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242] 사제 왕 요한_ 52

“주교님, 천천히 가셔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당장
은 전쟁이 나지 않을 거예요. 느긋하게 계획을 세우세요.”
유차홍은 느긋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아나톨리
아까지 가고, 다시 길을 잡아 갑바도기아를 지나
부르사까지 왔다. 한 달이 걸렸다.

▲ 타지키스탄의 사막에서 현지인들이 대화하고 있다.

에뎃사 추억으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제4차 십자군이 마르마라 해협 주변을 가로막고 콘스탄티노플 동로마 황제와 한판 전쟁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온 도시를 긴장시켰다. 외지서 온 사람들이니까 긴장이지 현지 사람들은 십자군이 성지 예루살렘 탈환 전쟁을 위해 동방지대에 나타난 이후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바 다이산 기념교회당 별채에 머무는 동안 요한 유차홍 주교는 교황청과의 교제에 대해 낙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자칫 콘스탄티노플이 전쟁터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유차홍 주교는 바르바스 대장에게 긴급 제안을 했다.

“바르바스 대장님, 이곳 에뎃사에서 콘스탄티노플 간에는 여행에 큰 부담은 없어요. 일단 우리가 빨리 가서 교황청 대사를 알현하기까지만 순행을 할 수 있으면 절반 이상은 성공한 것이 됩니다.”

“주교님, 너무 서두르시면 안 됩니다. 일단 우리는 대상 일행과 행동을 같이 해야 합니다. 이곳 에뎃사부터는 전쟁터로 보아야 합니다. 현재 이 도시는 십자군의 적인 셀주크 군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적이나 아군으로 잘라서 말하기는 어려워요. 너무 서두르면 화를 부를 수 있습니다.”

바르바스는 유차홍 주교가 카라반 대열에서 이탈해 콘스탄티노플로 좀 더 빨리 가고 싶어 하는 셈법을 읽었다. 그러나 바르바스는 군인이다. 한 달 가까이 걸릴 수도 있는 콘스탄티노플 가는 길에는 치안이 불안했다. 아나톨리아 지대가 특히 위험하다. 카라반의 경우는 기독교나 이슬람, 또는 그 어느 세력들도 서로 보호하는 상단(商團)이지만 카라반 대열을 벗어나는 경우 신변보장에 자신 없었다. 바르바스의 임무가 대원들의 신변안녕인데 함부로 객기를 부릴 수 없었다.

유차홍 주교는 바 다이산 기념관 늙은 사제 이카바를 찾아갔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과 동방제국 군과 전쟁이라도 벌어질 수도 있지 않으냐고 이카바 신부의 의중을 듣고 싶었다.

“십자군이 교황의 군대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교황은 동로마 황제를 함부로 대하지 못해요. 그리고 같은 기독교 아닙니까. 동과 서로 나뉘었다고는 해도 저들은 한 제국의 한 교회입니다.”

이카바는 구십 살이나 된 늙은 사제인데 이 말을 할 때 그의 눈은 형광불빛 같았다. 말을 마친 후에도 혼잣말로 그럴 수 없지, 를 서너 번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유차홍 주교는 이카바 신부의 모습에서 기독교끼리 뿐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 간에도 제발 다툼질을 거두고 새롭게 깨어나는 세계를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들은 에뎃사까지 오는 데 두 달을 계산했으나 석 달 걸렸다. 자기 책임을 무사히 마치고 메르브 교단 본부로 돌아가서 아시아 선교에 매진하기까지 1년이 걸릴 지 9년이 걸릴지 앞날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유차홍 주교님, 서두르지 마셔요.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4차 십자군이 성지 탈환을 위해서 육로가 아닌 해로로 이동하기로 결정했지요. 잉글랜드 왕 리차드가 3차 십자군 때 해로를 택했기에 성공했다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대략 4차 십자군 지원군 3만여 명과 군마, 병기 등을 운송하려면 대규모 함대를 마련해야 했지요.”

“신부님, 그건 저도 압니다.”

“아, 그래요. 그럼 외상으로 베네치아에 배를 주문한 것도 아세요?”

“네, 군선을 준비했는데 함대 만든 비용을 제대로 못 냈다더군요. 그럼 배 만든 비용이 모자라서 사단이 난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지요.”

“저런, 그럼 베네치아는 기독교나라 아닌가요? 4차 십자군 주력이 프랑크국인데 다 같이 기독교국인데 돈 몇 푼 가지고 뭐하자는 것입니까?”

“말은 옳지만 전쟁은 전쟁이고 돈은 돈인가 보지요.”

“….”

유차홍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주교님, 천천히 가셔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당장은 전쟁이 나지 않을 거예요. 느긋하게 계획을 세우세요.”

유차홍은 느긋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아나톨리아까지 가고, 다시 길을 잡아 갑바도기아를 지나 부르사까지 왔다. 한 달이 걸렸다.

