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락/ 번역가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는 최종적인 심판을 받는 자들의 명단이 등장한다.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아니하는 자, 흉악한 자, 살인자, 음행하는 자, 점술가, 우상숭배자, 거짓말하는 자.

여기에 뜻밖의 사람이 들어 있다. 그것도 명단 제일 앞에. 두려워하는 자. 왜 그럴까? 그 다음에 나오는 ‘믿음이 없는 자’는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가는 곳이라 했으니, 믿음이 없는 자가 지옥에 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두려워하는 자가 지옥에 갈까? 그것도 일등으로!

이상하다. 불편하다. 아마도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세 번째 네 번째로 넘어가보자. 흉악한 자, 살인자. 남을 괴롭히고 죽이고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의문이 더 커진다. 도대체 두려워하는 자가 왜 여기 나와 있을까. 그것도 명단 제일 앞에. 두려워하는 자는 약한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은 오히려 불쌍히 여겨주고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로든 책으로든 <해리 포터> 아마 보셨을 것이다. 선이 굵은 인물이 많이 나오는 이 시리즈에서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인물은 웜테일이라는 별명의 악당, 피터 페티그루다. 웜테일은 해리 포터의 아버지와 친구였으나, 악당 볼드모트의 부하가 되어 해리의 부모를 배신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나중에 볼드모트가 힘을 되찾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도 웜테일이다. 그런데 그런 큰 공을 세우고도 정작 웜테일은 볼드모트 추종자들에게도 계속 무시당하고 볼드모트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 볼드모트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도 못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볼드모트가 웜테일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말한 것처럼, 웜테일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두려움이었다. 웜테일은 볼드모트가 너무나 무서워서 그를 위해 몸 바쳐 일했고, 친구들도 배신했고 십년 가까이 쥐로 변신하여 숨어 지내는 치욕도 감수했다. 볼드모트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그자가 원하는 어떤 잔인한 악행도 거침없이 저지를 수 있었다. 자기가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정도, 신의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두려움이 그를 악하게 만들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나오는 두려워하는 자에 대한 단서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해당 본문에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자인지가 나와 있지 않다. 두려움의 ‘대상’이 빠져 있다. 본문에 빠진 목적어를 넣어서 읽자면 이렇게 된다, “엉뚱한 것을 두려워하는 자, 그에게 화 있을진저.”

영국의 시인 존 던은 이렇게 노래했다. “오 주님, 제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제게 두려움을 주소서.” 두려워하지 않도록 두려움을 달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만이 정말 무서운 분임을 제대로 알 때 다른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 하나님 무서운 줄 알게 해달라는 기도 아닐까.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구절과 존 던의 기도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늘 두려움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존재다. 온갖 것에 대한 두려움에 어느 정도는 휘둘리고 어느 정도는 그 사실을 숨기고 관리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두려움 자체는 우리를 신중하게 만들 수 있고, 악하고 유한한 존재인 우리의 실체를 직시하고 참된 신앙의 세계로 이끌어줄 수 있는 삶의 조건이니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C. S. 루이스는 용기를 두고 그저 또 하나의 미덕이 아니라고 했다. 모든 미덕이 시험대에 올랐을 때 자신을 용기로 드러내고 입증해낸다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모든 악덕은 비겁함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두려움과 비겁함은 동의어가 아니다. 겁이 나는 순간은 용기와 비겁함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일 따름이다.

세상에 무서워 보이는 것 많고, 지금 우리 앞에도 겁나는 선택이 놓여 있지만,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여 용감한 선택, 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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