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의 아시아를 향한 갈망
 
  페르시아는 아시아 사상을 대표한다. 유럽의 아들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가 쉬라즈(Shiraz)에 있는 다리우스 궁을 짓밟았다. `대왕'이신 다리우스의 천하가 무너진 것이다. 쉽게 생각했던 싸움에서 패전을 한 다리우스 3세는 퇴각을 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을 부대를 수습해야 했다.
 다리우스 3세와 알렉산더의 최후 결전은 `이수스 전투'이다. 지금의 터키 땅 바울의 고향 다소와 아다나 시의 중간 지점인 지중해 변에서 지구상 전투의 최대의 결전이 벌어졌다. 뒤로는 타루스 산맥을 배경으로 한 유럽과 아시아의 최종 갈림길인 이수스에서 다리우스 3세는 또다시 무너졌다. 근접전에 능한 알렉산더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는 퇴각하면서 그가 노모와 아내, 그리고 자식들까지 함께 머물렀던 `대왕의 군영'을 뒤로 하고 혼자서 줄행랑 치듯이 떠났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한 최강제국의 황제가 총사령관 자격으로 전투를 하다가 노모와 처자식을 군영 안에 남겨두고 퇴각한 행위를 `줄행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어도 결례는 아닐 듯 하다.
 얼마나 급했을까? 알렉산더가 다리우스 3세 군영에 뛰어들어살피니 다리우스 황제의 늙은 어머니와 처자식들이 살려달라면서 빌었다.
 알렉산더는 걱정말라. 당신들을 상대하러 온 것이 아니니 안심하라. 너희들 목숨은 안전하니라. 이같은 말을 남기고 다리우스 3세를 추격했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더가 손을 쓰기도 전에 그의 부하장수의 손에 의해 피살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그의 사체 앞에 무릎 꿇어 세계 최대제국의 황제(대왕)에 대한 예를 표시했다. 알렉산더의 점령전쟁은 계속되었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역을 지나 인도 라호르까지 갔다. 인다스 강줄기를 바라보면서 그는 발걸음을 일단 멈추고, 곳곳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으로 도시를 건설하였다.
 알렉산더는 단순한 점령군주가 아니었다. 그가 중앙 아시아 지대인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까지 진격한 자료를 살피면 문명 외곽지대까지 기의 세력을 뻗친것으로 나타나지만 점령이 아니라 문명을 심어가고, 더 나은 문명을 배우고자 하는 탐구의 길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더의 아시아를 향하는 자세는 `점령자'로서가 아니라 `문명의 갈망'때문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의 부하참모들이 보잘 것 없는 땅을 향하여 무리한 진군을 한다고 항의를 할 때면 `너희는 나의 아시아에 대한 갈망을 모른다'며 핀잔을 주곤 했었다.
 알렉산더는 역시 아리스토텔레스 제자로서 철학도답다. 그는 전쟁터를 달릴 때도 그의 말 안장 밑에 그의 스승의 철학책을 가지고 다녔다던데 정말 그의 눈에는 아시아(페르시아와 인도)는 지혜의 땅이요 선망의 도장이었다.
 알렉산더 뿐이 아니다. 필자는 금번 여행중 `우르미에'를 거쳐서 `타브리즈'로 갔다. 가는 도중 고산지대인 `마쿠'에 들렀다. 마쿠에는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하나인 다대오 기념교회가 있다. 지금은 유적지로 남아있으나 한때는 왕조가 있던 곳, 다대오 기념교회는 매년 7월이면 아르메니아 교회 신자들이 수천명 단위로 찾아와서 며칠동안 야영을 하면서 수련회를 하는 곳이다.
 다대오의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 `마쿠' 지역은 우랄투 왕국이 있었다. 왕이 병이 났는데 예수께서 병을 잘 고치신다는 소문을 들은 왕이 예수님을 초청했다. 그때 다대오가 예수를 대신하여 이곳 마쿠에 와서 왕의 병을 치료하였고 그때 이곳 마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우리는 마쿠를 떠나 `타브리즈'로 갔다. 타브리즈에는 요즘 새롭게 증명하는 `에덴'설이 있는 곳이다. 에덴이 어디냐에 대한 많은 견해가 있으나 금번 영국 탐사팀의 자료에 의하면 창세기 2장 4절 이하의 말씀 중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된 강들, 비손강^기혼^헷데겔^유브라데 강의 흐름에 기준한 지역을 찾았다고 한다. 발견과정에서 놀라운 것은 이스파한의 `이맘광장'과 인도 아그라의 `타지마할 궁'에서 매우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이맘광장과 타지마할 궁 정원의 설계를 보면 4개의 강이 동산을 중심하여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얻은 자료에 의하여 지역설정을 하니 `타브리즈'가 선택이 된다(이는 이슬람 자료, 고대 수메르 자료, 길가메시, 사르곤 왕 이야기,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 등 자료들 간의 갈등을 극복한 것이다).
 아직은 학설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이란의 이스파한(테헤란 다음으로 큰 도시)의 이맘광장과 인도 무굴제국의 샤 자한의 타지마할 궁 정원이 에덴의 축약도였다면 저들 이슬람이 지켜내는 성경의 유적 보존력은 탁월하다.
