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을 중심으로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신앙 개혁안 215개 조항

사랑은 하나님입니다
(LOVE IS GOD)


글 : 김 영 찬 목사

가장 위대한 종교는 사랑이며 가장 위대한 신앙도 사랑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니 사랑이 곧 하나님이다.


차 례

첫머리(序頭)

Ⅰ. 기본 인식(基本認識)의 변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품성
만물과 인간의 근원
인간의 무한한 욕심
믿음과 구원에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깨달아라! 천국이 너희 안에 있느니라

Ⅱ.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신앙 개혁안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온유한 자
의(義)에 굶주린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
팔복의 영성은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門)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율법의 완성
교회 지도자들의 위선(僞善)
분노하지 마라
형제와 화목 하라
간음하지 마라
이혼하지 마라
맹세하지 마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된 의(義)
은밀한 구제
은밀한 기도
기도의 모본(模本)
용서에 대하여
은밀한 금식
재물을 하늘에 쌓아라
마음의 눈은 몸의 등불
하나님과 재물
재물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비판하지 마라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마라
성령을 구하라
율법의 정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권위 있는 가르침

Ⅲ. 왜 교회와 신앙이 개혁되어야 하는가?

끝머리(末尾)

에필로그 epilogue - 가장 위대한 종교, 위대한 신앙

저자 소개

 

■ 첫머리(序頭)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나면서 돌아보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은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음을 절감한다.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욕심과 욕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개혁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시대적으로 개혁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으나 수많은 말과 글에 그치고 종교 지도자들이 기득권을 버리지 못한 채 마음과 양심으로부터의 개혁 의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진정한 개혁의 의지를 확실하게 보이고 행한 이는 오직 예수뿐이었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던 진정한 하나님 사람이었다. 그러한 예수를 우리 신앙의 중심에 모시고 그의 가르침을 수없이 말하고 들어 왔지만, 그 가르침의 뜻과 의미를 살려내지 못한 채 예수를 통해서 기복(祈福)과 장수(長壽)를 갈망해 왔다. 물질적인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곧 믿음의 완결판으로 생각하면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구원 얻어 사후에 영생을 누리는 것에만 집착해 왔다. 그러면서 우리의 일상생활은 교회 밖의 사람들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은 채 도리어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만 욕되게 하는 실정이다. 과연 교회 생활 또는 신앙생활은 물질적인 복(福)과 사후의 천국 입성을 목표로 삼는 수단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황금률과 십자가의 의미는 어디서 무엇으로 찾아야 하는가?

진실로 교회와 신앙의 개혁은 종교(宗敎)와 하나님(道) 그리고 인간(人間)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종교란 복의 근원이 아닌 삶의 원리이고,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神)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으로서의 양식이며 그리고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이다. 따라서 신앙과 믿음이란 만물과 인간의 뿌리인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가 하나님과 일치된 삶을 위한 수행의 과정이다. 그런데 만물과는 달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인간이 가장 부패하고 타락하여 이기적인 욕심과 욕망으로 삶을 버티고 있다.

예수 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으니 자기 죽음을 통해 인간의 욕심이 함께 죽었음을 상징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5:24) 그래서 이기적인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는 것이 곧 구원이다. 우리는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를 받고 교회의 정회원이 되면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내세의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린다고 믿는다. 신앙과 믿음의 정점인 구원과 영생은 교회의 정회원이나 교회 직분 그리고 교회 생활의 연조(年條) 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사람만이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죽었어야 할 욕심이 여전히 살아서 날마다 몸살이를 위해 애원하고 있으니 바로 기복(祈福)신앙이다. 하나님의 성육신과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기복을 위한 것인가?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道)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0-12)라고 하였다. 왜일까? 그것은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다. 욕심으로 인해 마음이 어두워지니 하나님의 형상(DNA)에 대한 감각이 죽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을 망각한 채 온갖 죄와 허물 안에서 욕심으로 추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몸살이 만을 의식하고 참살이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성장과 출세와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이 오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道), 신앙, 믿음은 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달을 맞이할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표어를 매번 주장하고 있으나 정작 초대교회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근본을 여전히 붙들고 있으니 바로 ‘욕심’이다. 욕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는 성직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영과 진리를 위해 살면서 세상에도 널리 전하라(사도행전 1:8)고 하였지만 우리는 그 숙제와 사명을 까마득히 잊은 채 이기와 욕심으로만 살고 있다.

