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신학과 인문학을 가로지르며 창의적인 글을 쓰는 차정식 교수(한일장신대)

헤브라이즘의 하나님은 굉장히 창의적이고
역동적이고 포용적, 언약 중시하면서도 욕망에 대해 관대하다.

 

▲ 전주 한옥마을 명륜당 앞에서의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의 초빙으로 미국에서 온 지 20여 년.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코믹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 학위를, 시카고대학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학부 교수로 한일장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예수, 한국 사회에 답하다>, <기독교공동체의 성서적 기원과 실천적 대안> <쩔쩔매시는 하나님>, <예수 인문학> 등 20여 권의 단독저서를 포함, 공저까지 합하면 50여 권의 책과 130여 편의 논문을 생산했다. 그 가운데 차 교수는 신학과 인문학을 가로지르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글쓰기로 성서신학을 일상과 사회, 문화의 영역과 연계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미국장로교회(PCUSA) 소속이어서 그런지 교단 신학자들이 말하기 꺼려하는, 그러나 해야 할 이야기들을 담담히 풀어낸다.

더불어 전주 시내에 있는 열린가정교회(독립교단) 설교목사로 14년째 사역하며 평신도들이 주도적으로 예배 사회, 설교, 각종 순서에 참여하며 교회운영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반도 남단의 금오도 섬에 조촐한 쉼터를 마련하여 그가 가르치던 제자들이 농어촌, 오지 선교 등에서 많은 고생을 하다가 안식이 필요할 때 잘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5월 초 전주에서 만난 차 교수와 한옥마을을 거닐며, 차향 속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 한국교회에 여러 문제들이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헬라적 사고에 갇혀 있어서 하나님을 어느 부분에서는 제한했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이 아람어로 씐 것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원초적으로 예수님이 가지셨던 뜻이 왜곡되거나 소화가 덜 되어서 그런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사조가 성경 안에 소용돌이치면서 만났다. 사실 구약성경에도 후대 문서로 갈수록 헬레니즘과의 접촉 흔적이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신약성서는 헬라어로 씌어졌고, 바울은 헬레니즘 문화에서 성장하여 신약성서의 저술과정에도 그 정신사적 편력이 자연스럽게 반영됐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도 바울도 유대교의 배경 속에 있기에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씌어졌지만 그 내용 깊숙이 헤브라이즘의 전통이 스며있다고 봐야 한다.

히브리 전통 속의 하나님은 굉장히 창의적이고 역동적이고 포용적이다. 전도서나 아가, 시편 등 구약성서의 다양한 양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제반 경험과 관심사가 솔직 담백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신실한 언약을 중시하면서도 인간의 욕망에 대해 관대하다. 토라를 엄중하게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의 순종을 강조하면서도 전도서나 시편 등에 보면 다양한 인간 삶의 영역과 그 다채로운 경험이 신앙적으로 투사되고 수용된 측면을 볼 수 있다. 이것을 강조하면서 저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를 경고하고 심판을 예고하면서도 인간의 연약함과 고뇌와 탄식과 좌절 등 인간의 실존적인 경험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잃지 않고 넉넉한 자비와 긍휼함을 드러낸다.

어쩌면 헬레니즘 사상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경직되게 만든 것일 수 있다. 서구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특히 그 초반기에 신플라톤주의의 이분법적인 사고 등이 신약성서 속에 들어와 있다. 성서 형성기와 그 이후 시대에 헬레니즘은 신화적 상상력 속에서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수렴하지 못한 채 형해화, 즉 뼈다귀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2천년의 역사가 만만하지 않다. 뛰어난 신학자나 영성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안 되는 것을 취사선택해서 이게 최고니 정통이니 하면서 다른 것을 배타적인 것으로 만들다 보니까 인간의 삶이 옹색하고 쪼잔해진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우주적 충만함의 스케일이 우리의 일상적 상상력 속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정치적 세력다툼이나 교리적 논쟁으로 편을 가르고 끝내는 죽음을 불사한 전쟁의 상황으로까지 가지 않나.

