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천년여행 [ 242] 사제 왕 요한_ 54

오전까지는 주교단과 수도원장들의 말이 먹혀드는가 했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지휘부의 통제가 먹히지 않았다.
십자군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웠다.
온통 시내가 맹수들의 먹이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세워져 있는 아미르 티무르 동상

유차홍 주교와 바르바스 대장은 교황청 대사를 만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총주교좌 신부들은 쉽게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쉽지 않을 듯합니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성벽을 뚫고 침략해오는 프랑크 십자군이 오늘은 우리 콘스탄티노플을 짓밟으려고 작심했어요. 지금 숫자는 우리가 몇 배 더 많지만 대다수가 용병들이라 십자군의 상대가 되지 못해요.”

유차홍 주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의 은퇴신부인 유스티안 노인의 푸념 섞인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렇죠. 죽느냐 사느냐의 전시상황인데 어찌하겠소.”

바르바스 대장이 유스티안 신부의 말에 공감을 표하고 있을 때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한 젊은이가 소리쳤다.

“다 틀렸소. 이제 우리는 망했소. 무르추풀루스가 십자군 병정들에게 쫓겨났답니다.”

“뭐, 그럼 성이 뚫린 거야?”

유스티안 신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묻는다.

“무너졌습니다. 십자군 놈들이 개미떼처럼 성벽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어요. 사라센 놈들이 수십 번 공격했어도 거뜬히 막아냈고 데오도시우스 대왕이 성벽을 쌓은 이후 지난 1천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뚫리지 않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무너지다니….”

젊은이는 비통하다며 가슴을 치며 운다. 어느 누구도 더는 입을 열지 못한다.

“이 사람들이 적군이 쳐들어왔는데 이러고 있으면 되나.”

유스티안 신부는 유차홍 주교와 바르바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자리를 뜨려 했다.

“신부님, 설마 다 같은 로마 시민이고 주 예수를 믿는 제국의 사람들인데 뭐 큰 문제가 있겠어요. 계속해서 저희를 도와주세요.”

유차홍은 유스티안 곁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다. 유스티안은 잠시 바깥 사정을 알아보마 하고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한편, 무르추풀루스는 어떻게 하면 그의 황제관을 지키느냐를 연구했다. 제국의 군대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가 버린 이상 그에게 남은 병력은 근위병들뿐이었다. 궁성 방위군이다. 그들 또한 얼마나 자기의 명령을 따를지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그는 십자군이 군막을 치고 움직이지 않고 있음을 행운의 시간으로 생각했다. 그는 실력 있는 귀족들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그들은 냉담했다.

시민들이나 일부 실력 있는 귀족들 생각은 따로 있었다. 제국이 잠시 어렵다고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자를 황제로 받들 수 없었다. 만약 무르추풀루스가 황제자리를 계속 고집한다면 그를 유폐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을 차라리 몬테라토의 보니파체에게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양하는 것이 옳다고 시민들은 동의했고, 이에 더하여 1천년 아름다운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낼 수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십자군과 충돌할 경우 저들은 점령군 행세를 할 것이 두려웠다. 이 사실을 눈치 챘는지 밤사이에 무르추풀루스는 도시를 빠져나가고 말았다.

다음날 새벽, 콘스탄티노플의 고위직 귀족들과 성직자 대표들이 보니파체를 찾아가서 무조건 항복했다. 하지만 보니파체는 콘스탄티노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보니파체의 의사와 상관없이 퍼레이드가 준비되고, 대관식을 올리기 위해서 하기아 소피아 대예배당으로 가는 새 황제를 맞이하려는 시민들이 몰려나왔다. 광장 드넓은 곳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보니파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십자군 진영에서 반론이 있었던가? 몇 주 전 콘스탄티노플 점령 계획을 의논할 때 도시 함락이 이루어지면 일단 전리품을 분배한 후 협의회를 통해서 황제를 선출한다는 내용을 결의했었다. 보니파체는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된다는 확신을 가졌으나 쉽지가 않았다. 일단 비잔틴이라는 이 도시를 전승의 원칙을 따라 싹쓸이한 후에 콘스탄티노플의 앞날이 결정될 것 같다.

십자군은 한순간에 추악한 괴물이 되어버렸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당과 여성들에 대해서는 몹쓸 짓을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던 말들이 거짓말이 된 것이다.

