리로 보인다. 그러나 욥은 단순히 부조리의 문제가 아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욥까지 700~800년 정도 시간차로 보는데, 그 사이 인간은 더 반성적이고 깊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욥은 부조리의 문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따져 묻는다. 정말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좀 보자는 거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다른 부분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만났지만 욥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 전해 들었을 뿐이다.

욥에게 닥친 고난에 대해 세 친구가 하나님의 징계라고 주장하자 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꿋꿋하게 내세운다. 욥기는 전부 42장으로 돼 있는데 그 가운데 2/3가 욥과 친구들이 벌이는 길고도 치열한 논쟁이다. 욥의 주장은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후라는 청년이 나타나 욥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한 것이 의롭지 못함을 지적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기를 권한다(욥 32:1~37:24). 그때 마침내 하나님이 욥 앞에 나타난다. 그제야 욥은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고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고 자신이 장황하게 늘어놨던 말들을 딱 접고 회개한다(욥 42:1~6). 견신(見神), 이것은 우리 삶에서 늘 당면하는 문제가 아닌가.
 

▲ <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 생믿음, 하나님과의 땀내 나는 씨름

△ 욥의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을 멀리 있는 숭앙의 대상이기보다 삶의 문제에 있어 함께 씨름하는 존재로 보인다.

- 그렇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께 “좀 봅시다” 한다(웃음). 믿음이란, 삶에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땀내 나는 씨름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과정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것 같은 때도 있다.

욥을 보면 헤르만헤세의 시 ‘기도’가 떠오른다. ‘주여, 나로 하여금 나에게 절망하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시는 ‘왜냐하면 나는 기꺼이 멸망하고/또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만/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끝맺는다. 죽음도 멸망함도 기꺼이 견딜 수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보고야 그리할 수 있다는 욥의 가련한 열망을 시에서 읽게 된다. 이는 또한 삶의 수많은 문제 앞에 선 우리의 기도이기도 할 것이다.

욥은 많은 말들을 쏟아내면서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재산이나 사랑하는 자녀들을 돌려달라거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것이 당신이 하신 일이라면 난 기꺼이 견딜 수 있다는 거다.

칼빈은 욥기 강해 설교를 평생 159번이나 했다. 칼빈이 욥기 설교에서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순종, 즉 ‘하나님 앞에서 침묵’이다. 그는 욥기를 통해 우리가 고난당했을 때 왜 입을 막고 침묵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고난에 당면한 우리의 울부짖음에 침묵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요점은 하나님의 섭리에는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선하게 이끌 것이라는 것이다. 섭리가 함께한다는 점에서 고난은 의미 없는 고통과 다르다는 것이다.

반면에 해방신학의 기틀을 다진 가톨릭 사제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와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다르게 말한다. 인간의 사회적 고난과 부조리함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욥처럼 강렬하게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보다는 이것도 취하되 저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칼빈의 말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는 침묵하고 성찰하면서 그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조리로 파악되는 죄 없는 자의 개인적·사회적 고통에 대해 ‘사람들 앞’에서는 외치고 저항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과 사회를 점진적으로 성화시켜가야 한다는 것이다.
 

△ 견신의 갈망과 경험이 있으신지?

- 1988년 독일 유학시절 아내와 함께 타고 있던 승용차가 화물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오랫동안 쌓아온 것들이 무너지는 건 0.1초도 안 걸리더라. 둘 다 큰 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이 욥이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다 끝났다고 절망한 나에게 한 노신부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당신은 하나님을 경험했지 않은가”라고 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순간에 ‘하나님의 큰 손’이 우리를 살렸다는 것이다. 그때는 ‘저걸 위로라고…’ 하며 황당했는데 일흔을 바라보는 요즘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사람들은 무수히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깊이 성찰하기보다 우연으로 합리화하며 보편의 이야기로 만든다.
 

△ AI 시대에 돌입하면서 신의 존재 의미와 인간의 가치가 상실되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것 같다. 이런 때에 책은 신의 존재를 추적하고 있다.