 

△ 그런 측면에서 많이들 얘기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헬레니즘적 사고가 그런 영향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 그렇게 보는 이들도 있다. 예수님이 외친 복음의 본질이 바울이 헬레니즘 틀 속에 신화적인 메시지로 단순하게 도식화하는 바람에 바울의 복음이 결국 우리 기독교 신앙을 예수로부터 소외시킨 퇴행적인 흐름이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바울의 신학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바울서신 안에 초대교회의 파란만장한 격동이 담겨 있고, 그것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보려 고군분투했던 선교사, 목회자, 신학자로서 바울의 진정성이 있다. 물론 그분의 어휘와 개념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고, 이분법적인 요소도 없지 않다. 일부 소수 학자들은 영지주의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바울은 당대 사상을 기계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변용하면서 그리스도 사건과 융합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기독교적인 신앙의 맥락에서 이질적이고 외부적인 것들을 기독교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창조적으로 재구성해내면서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예컨대, ‘속사람’(ho eso anthropos)이라는 희랍어 개념은 플라톤이 먼저 사용한, 동일한 표현이지만 바울은 이를 다른 맥락에서 다른 방향으로 전유하였다.

사상적 흐름은 장벽이 있다고 갇히는 것이 아니고, 물이 흐르듯 언어를 매개로 흐른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적 바울을 강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바울에 의해 변질됐다는 주장이 있지만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배타적으로 단절됐다는 해석은 과장된 것으로 본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달랐고, 자라왔던 환경이, 지향했던 목적과 목표가 달랐을 뿐 연속성이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바울의 독창성 속에 융합, 용해된 것이다.

예수를 깊이 이해하고 그의 인격과 행적, 가르침에 감응하고 감동할수록 바울 서신서의 신학적 세계와 삼투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양자 모두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선교적 열정, 공동체를 세우고 하나 되게 하려는 헌신적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행간을 깊이 읽어가며 탐구하면 할수록, 그 심연의 영역에서 예수님과 바울은 만난다.

그런데 우리가 심연으로 내려가길 꺼려하고, 틀지어진 얼개 속에서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남들이 들려주는 것에 매여서 바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유 안에서, 만유 가운데, 만유를 넘어 그 가운데 충만하게 하는 무한의 비전을 가지고 열린 해석을 하지 못하니까 신학적 사유의 비전이 편협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빈곤한 신학적 현장으로 인해 목회 현장도 고작해야 파워 게임, 자리다툼, 큰 교회 가졌다고 식구들끼리 나눠 갖는 유치한 짓을 하는 것 아닌가.

영원한 하나님을 향한 무한과 충만의 신학적 상상력을 결여한 것이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무관하게 엇나가고, 본질로부터 이탈하고 그 핵심으로부터 소외되게 하는 오늘날 현실의 배경과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은 선한 자와 악한 자,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햇볕을 비추는 무한의 하나님 같이 무한과
자유, 충만의 품을 목표로 온전하라는 것이다.


△ ‘무한과 충만의 신학적 상상력’은 어느 지경을 말하는 것인가. 사실 목회자들이 많이 분주한 상황이다. 교수님의 많은 책들에서는 사색의 중요성도 말씀하시는데 현장 목회자로서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신학자들이 새로운 지평을 가르치려는 풍토도 쉽지 않다. 신학적 상상력이 발휘되기 어려운 신학대학의 환경인 것 같다.

- ‘무한과 충만의 가치’는 예수님의 신학에 가장 중요한 알짬이다. ‘imitatio Dei’, 즉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왜소해진 우리 인간들,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크리스천, 목사들에게는 무한과 충만의 하나님을 품고 그런 신학적 상상력으로 몸부림을 쳐야 족쇄 채여 사는 노예적 인습의 틀을 탈피하거나 적어도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을 존재론적인 완벽함으로는 해석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희랍어로 ‘teleios’인데 그 어원인 ‘telos’는 완성, 끝, 목표라는 세 가지 뜻이 있다. 목표를 향해 완주하라는 것이다.