 이는 예루살렘의 성전터 중간에 있는 `모리아 언덕'임을 소홀히 했다가 그곳, 그 큰 의미가 있는 터전을 이슬람에게 빼앗긴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왜 건성일까? 모리아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무함마드가 이슬람 창교 전 청년시절 예루살렘에 순례 왔다가 발견했다는 모리아, AD 70년 로마의 디투스(디도)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시켜버린 뒤 공터로 남아서 쓰레기장이 되다시피 600여년 가까이 버려진 그 땅이 `모리아 언덕'임을 무함마드는 알고 있었고, 그의 발바닥 도장을 찍어 놓았다.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 너희 발바닥으로 밟은 곳은 다 너희 땅이라 하는 법칙을 따랐을 것이다(수 1:3 참조).
 그리고 그들은 무함마드가 죽은 뒤 칼리파 오마르가 그곳, 모리아 언덕이요 솔로몬 성전 터 위에 `오마르 사원', 곧 이슬람 모스크를 지었다. 지금 예루살렘에 가보면 황금돔이 반짝이는 그 자리 그 사원이 일찍이 무함마드가 점찍어 둔 아브라함 신앙의 중심이요 이스라엘 민족의 거룩한 터전이며 세계의 중심인 그 자리에 이슬람은 그들의 성지를 일으켰다.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이 그들의 성지이다. 여기에는 1, 2, 3번의 순위가 없다. 동일한 저들 이슬람 성지이며, 세계 각 처에서 살고 활동하는 무슬림들이 하루에 다섯번 성지를 향하여 기도하는 곳 중에 예루살렘도 해당한다는 사실을 기독교나 유대교 사람들은 알고 있어야 한다.
 이같은 이슬람의 성격을 알기에 우리는 상당한 신뢰를 하면서 `타브리즈'로 향했다.
 에덴이라 하지만 6, 7천여년 전의 옛터전이고 보니 신비한 풍광은 아니었다. 터키의 갑바도기아처럼 산언덕에 일명 비둘기 집들이 있다. 그런데 갑바도기아는 빈터로 남아 있으나 이곳 옛 에덴이라 하는 타브리즈의 `찬드번' 언덕에는 산언덕 웅벽을 파고 들어가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람 뿐 아니라 가축, 말, 나귀, 낙타들도 그곳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아, 에덴의 시절. 창세기시대 사람들이 살 때에도 돌집이나 토굴 속에서 살았을까? 우리는 산비탈 집들을 찾아갔다. 겉으로 보기와는 달랐다. 아늑하다. 실내도 밝고, 짐승들 우리도 굴 속이기는 하지만 역시 시야가 열리는 산 기슭이니 음습하지가 않았다.
 타브리즈 사람들은 매우 친근하다. 단순히 관광지 주민의 서비스가 아니라 몸에 밴 친절은 능동적 성품인 듯하다.
 이 선생은 안내를 하면서, 이곳 타브리즈는 영지주의(Gnosticism)의 발원지라고 말해준다. 영지주의는 조로아스터교 사상과 만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과도 만난다. 조로아스터의 아흐라 마스다, 그리고 `미트라'사상은 불교의 미륵과 기독교의 임마누엘 예수와 방불한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기독교 21세기 신자들, 특히 목회자나 선교사 및 전문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은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터키 일대와 터키에서 유럽 기독교와 아시아 기독교가 방향을 따로 잡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럽 기독교는 터키의 드로아에서 배타고 마케도니아로 가면서 알렉산더의 광채를 힘입어 유럽을 개척한다.
 그런데, 아시아 기독교는 터키에서 일단 수리아 안디옥을 비켜서 에뎃사(현 산 우르파)에 집결하여 지금의 이라크 땅 니스비시, 크데시폰을 경유하여 또 이란의 우르미에, 마쿠, 타브리즈와 이란(페르시아) 전역에서 활동하여 아시아 기독교의 터전을 잡았다.
 그러나 AD 640년 아라비아 이슬람이 크데시폰을 점령하고 AD 651년 경에는 페르시아(현 이란) 전역을 강점하게 됨으로 기독교 세력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를 통과 파미르 고원을 넘는다. 호탄과 돈황 일대에 새로운 터전을 삼았다.
 또 다른 아시아기독교는 페르시아 북부를 지나 우즈베키스탄 히바,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으로 전진하여 당시 소그드인들과 동행하여 맹렬한 선교를 하면서 중앙아시아 일대, 즉 우즈벡은 물론 타직스탄이나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과 키르키즈스탄을 경유, 현지에 자리하여 중국령 돈황까지 연결한다. 파미르를 통과하여 돈황일대에 자리한 아시안크리스찬(Asian Christian) 세력은 AD 635년 당나라 태종의 영접을 받으며 장안성에 입성을 한다. 그리고 황궁으로 들어갈 때는 당태종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인 방현령의 안내를 받는다. 그때 궁정 악대가 동원되었다. 그리고, AD 1401년까지 활동하다가 북방으로 또는 다시 페르시아까지 징기스칸의 몽골리안들과 뒤섞여서 아시아 기독교의 영고성쇠를 이루어 낸다.〈끝〉 조효근/본지 발행인
 
※ 9월말 경 이란과 중앙아시아, 또는 이란과 터키 동부를 잇는 방식으로 페르시아 시대의 기독교, 유대교, 조로아스터, 그리고 이슬람과의 관계된 기독교 역사 탐방을 계획하고 있다. 추후 일정을 지면에 공고, 뜻있는 동행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다.〈편집자 주〉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