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9:1-11

▲ 김기석 목사
청파교회 담임

지난 8월 초에 환경부원들과 몽골에 다녀왔습니다. 숙소 가까운 곳을 산책했습니다. 해거름에 광대한 초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그 고요하면서도 장대한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  낯선 세계와의 만남

사실 현실이 각박할수록 우리는 자꾸 고개를 들어 다른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에 매몰당하지 않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의 수용소에 갇혔던 이들 가운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의사들은 그 병의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대개 자기들을 가두고 있는 철책만 바라보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이들은 철책 너머에 있는 들꽃에도 눈길을 주고, 무심코 흘러가는 구름에도 눈길을 주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을 가두고 있는 그 철책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그것이 마음의 병이 되었던 것입니다.

파커 J. 파머는 깨어져서 조각나는 것이 아니라 깨어져서 열리는 것이 온전함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실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파커 파머는 하시디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질문했습니다.

“토라는 왜 우리에게 ‘이 말씀을 네 마음 위에 두라’고 말하나요? 왜 이 거룩한 말씀을 우리 마음 속에 두라고 말하지 않나요?” 랍비가 답한다. “우리가 현재 그러한 것처럼, 우리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에 거룩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 마음 꼭대기에 둔다. 그리고 말씀은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어느날 마음이 부서지면 그 속으로 떨어진다.”(파커 J. 파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김찬호·정하린 옮김, 글항아리, 2018년 7월 27일, p.217)

마음이 부서져야만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온다는 말은 씁쓸하지만 진실입니다.
 

 +  자아가 무너질 때

욥은 어땠을까요?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들까지 다 잃어버린 그는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그를 찾아온 친구들은 욥의 태도를 무척 당혹스럽게 여깁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지 않았고, 그것이 친구들의 신앙적 감수성에 상처를 냈기 때문입니다. 빌닷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 지은 자를 벌하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는 사람, 믿음을 저버린 사람의 운명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미지를 동원합니다. 욥은 빌닷의 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순순히 시인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9:2)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이걸 시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심판하실 그분께 은총을 비는 것뿐이다”(9:15). 하지만 비애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정직하게 자기 심정을 드러냅니다.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고, 다만, 산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9:21).
 

 +  새로운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한다 해도 상처 입은 우리 마음이 쉽게 아물지는 않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이유가 분명한 고통도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고통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통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고통은 견디기 어렵지만 그 고통을 더 큰 세계의 입구로 삼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며칠 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교종이라 칭송받았던 요한 23세의 일기를 읽었습니다(교황 요한 23세, <靈魂의 日記>, 박 바오로 옮김, 크리스챤출판사, 1996년 4월 5일, p.195). 그는 피정 시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자꾸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총에 잘 응하지 못했음이 문득 부끄러워졌습니다. 모든 고통이 다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주님의 뜻을 깊이 깨달을 수 없었기에 그 고통은 복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시선을 조금 더 높은 곳에 두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불의와 맞서 싸우되 정신이 피폐해지기 않기 위해서는 더 큰 세계와 자주 접속해야 합니다. 삶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뜻을 여쭈어 보면서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듯 주님의 은총의 바람이 우리의 울울한 마음에 불어와 이웃과 더불어 생을 마음껏 경축하며 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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