선한 자와 악한 자,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리지 않고 그 경계를 넘어 모두에게 햇볕과 빛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은 경계 없이 행보하시는 무애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을 닮아 이 땅의 각종 배타적인 경계에 갇혀 살면서도 무한과 무애의 하나님 같이 열린 자유의 품, 충만의 품을 목표로 온전하라는 목적론적인 지향을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familia Dei’라는 또 다른 예수의 유산을 주목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으로 사유와 행동의 폭을 넓혀야 한다. 혈통 가족을 넘어서고, 각종 식물과 동물까지도 이웃생명으로 환대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에서 바울은 피조물에 인간뿐 아니라 다른 피조생명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렇게 관계의 외연을 확장해나간다면 인위적인 것이나 사소한 것에 눌리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자신을 속박하는 여러 가지 ‘마음의 감옥들’에서 자신을 해방하려는 도약의 몸짓, 마음짓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 신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지나쳐 하나님의 사랑이 기독교인들에게만 비춰지기를 갈망하는 모습들을 보이곤 한다.

- 교리적으로는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으로 말하기도 한다. 두 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고 우주적인 무한과 충만 속에 함께 만나는 것이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언약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는 정체성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무한과 충만의 하나님이라는 궁극적인 관점을 놓고 보면 한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이라는 것도 시간과 역사 속에 소용돌이치며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함을 인식해야 한다.

야곱은 팥죽 스캔들로 집을 떠나 광야에서 살면서 꿈에 주의 사자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서 ‘여기도 하나님이 계셨구나’ 하는 깨달음을 고백한다. 그 이전에는 자기의 식구들, 그 씨족의 동네, 그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하고 경험되는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공간의 확대로 광야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인식의 확장이 생긴 것이다. 요나서에는 민족을 멸망시킨 앗수르 원수의 나라의 지도자, 백성과 가축들까지도 불쌍히 여기시는,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을 보여 준다. 글로벌한 시대, 우주적 시대에 우리가 여전히 씨족 신으로 믿던 인식의 틀에 붙들어 매어 있어서야 되겠는가.


무한하게 열려있는 자세는 인간과 하나님을 깊이 배우는 계가가 된다.
제대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뒤집어서 성찰할 수 있는 신학의 힘을 길러야

 

△ 타종교에 대해서도 굉장히 열려 있는 것 같다.

- 일단 모르니까 열린 자세로 공부하려 한다.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나와 종교가 다르다고 원수시하면 되겠나. 3천 년 전에 진멸시키라는 것을 문자화하여 종교전쟁, 영적 싸움 하면서 타종교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하는 것이 온당한 사고에 기초한 것이냐를 봐야 한다.

우리 양심 속에 하나님의 창조 신학이 전제된다면 타인을 향해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신앙은 타인을 얼마나 품고 사랑하고 포용하느냐 하는 것으로 증명돼야지, 증오와 미움으로 하면 이미지만 망치고 전도길이 닫히지 않나.
 

△ ‘목사와 목회의 병통’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이 많이 가면서도 슬펐다. 담담한 필치로 우리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부분, 그리고 답이 안 보인다는 진단에서는 막막함까지 느끼게 한다. 특히 목회자들의 입에 발린 상투적인 ‘동어반복’을 지적하셨다.

- 그 글을 쓴 배경은 제가 상투적인 것을 싫어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동어반복의 사용은 제도권의 모범생 틀의 교인에게는 안정감을 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고착되면 창의적인 삶에 걸림돌이 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동인형처럼 전락해 틀에 박힌 사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타락시키고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도 땅에 파묻은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낭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예찬하는 존재인데 너무 틀에 박혀 자유롭게 내면을 표현하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폐쇄적 내면이 안타깝다. 마치 연극배우가 내면과 상관없이 연기하는 것처럼, 외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세상의 여러 현상을 싫어한다.

오늘날에는 사회적 성원으로 살아남기 위해, 또 무난하게 일상을 순항하기 위해 누구든지 패르소나라는 가면을 쓴 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존재론적 조건에 대해 스스로 비판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 가면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고 넘어서려는 일상의 실천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세밀한 성찰적 자의식이 퇴화되다 보니 상투적 매너리즘과 그 인습적 틀을 넘어서려는 의욕이 좀처럼 활성화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섬세하게 관찰하면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찬하는 심미적 감수성도 살아나지 못한다.
 

△ 목사님들이 그런 교수님의 지적에 대해 불편해하지 않나.

- 사람들마다 제각각 다를 것이다. 제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소문의 벽에 부대껴 메아리치는 이런저런 내용을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대하는 분들은 사실 제 책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또 그런 불온한 인식을 가지고 내가 제시하는 대안적 세계에 입문하는 것이 목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현장 목회에서는 비슷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인생살이가 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러나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분들이 꽤 많으리라 믿는다.

