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6월호>, 과거 교회의 민족화해 역할 조명

▲ 기독교사상 6월호

<기독교사상 6월호>는 호국보훈의 달, 민족화해의 달 6월을 맞아 ‘통일운동으로서의 평양 방문’을 특집 주제로 정하고 과거 평양 방문을 통해 평화를 이루려 했던 시도들을 재조명했다.

유신독재시절인 1972년에 이루어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평양 방문과 그로 인해 세상에 나온 ‘7·4남북공동성명’에 대해 성격과 그 결과를 정리한 김지형 교수(서원대학교)는 냉전의 완화(Detente), 미국 측의 대화 종용 등의 국제적 배경과 선의의 체제 경쟁을 모색하던 국내적인 배경이 있었음을 밝힌다. 김 교수는 이후락의 방북과 공동성명 발표가 이후 남측에서는 ‘유신으로의 일대 개혁’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미치고, 북측에서는 최고인민회의에서 주석이 최고의 국가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등 지배자의 권력 강화 측면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1979년 불발에 그친 김재준의 ‘방북 기획 사건’을 다룬 고지수 박사(성균관대학교 출강)는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그가 토론토에서 방북을 계획하게 된 배경을 해외 민주화세력의 움직임과 연관해 설명한다. 해외 민주화세력을 한자리에 모으고자 열린 ‘한국문제 세미나’ 참석을 계기로 김재준 목사가 서독으로 출국하고, 이어 스위스 북한대표부를 방문해 방북 약속을 하게 된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방북 계획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적극적 반대, 북한대표부로부터 받은 방북 자금, 소위 ‘미화 7,000불’이 이후 어떤 갈등을 불러일으켰는지를 흥미 있게 소개한다.

1989년 문익환 목사의 평양 방문을 다룬 이유나 박사(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는 문익환이 방북을 결심하게 된 국내외적 배경과 동기를 여러 측면에서 살피고, 방북에 동행한 유원호, 정경모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이후 평양에서 조평통 및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 내용과 쟁점 등을 알기 쉽게 논했으며, 이로 인해 발표된 ‘4·2공동성명서’의 내용과 거기에 나타난 문익환의 협상 성과를 항목별로 다뤘다. 방북 이후 남한 사회와 기독교계의 반응을 통계로 설명하면서, 그의 방북이 당시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으나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는 대중의 평가를 받은 사건이었다고 분석했다.

이 외에도 ‘제주4·3사건, 70년이나 머뭇거린 만남과 화해’은 제주에서 현재 목회하며 제주NCC에서 활동하는 김인주 목사가 4·3사건을 알기 쉽게 정리하고 70주년을 맞아 일어난 일련의 행사를 스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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