특히 성직자들은 밥을 먹어도 진리를 생각하고, 잠을 자면서도 진리를 생각하고, 사람을 만나도 진리를 전하며 무엇을 하든지 진리를 생각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 신앙생활이 아닌 생활신앙으로의 새로운 변모를 기대하면서 감히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신앙 개혁안 215개의 인식의 변화와 생활실천 조항을 교회 앞에 내놓고자 한다.

2018 무술년 10월에 제2의 종교개혁을 기대하면서

무명인 김 영 찬 목사

 


Ⅰ. 기본 인식(基本認識)의 변화

 

1. 사람들은 오랫동안 배우고 익힌 지식과 경험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특히 이념과 사상. 교리와 교조(敎條) 등은 정론과 정설(定說)이 되어 전통적으로 답습되면서 절대적인 고정으로 관념화된다. 그러면 누구든지 이 고정관념에 반(反)하는 생각이나 주장을 하면 이단 사설이 되어 몰매를 맞는다. 전통이 정통되고 정통은 절대(絶對)가 되면서 고정화(固定化)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로 분열되어 서로가 이해와 양보 없이 비난하고 비판을 한다. 이러한 현상이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이념과 사상이나 교리나 교조 등은 어느 쪽이든 절대나 완전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인 생각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구속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불의(不義)이다. 진리의 깊이와 넓이와 그 높이를 어찌 인간의 지혜로 한계와 절대를 정할 수 있겠는가? 나와 다른 생각이나 주장을 겸허히 수용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숙의(熟議)하는 과정은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더욱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2. 초대교회 이후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와 전통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 교회 지도자들의 독선과 기득권, 교회 건물의 대형화, 교회 재산의 오남용 그리고 기복(祈福)신앙의 자리매김 등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으며 또한 예수 십자가의 정신을 상실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성직자들의 존재와 교회의 역할 그리고 신앙의 의미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잠자는 영혼을 깨워야 할 때이다. 이제 하나님의 존재, 인간의 근원과 욕심, 믿음과 구원, 예배와 교회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의미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인식의 변화에서부터 교회와 신앙의 변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종교(宗敎)란 무엇인가?

 

3. 종교(宗敎)란 ‘으뜸 가르침’ 또는 ‘근본 가르침’이라는 말로서 ‘종’(宗)은 ‘본’(本) 또는 ‘원’(元)과 그 의미가 같아 본질 또는 바탕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으뜸과 본질과 바탕은 하나님(道)을 지칭하는 것이니 종교란 하나님(道)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만물과 인간의 ‘뿌리’에 대한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뿌리 공부를 하는 것은 ‘나’의 근원을 찾아가는 진지한 수행 과정이다. 만물 중에서 인간에게만 ‘종교’가 주어진 것은 만물과는 달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오남용하여 하나님의 근본 가르침(道)을 떠났기 때문이다.(창세기 2:17, 3:6) 아담의 불순종 이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가르침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전달되었지만 언제나 들을 뿐 그 가르침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한 채 겨우 종교적인 의식(儀式)과 의무적인 율법 행위만 강조해 왔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인화(擬人化) 내지는 인격화(人格化)된 신(神)으로 인식하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으로 믿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道)의 뜻이 담긴 경전(經典)의 가르침을 복(福)의 수단으로 왜곡한 채 ‘종교’ 밖에서 이기적인 욕심의 삶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이다. 만일 모든 종교계에서 기복(祈福)을 뺀다면 대부분의 종교계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만큼 종교에서 차지하는 기복의 비중은 절대적이니 기복이 종교계의 권력일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기복을 권력으로 오남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4.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호칭 때문에 하나님을 무의식중에 형상이 있는 듯 의식할 수 있겠지만 분명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기에 그 ‘스스로’의 속성을 따라 만물과 인간에게도 ‘스스로 되어지는 그대로’의 원리를 볼 뿐이다. 만물은 스스로 또는 저절로 됨을 따르기에 말 그대로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함)’이라 한 것이다. 그 자연의 본질은 하나님이니 자연의 원리는 곧 하나님의 삶이기에 이를 자연의 섭리 또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자연’이 곧 종교의 본질이다. 인간도 자연성을 따르는 것이 종교에 대한 바른 이해이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이 종교나 신앙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엉뚱하게도 종교적인 의식(儀式)과 기복(祈福) 신앙이 종교인 줄로 크게 착각을 하고 있다. 본래 종교는 하나님께 대한 도리와 사람에 대한 도리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어야 하며 또한 인생의 경전이 되어야 하고 또한 지도력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종교적 가르침의 정신을 외면한 모든 인생과 배움과 신앙은 결국 인간을 부패하게 할 뿐이다. 문명의 빛은 밝고 밝아 가는 반면에 영혼의 빛은 한없이 어두워져만 가고 있다. 세상이 날마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는 것은 삶의 원리인 참도리(道)를 망각하고 욕심으로 살기 때문이다. 분명 기복신앙은 욕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종교와 신앙에서 ‘기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품성