 

△ 편한 인생살이를 추구하기만 하면 퇴보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선진들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았는데, 성찰은 하지 않고 좋은 게 좋다고 나아가면 너무 무책임한 것 같다.

- 일각에서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현실과 달리 나는 많은 목회자들도 삶의 궁극적인 관심사에 대하여 여러 모로 고민하고 성찰할 것이라 생각한다. 상투적인 것에 매어 있는 것 같아도 누구든지 자유롭고 싶어 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모두 가지고 있다. 다만 교회라는 제도권 조직 내에서 무탈하게 생존하고, 남들보다 더 화려하게 성공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일탈적인 모험과 탈주의 의욕이 생겨도 그것을 절제라는 미명하에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고 해오던 대로 해나가는 관성이 우리를 자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나이가 오십 세 넘어서면 대개 해오던 관성대로 편하게 안분지족(安分知足)하고 싶어 한다. 문제를 일으켜 피곤하게 하지 않으려 한다. 노화를 겪으면서 몸만 퇴화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이나 영적 싱싱함도 다운되고, 게다가 믿음도 약화된다. 더 나아가 육칠십 세쯤 되면 좋은 조건으로 은퇴하고 싶어 하고 어떻게 추하지 않게 잘 마무리할까 하는 생각들이 많은 것 같다. 몸이 약해지는 이즈음 또 죽음에 대한 자의식이 예민해지면서 슬슬 관성에 찌들어서 신앙과 영성조차도 퇴락해가면서 추해지기 쉽다. 성찰적 자의식의 끈이 헐렁해지고 심한 경우에는 그 끈을 아예 놓아버리고 점점 더 뻔뻔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평상시 기도와 묵상, 성찰의 노력으로 축적해온 고도의 영적 내공이 없으면 이런 파국을 제어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과 끝까지 싸우는 분이 더러 있는데 나는 그게 아름답고 멋있어 보인다. 자기가 살아온 색깔을 내면서 늙어서도 품위 있고 덜 추해지고자 애쓰는 분들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 욥과 유마경에 대해 비교헤 말씀하시면서 유마경이 훨씬 더 고귀한 것으로 보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 문학비평가 고 김현 선생의 책을 통해 유마경을 알았다. 불교에도 심오한 세계가 있고 특히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함을 보인 그 수행자들을 통해 많이 배운다. 유마경은 인간의 질고에 대한 성찰을 통해 불교 나름의 구원론과 성육신 신학의 한 도저한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유마힐 거사는 ‘이 세상이 온통 병들었는데, 어찌 나 홀로 멀쩡할 수 있겠는가’라는 성찰적 질문 가운데 고난 투성이의 세상과 더불어 고난 받으며 그 병을 자신의 몸으로 기꺼이 앓고자 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도저한 고난 이해는 충격적인 만큼 신선하다. 욥기를 거쳐 제2이사야를 경유한 고난 이해는 기독교의 고난 전승에 신학적 물꼬를 대면서 그 앎의 실험을 풍요롭게 했다. 그러나 개인적 고난의 기원을 묻는 노력과 고난 받는 자의 실존을 분리시키는 이러한 기독교적 고난 신학은 양자를 통합시켜 병든 세상의 일부가 되어 더불어 아프고자 하는 유마경의 세계에까지는 다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판단되었다.

 

△ 하나님을 덜 찾자, 덜 귀찮게 하자는 대목을 보면서, 목사님들과는 좀 다른 측면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 길희성 교수의 ‘하나님을 놓아주자’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놓아두자는 주장에 역설적인 일리가 있다고 봐서 쓴 글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혹 우리가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을 찾는데 정작 하나님은 그러한 유치한 반복적 행태를 귀찮아하는 건 아닐까. 자녀가 클 만큼 컸는데도 여전히 응석받이처럼 굴 때 느끼는 그 부모의 짜증처럼 말이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란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온갖 강박으로부터 홀가분한 영혼으로, 성령의 바람처럼 살고자 비상하고 도약하고자 애쓸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체로 우뚝 서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며 그 삶을 선물로 주신 창조주의 목적에 걸맞게 풍성한 삶으로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무조건 열심히 모여서 예배 많이 드리고 많이 기도하는 것이 자칫 예배·기도 물량주의로 흐를 수 있다. 자본주의의 물량주의적 병폐가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을 오염시키고 퇴색시키는 측면은 없는지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 교수님도 많은 책을 쓰고, 많은 이들에게 도전도 주고 있는 것으로 안다.