- 당대 최고 섹시 여배우로 꼽히는 안젤리나 졸리가 2013년 유방절제수술을 했다. 유전자와 질병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다차원적 데이터 분석에서 그가 70세까지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63%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지금 기독교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유발 하라리가 <호모데우스>(김영사)에서 제시한 ‘데이터교(Dataism)’이다. 세상은 데이터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며 인간도 그에 맞춰 새로운 인류인 ‘호모데우스’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자아와 의식도 결국 알고리즘에 불과하기에 인간의 선택, 행동도 모두 개인의 데이터에 따라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얘기다.

내가 얼마나 데이터교에 발을 깊이 들여놓고 있는지는 스스로 점검해보면 알 수 있다. 어디 가서 무엇을 먹을지, 무슨 책을 읽을지, 여름휴가에 무엇을 할지, 일상의 선택을 데이터에 맡기고 있지 않은가. 내가 페이스북에 선택한 ‘좋아요’ 70개면 데이터가 친구보다 나를 더 잘 파악하고, 300개면 가족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거다. 자신의 진로와 결혼 대상자도 데이터에 의존하는 현실이다.

기독교를 무너뜨릴 종교는 이단이나 사이비종교가 아닌 바로 ‘데이터교’이다. 기독교인들도 한 달에 십일조 못지않은 돈을 데이타 사용료로 지불하고 있는 것을 본다. 과거에는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물었고, 현대에 와서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은 하나님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묻지 않고 데이터에게 묻는다. 이게 데이터교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신이 된 인간을 뜻하는 ‘호모데우스’는 데이터 알고리즘을 통해 극소수가 신처럼 세계를 지배하고 나머지 70억의 절대다수는 실패자로 살아가는 계급사회가 형성되면서 역사는 종말 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의 최정점은?
 

△ 데이터교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노르망디에 위치한 베크 수도원의 부원장이자 수도원학교 교장이었던 안셀무스는 1077년 출간한 그의 책 <모놀리기온>의 첫 문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존재하는 것들 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이 존재한다’고 썼다. 그것을 더 풀어서 ‘최고 본질, 최고 생명, 최고 이성, 최고 행복, 최고 정의, 최고 지혜, 최고 진리, 최고 선성, 최고 위대성, 최고 미, 최고 불사성, 최고 불변성, 최고 복락, 최고 영원성, 최고 권능, 최고 일자성(일자(一者性)’이라고 칭송했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의 최정점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서방신학의 틀이다.

그렇게 중세까지 이어오던 기독교적 신본주의를 근대가 시작되면서 밀어치우고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가치들을 내세웠다. 16, 17세기에 과학혁명이 일어났고, 18세기 계몽주의, 19세기 산업혁명에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인본주의적 가치관으로 유토피아를 추구한 400년 동안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자연은 파괴되고 사회는 무한경쟁의 지옥으로 치달았다. 쾌락적일지는 몰라도 행복과는 거리가 더 멀어졌다.
20세기 중반에는 탈포스트모더니즘이 나왔다. 획일성을 부정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개인과 일상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개인과 일상에 대한 관심이 근대 인본주의가 가졌던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대형서점의 인문학 베스트셀러 목록만 봐도 대개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내용의 책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이 세상의 한쪽에서는 온갖 음식을 탐닉하는 데 빠져 있는데 지구상에는 5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작은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더 이상 ‘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의 정점이다.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를 밀어내고 나왔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를 배제한 인본주의가 어떻게 가능한가. 인본주의를 배제한 개인적 가치도 진정한 탈근대화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모순이다.

나는 신본주의적 가치를 제일 큰 테두리로 밑바닥에 놓고 그 위에 인본주의 가치를 세우고, 또 그 위에 탈근대의 개인적 가치를 세운다면 비로소 인본주의와 개인적 가치도 제대로 설 수 있다고 본다. 온전한 가치의 정립만이 호모데우스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그것은 당연히 신본주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책의 연작으로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책도 준비하고 계신 것으로 안다.

- 서양문명을 성서나 신학의 언어가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조명하면서 세 권을 계획했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 하나님에 대한 책에 이어 ‘그리스도’에서는 죄와 구원, 성화, 칭의 등에 대한 부분이 되겠고, ‘성령’은 사랑에 관한 내용으로 준비하고 있다. 책 출판은 출판사와의 협업이기에 시기를 보고 있다.
책이 신의 존재에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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