 

5.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데 이는 ‘스스로 존재(自存;自然)’한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은 최초로 모세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애굽기 3:14)라고 밝혔다. 하나님의 존재는 신비(神秘) 그 자체로서 불가사의한 존재이니 이를 천연(天然)적인 존재 또는 자연(自然)적인 존재라고 한다. 언제부터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이니 시원(始原)이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자신을 일컬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하였으니 이는 곧 ‘자연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있기 태초 전의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한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함)’이었으니 ‘자연’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의도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자신의 본성인 ‘스스로 되어가는 자연성(自然性)’을 따르니 자연성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본질이다. ‘하나님’을 달리 표현한다면 자연, 성령, 사랑, 생명, 진리(道), 없음(無), 비움(虛)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6.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들을 두고, 땅에는 산천초목을 두었으며, 땅 아래에는 강과 바다를 두었는데 이를 만물이라 불렀다. 그리고 만물은 ‘스스로 생성화육’의 과정을 보이기에 이를 그대로 ‘자연’이라 명명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자연성’을 내포(內包)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만이 자연성을 상실하고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이기와 욕심을 부리게 되었으며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다. 이는 자연의 섭리 곧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무지와 어리석음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복(祈福)에는 관심이 없고 언제나 자연성을 따를 뿐이다. 자연성은 만물의 속성이다. 그런데 인간만이 자연의 섭리를 떠나 이기적인 욕심으로 살고 있으니 만물 중에서 가장 타락한 존재이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언제나 선택한 결과를 얻는 것이지 하나님의 응답은 아니다.

 

7. 그리고 스스로 존재한 자연의 하나님은 ‘영’(靈)으로 존재하는데 이를 성령(聖靈)이라고 부른다. ‘자연’의 운행은 시작과 과정과 결과에 대한 현상은 있지만, 자연의 형질(形質)은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으며 흔적조차 없어 이를 ‘영’이라 한 것이니 자연을 영이라 한 것이며 이를 성령이라 한 것이다. 자연의 하나님과 자연의 영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하게 들리지만, 결코 왜곡된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이며, 표현은 달라도 자연과 영은 동의어(同義語)이다. ‘자연’은 의도적인 행위가 배제된 상태에서 스스로 또는 저절로 되는 그대로의 현상을 말하고, ‘영’은 없음(無)과 빔(虛)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자연의 영, 성령은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는 무형의 하나님이다. 성령 하나님은 보이는 형상으로는 없고, 보이지 않는 영, 무, 빔으로 존재하기에 이를 ‘형상 없는 형상’(無狀之狀) 또는 ‘형상 없는 실재’(實在)라 한다.