부르사는 니케아 황제의 겨울 궁전이 있는 곳이고, 기독교 역사에서는 유명한 지역이다. 제1차 에큐메니칼 기독교 공의회가 열렸고 제국의 기독교 시대를 연 인물인 콘스탄티누스가 서둘러서 기독교의 틀을 가다듬은 ‘니케아 신조’를 탄생시킨 니케아시가 인접한 곳이다. 마르마라 해협의 갈레 길을 따르면 대형선박도 정착할 수  있고, 황궁의 배경도시에 해당한다. 부르사에 도착한 대상행렬은 예정이 없었으나 부르사에서 하룻밤 머물기도 했다. 최종 목적지인 다마스커스까지 갈 것인지 콘스탄티노플까지만 갔다가 델리로 돌아가야 할지에 대한 정세판단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유차홍 주교 일행도 일행이 둘러앉아서 논의했다. 부르사의 민심은 무척 흉흉했다. 카라반 일행의 도움을 받아서 부르사 교회들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네스토리안 동방지역 주교 일행이라고 밝혔더니 함께하기를 꺼린다고 했다. 바르바스 대장이 카라반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대장님, 지금 콘스탄티노플은 황제와 십자군 대표 간의 회담이 잘 풀린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알렉시우스 4세가 귀족들로부터 전쟁비용을 마련했다는군요. 우리는 내일 함께 떠나면 2일 후에는 궁성에 도착합니다. 오늘은 편히 쉬시고 내일 떠납시다.”

“고맙군요. 그렇게 하지요.”

바르바스는 유차홍 주교와 함께하는 일행들이 머무는 사라이(대상들의 숙소)에 돌아와서 매우 기뻐했다. 유차홍 주교는 홀로 밖으로 나갔다. 콘스탄티노플 교회나 로마 교황 대사가 과연 그들이 이단으로 정죄해 제국에서 몰아낸 네스토리우스파 동방교회를 인정할 것인지도 알 수 없거니와 과연 저들이 지금도 프레스터 존(사제 왕 요한)에 대한 실체를 인정할까? 과연 우리를 사제 왕 요한의 사절로 받아줄까? 자신의 머리로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델리 출발 다마스커스 행 카라반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즉시 유차홍 주교와 바르바스 대장은 일행을 이끌고 하기야 소피아 예배당 주변에 당도했다. 당장 전쟁터가 되고 도시가 불바다가 되었을 것처럼 알고 있었던 날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도시는 아름다웠다. 생전 처음 본 소피아는 하늘 아래 이런 건축물도 있을까. 화려하고 웅장했다. 역사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소피아 예배당 준공식 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솔로몬 왕이시여. 내가 이겼소이다”라고 소리쳤다. 경쟁심이 아니라 감격어린 감탄사로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도시의 겉모습은 평화로워 보였으나 제4차 십자군의 도움으로 등극한 알렉시우스 4세는 그가 4차 십자군 수송을 위한 전선, 보급선 제작비는 물론 전쟁비용까지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그가 약속한 비용은 반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4차 십자군 본진은 1203년 4월 20일에 비잔틴 성벽 저 너머 코르프(Corfu) 섬에 진치고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다가왔다. 프랑크를 출발한 지 1년 반이 넘었는데 성지 탈환전은 꿈도 꾸지 못하고 마르마라 해협 골든혼에 발이 묶여 있다.

하루가 지나자 유차홍 주교는 현재 상태가 무척 위급함을 몸으로 느꼈다. 황제 알렉시우스 4세는 십자군과 약속한 전쟁비용을 하루라도 빨리 줘야만 저들 프랑크 군을 자기 영토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알렉시우스 4세는 수일 내로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십자군이 황성을 공격하게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의 부친 이사키우스 2세를 폐위시키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숙부 알렉시우스 3세를 몰아냈으면 온 도시가 기뻐하고 새로운 제국의 품위와 도덕성을 높이려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줄 알았는데 귀족이나 신민들이 성지 탈환을 위한 명분 있는 기금인데도 더는 못 준다고 도리질 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콘스탄티노플 여행객처럼 도시와 화려한 교회 건축물들을 감탄하는 프랑크 군대에게 행패까지 부리기에 이르렀다. 야만인 프랑크 놈들아, 더는 이 거룩한 도시에서 거들먹거리지 마라.

황제는 도시민들의 눈초리가 달라져 감을 확인하고서는 변칙을 시도했다. 그는 황제들의 무덤을 열어 보석을 꺼낼 것을 명령했다. 심지어 주요 건축물의 귀금속을 떼어내고 성배와 성화 등 교회 안의 거룩한 물건들까지 긁어모았다.

콘스탄티노플 신민들은 황제의 이 같은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 4차 십자군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군사로 저들 프랑크 군을 몰아내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했으나 황제가 몸소 선황제들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본 신민들은 당장 폐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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