- 사실 저는 대학시절부터 문학을 좋아해서 이청준의 소설 등을 통해 나름의 독서경험을 통해, 또 청춘의 방황 가운데, 인간의 감추어진 내면, 복잡하게 뒤엉킨 그 욕망의 세계에 대하여 풍부한 생각거리를 얻었다. 직관적 통찰을 제공하는 시를 좋아하며 그 가운데 인간의 만화경을 탐구하고 배웠다. 이때의 경험과 독서가 밑천이 되어 몇 년 전 <시인들이 만난 하나님>이란 책도 썼다. 이런 문학세계는 인간의 감추어진 심연에 대한 다양한 인문학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신학적 감수성의 보물창고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책 읽고 쓰는 것을 너무 많이 한 것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고 있다. 전도서의 탄식대로 헛된 것을 생산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쓴 것 같다.

예외 없이 자기중심적인 것이 인간이다. 누구나 자기 정당화를 교묘히 잘 한다. 그래서 자신의 견고한 믿음의 체계까지도 회의적으로 분석하고 치열하게 도전하여 그 바탕을 비워내는 영성, 충만이 아니라 비움의 영성을 강조하고 싶다. 인간은 자기 의에 대한 집착이 끈질긴데, 이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탄력적 태도가 필요하다.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을 닮아간다는 지적을 잘 귀담아 들어야 한다. 개혁을 주창하는 이들 속에서도 내면이 공허하거나 심지 황폐한 상태에 처해 허우적거리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럴 때일수록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는 태초의 상상력이 도움이 된다. 그것은 물론 언제나 종말의 신학적 상상력과 맞물려 있다.

 

△ 현실적으로 목회자들이 많이 분주한 형편에서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폭을 넓히기에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 우리의 평정심 가운데 하나님의 무한과 영원을 향해 열려 있는 자세는 인간과 하나님을 깊이 배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란노서원’의 ‘서원’은 희랍어 ‘schole’로 여기에는 ‘학교’ ‘학당’이라는 의미와 함께 ‘여유’ ‘여가’(leisure)라는 뜻도 있다. 여유가 있어야 차분한 맘으로 공부할 수 있다. 사람이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일상의 반복적 삶의 패턴에서 떠나 차분하고 여유롭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통해 일상생활을 성찰한다. 신학도는 성경에 대한 체계적인 사유와 묵상을 통해 그 신앙생활을 한 번 더 뒤집어 성찰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게 바로 신학 공부이다. 이렇게 말씀에 비추어 모든 세상사와 인간사를 뒤집어서 성찰할 수 있는 신학의 힘을 길러야 한다. 동물적 본능에 치중하는 삶, 거기에 의존하는 상투적 신앙의 버릇으로는 성찰이 어렵고 변혁은 거의 불가능하다. 성경을 읽는 만큼 한 달에 한두 번 신간 도서나 고전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저 개인적으로는 인간사의 다양한 양상을 투사해 보여주는 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를 보는 것이 인간세계의 천차만별과 그 무궁한 이치를 살피고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됐다.

또 한국교회가 개혁되려면 설교를 줄여야 한다. 맨날 비슷한 버전의 개혁담론을 주워섬기며 ‘개혁’을 복창한다고 개혁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 합의하여 개별 교회 단위로 실현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5개, 또는 10개 정도의 개혁 아젠다를 서로 나누며 그 열매를 매년 점검한다면 차라리 더 실속 있는 개혁의 희망이 생길 것이다. 한국교회에 수많은 종류의 다양한 교회들이 공존하고 있다. 제주도만 해도 450개의 한국교회가 있다. 어떤 한국교회에 어떤 처방이 개혁을 위해 필요한지 막상 현장에 박치기 하다 보면 다양한 편차를 보일 것이다. 물론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도 있을 텐데, 가령 빤한 논리로 겉도는 기복주의 신앙 패턴을 바꿔가야 하고 기독교 신앙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똬리를 틀고 있는 여러 미신적인 인습의 잔재들도 과감하게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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