 

8. 그래서 성령 하나님의 특성은 인간과는 달리 하나님 자신을 위한 욕구나 욕심과 기대함이 없다. 성령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요 주인이지만 만물을 소유하지 않는다. 만물을 다스리지만 제 뜻대로 주관하지 아니하고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 또한, 만물을 이루고 성취한 공적이 있지만 자랑하거나 뽐내는 일이 없으며 칭찬이나 찬양을 기대하지 않는다. 결과물은 있지만 시작한 이가 없으니 이를 ‘비움의 신’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비움(虛)의 신인 하나님을 숭배하면서 끊임없이 ‘채움’(盈)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비움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 외에 줄 것은 없다.(사도행전 17:25) 인간에게도 만물처럼 자연의 속성과 영의 형상이 내재해 있으니 자연성과 비움(虛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9. 그리고 하나님의 본체를 성령이라 한다면 그의 본성은 사랑이다. 그래서 성령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기에 성령과 사랑은 동본동질(同本同質)로서 성령은 곧 사랑이요 사랑은 성령이다. 사실 우리가 늘 부르는 ‘하나님’과 ‘예수’의 본래 이름은 ‘사랑’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존재의 본질’을 말함이지 좋아하는 감정이나 봉사 및 헌신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과 사랑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를 이룬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을 사랑 하나님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더욱 합리적일 것이다.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기에 차별과 차등 없이 긍휼과 은혜가 저절로 또는 당연히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표현보다는 ‘사랑이 곧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될 것이니 ‘존재적 사랑’이 우리가 숭배하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인 것이다. 만물과 인간의 창조적 배경은 ‘존재적 사랑’이고, 만물과 인간과 더불어 하나 되심은 ‘본성적 사랑’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존재적, 본성적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라는 당부이지 인간의 도덕과 윤리적 감성을 발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니 ‘사랑’ 없음은 곧 하나님이 없음이다.

 

10. 예수는 자신을 일컬어 길(道)이요 진리(眞理)요 생명(生命)이라 하였으니 우리가 예수를 의식할 때도 사람 예수로 의식할 것이 아니라 ‘형상 없는 형상’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사람 예수로 의식을 하니 능력과 축복을 기대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 비움의 하나님은 2000년 전에 인간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실 때 ‘가난한 심령’(心靈)으로 오셨다. 사람 예수는 보이는 하나님이지만 그의 삶의 주체는 가난한 심령이요 비움이었다. 그 가난한 심령과 비움은 하나님 본래의 형상이요 길과 진리와 생명의 속성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심성(心性)과 그의 삶에서도 사사로운 욕구나 욕심이 전혀 없고 오직 자애(慈愛)만이 있었다. 인애와 자비와 사랑은 영과 비움의 본질이며 종교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그의 본질인 진리와 생명, 인애와 자비 등 사랑의 영성(靈性)이 신앙과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지 기적에 대한 능력과 물질적인 복(福)을 바라는 것은 샤머니즘과 같은 우상을 숭배함이요 그릇된 욕심일 뿐이다.

 

11.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의식(意識)과 신앙심이 세속적인 기복(祈福)으로 빠져 있어 이미 참 하나님과 참 예수를 상실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니 지금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과 예수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찾는 우상(偶像)처럼 변질되고 말았다. 하나님과 예수는 말씀(道)과 참 이치(眞理)와 비움(虛)과 사랑(慈愛)으로 계시지 결코 이기(利己)와 욕심(慾心)과 채움(盈) 속에는 계시지 않는다. 지금까지 교회 지도자들은 늘 하나님 반대편에 있으면서 자신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줄로 크게 착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비움’의 하나님이요 예수는 ‘가난한 심령’이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도 신(gods)들이며 다 지존자의 자녀들(시편 82:6)이라 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신(gods)이라 하였다.(요한복음 10:34-35) 이렇게 우리는 본래 존귀하고 성별된 존재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기적인 욕심으로 추하게만 살 것인가?

 

12.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며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는 신(神)으로 오인(誤認)하고 있다. 하나님은 십계명의 전반부에서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오직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 것이니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20:3-7)하였다. 이는 ‘하나님’이라는 의식 속에서 ‘관념화된 하나님’을 만들지 말라는 간곡한 하나님의 당부이다. 관념화된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을 기원하지 말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사랑을 나누며 본능과 본성을 따르는 자연적인 삶을 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본능과 본성이라는 자연성을 외면한 채 사욕(私慾)만을 위한 신앙을 하고 있으니 어찌 우상 숭배가 아니겠는가?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은 자연의 하나님을 왜곡하고 축복의 하나님, 우상의 하나님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하나님은 복의 하나님이 결코 아니다.