새 황제로 보니파체를 모시려고 선물을 들고 거리에 나왔던 시민들이 첫 희생자였다. 십자군 기호를 가슴팍에 내걸고 무장한 프랑크 십자군들이 온통 시내 곳곳을 휘젓고 다녔다. 그들과 더불어 라틴계 피난민들이나 개인 사정상 교황의 땅을 피해 와서 콘스탄티노플의 도움을 받고 살아왔던 라틴인들까지도 이 혼란기에 뛰어들어 자기네의 욕망을 채우려 들었다.

오전까지는 주교단과 수도원장들의 말이 먹혀드는가 했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지휘부의 통제가 먹히지 않았다. 십자군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웠다. 온통 시내가 맹수들의 먹이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정규 십자군 숫자가 2만4천 명이다. 선단을 움직이는 선원들, 베네치아 상인들, 교황의 땅에서 죄짓고 비잔틴으로 와서 보호받으며 살던 사람들, 그들 점령군이 부리는 노예들까지 모두가 탐욕의 화신들이었다. 폭행, 귀중품 탈취, 방화, 특히 부녀자들을 보호할 방법이 없었다.

유차홍 교황 사절단은 전에 볼 수 없었던 인간들을 보게 되었다. 중앙아시아는 이런 일이 없다. 이동생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은 프랑크 십자군 집단처럼 짐승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늘 쫓기고 쫓는 전쟁터나 다름없이 살아왔지만 콘스탄티노플 점령군들의 놀이터인지 짐승들의 사나운 놀이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행동하고 있었다.

일행이 모두 흩어졌다. 한집 건너 또 한집이 불타거나 피를 보는 등 그들은 도둑이 아니면서도 쫓아다녔고 욕심이 없었으면서도 쫓겨 다니는 것이다. 유차홍은 바르바스가 그의 곁에 없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바르바스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가 보이지 않았다. 넋을 잃은 사람이 된 유차홍 곁으로 누군가가 달려왔다. 요하난이었다.

“주교님! 바르바스 대장님이 죽었어요. 주교님!”

“엉! 무슨 소리야.”

“싸움에 휘말렸어요. 수도원과 수녀원이 나란히 있는 곳인데 십자군과 이곳 비잔틴 수도원의 수사들과 다툼이 있었어요. 십자군들이 몰려와서 수녀들을 겁탈하고,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자 수도원 사제들이 수녀원에 불을 지르고 십자군들과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비잔틴 사제들을 돕던 바르바스 대장은 물론 우리 일행 중 또 누군가요. 아, 우장학 동지와 이수아도 함께 있었어요. 십자군 병사들이 처음에는 스무 명 정도였는데 주변 건물에 불이 붙고 고함소리가 들려서인지 단숨에 백여 명이 더 되는 십자군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큰 희생을 내고 말았어요.”

유차홍은 요하난을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이 일을 어찌 하냐. 요하난, 당신은 십자군 출신이라며, 조금은 더 이런 재난에서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았느냐. 나는 도무지 처음 보는 꼴이라. 예수 이름으로 이게 뭐냐. 지옥도 이보다는 수월할 거다.”

불상사가 일어난 수도원 앞은 지금도 주변의 불길이 다 집히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갔으나 접근이 불가능했다. 요하난이 다가가서 우리는 에뎃사에서 온 콘스탄티노플 순례자인데 일행 중 몇 사람이 없어서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말했으나 접근할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유차홍은 그가 은신해 있던 유대인 사카이 노인의 집으로 갔다. 요하난도 함께였다. 사카이 노인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어르신, 이럴 수는 없습니다. 지옥이 어딘가 했더니 여기가 거기로군요.”

유차홍 주교는 유대인 노인의 두 팔에 안기다시피 힘없는 모습으로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요. 안타까워요. 우리 유대인들은 교황이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싸움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이 쏟아 붓는 저주의 불길에 타죽지 않는 법만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타죽지 않습니까?”

유차홍은 말하면서도 지금 자기는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그는 그만큼 공허한 심사였다. 교황사절단의 일을 당장 때려치울 생각이었다.

“주교님, 여러분이 말하는 복음이란 예수님에게만 있었나 봐요.”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비난의 뜻은 없는데 복음이 제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나 할까?”

“아, 그렇군요. 그럼 어르신도 예수님의 구원을 믿으신다는 뜻도 되는군요.”

유대인 노인은 빙긋이 웃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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