 

만물과 인간의 근원

 

13. 하나님은 만물의 시작이요 만물의 마침이다. 이 말은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비롯되고 하나님 안에서 만물이 자라며 하나님 안에서 잠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물 안에는 인간도 포함되니 인간의 시작과 마침도 마찬가지이니 인간의 출생과 죽음을 자연의 섭리 또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입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God)이 낳아 하나님의 자녀(god)가 되어 하나님과 한 공동체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향은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본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지금도 모든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출신과 신분의 배경을 아는 길은 오직 나의 뿌리를 아는 데서 가능한 일이다.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종교요 신앙이며 믿음의 수행이지 기복이 결코 아니다.

 

14. 그러나 만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벗어나 탕자가 되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은 아버지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함이 그 첫째 이유요 둘째는 제멋대로 살고자 함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진실로 깨닫지 못함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떠난 탕자 우리의 삶은 참으로 범사가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뿐이다. 이것은 ‘내 멋대로’라는 이기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불행의 연속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고, 식물이 흙을 떠나면 죽을 수밖에 없듯이 인간도 하나님(道)을 떠나면 고통과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본래 인간의 집은 하나님의 동산이었다. 자유와 평화와 사랑만이 가득하여 행복한 집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道)’을 등지고 가출을 한 것이다.

 

15.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동산이 지금은 현실 속의 가족과 교회 공동체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유와 평화와 사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가정과 교회는 곧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요 우리는 그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모든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불평과 원망과 다툼 속에서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뿌리(道)’를 떠나있기 때문이요 뿌리를 떠난 것은 ‘자기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욕심’은 근원, 근본, 바탕, 본질 등 인간의 원초적인 시작점을 시기하고 미워한다. 그래서 욕심은 그 뿌리를 죽이고 망각하게 한 채 욕심 자신이 제멋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이다.

 

인간의 무한한 욕심

 

16. 욕심은 마치 암세포와도 같아 마음을 오염시키고 인생과 신앙의 본질과 가치관을 어지럽힌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인류의 아비는 곧 욕심이라 하였으며 그 욕심으로 인하여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으로 산다’(요한복음 8:44)고 하였다. 야고보는 ‘사람이 욕심을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야고보서 1:15)고 하였고 바울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람들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쫒아 다른 이방인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에베소서 2:3)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성령을 따라 행할 때 비로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갈라디아서 5:16)고 하였으니 우리는 반드시 미혹의 영을 배척하고 성령과 사랑의 영을 따라야 할 것이다.

 

17. 인간은 만물과는 달리 존재보다는 소유를, 나눔보다는 소비를, 비움보다는 채움을, 낮음보다는 높음을, 자족보다는 욕심을 추구하고 자랑삼고 있다. 전자(前者)는 영의 기쁨을 추구함이요 후자(後者)는 육신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다. 교회 안의 인성(人性)과 교회 밖의 인성에 차이가 있는가? 교회 안의 지도자와 교회 밖의 지도자가 구별되는가? 교회 밖의 사람들과 우리의 생활 습관에 차이가 있는가 말이다. 육적 그리스도인은 외식과 위선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면서도 자신이 믿음의 사람인 줄로 안다. 물질적 의식(意識)과 생활 습관이 곧 지금의 ‘나’이다. 우리는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해 살 것이 아니라 영원할 영을 위해 살아야 한다. 몸을 구하면 영은 죽고 영을 구하면 몸도 함께 사는 것이며, 욕심을 따르면 영이 죽고 영을 따르면 욕심이 죽는다.

 

18. 종교의 목적은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데 있으며, 하나님 나라와 그의 삶을 온전히 세우는 데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신앙 안에는 이기적인 욕심만이 가득할 뿐 길(道)과 진리(眞理)와 생명(生命) 즉 성령(聖靈)은 없다. 하나님의 형상도 상실되었고, 신앙적 양심도 사라졌으며, 사람의 도리는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예수님, 말씀, 진리, 구원, 영생 등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이생의 삶을 위하거나 내세의 천국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먼저 이 땅위에서 욕심을 모르고도 가난한 마음으로 진정 기쁘고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여정(旅程)이 되기 때문이다. 신앙과 믿음이란 원하는 대로 능력과 기적을 기대하는 용도가 아니라 현실이 어떠한 환경일지라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흔들림 없이 수용하고 적응하는 지혜와 인내를 구하며 자연성을 잃지 않는데 있는 것이다.

 

믿음과 구원에 대하여

 

19.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서 육신은 살았지만, 영혼은 죽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는 영성 또는 영감 즉 영적인 감각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인지(認知)가 죽었기에 영성(靈性)으로 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영성’이란 곧 자성(自性)으로서 하나님의 본능과 본성을 의미한다. 자성을 잃으니 자아(自我)가 등장하여 인위(人爲)와 작위(作爲)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자아의 삶이 언제나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이 되니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 자아가 낳은 것이 바로 ‘욕심’이다. 욕심이란 기본적인 소유를 벗어나 더 많고 높고 넓은 것을 욕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세상에서 좀 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욕구와 욕심 때문에 불평과 미움과 다툼이 생기면서 생존경쟁이라는 정신적 전쟁 속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라는 하늘의 행복을 놓치게 된 것이다.

 

20.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을 보시고 그 고통과 욕심 가운데서 건져내기 위해 예수를 세상에 보낸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화요 하나님 나라의 오심이니 이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우리 안에서 깨어나 회복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선물로 주셨으니 이는 구원의 완성인 것이다. 구원이란 치유하다, 보호하다, 살리다 등 ‘회복’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죄(罪)와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인간의 고통과 죽음은 ‘죄’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죄의 근원은 곧 욕심이니 결국 욕심으로부터의 구원인 것이다. 욕심을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야고보서 1:15)고 하였다.

 

21.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잉태해야 하는가? 욕심의 반대편에는 자족(自足)이 있다. 우리의 삶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와 기타 생활필수품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니 이를 무욕(無慾) 또는 무소유(無所有)라고 한다. 무욕이나 무소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필요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 ‘심령의 가난함’(마태복음 5:3)이라고 한다. 무욕은 곧 마음의 가난함과 자족과 검소함을 말한다. ‘욕심’에서 ‘욕심 없음(無慾)’으로 변화된 것이 곧 구원의 참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매순간 더 많이(多) 더 넓게(廣) 더 높이(高)를 바라고 고민하고 근심하며 신앙적으로 기원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이 종교 지도자들이 앞서서 기복을 부추기고 있으니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을 할 뿐 여전히 구원 밖에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2. 그리고 그 구원에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의 실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과 구원의 실체이기에 교회와 신앙에서 예수를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수’라는 이름은 곧 ‘구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어 의롭게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믿음이란 성경적 지식이나 교리를 지식과 입으로 긍정하는 신앙고백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와 하나 된 작은 예수로서의 체험적이고 경험적인 확고한 믿음을 의미한다. 그 경험과 체험이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 되는 것이니 거짓 나의 근원인 욕심은 죽고, 예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이기에 죽었던 내 영(靈)이 소생하여 다시 태어난 참나가 고백하는 믿음인 것이다.

 

23.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사는 것을 진실로 고백하는 성령의 믿음(갈라디아서 2:20)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성령의 씨(seed)요 하나님의 의(義)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니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로마서 1:17)인 것이다. 이 믿음 안에는 기복을 기대하는 무속적인 믿음은 끼어들 틈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온전한 믿음이니 곧 성령의 믿음이지 인간의 결단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 믿음은 성령의 것이기에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이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에는 입술로만 고백하는 거짓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로 가득한 실정이다. 그들이 강조하고 있는 믿음은 오직 육체의 감각이 원하는 기복 신앙을 추구할 뿐 진리에 대한 궁핍함이 없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왜곡되어 오남용되고 있다.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지 기복의 수단이 아니다.(베드로전서 1:9) 그 거짓된 믿음과 기복 신앙이 오늘의 종교와 신앙을 혼탁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24. 우리는 마음에 욕심을 가득 채운 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물과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소원을 요구하고 있다. 오직 우리의 욕심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교회 출석을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현주소이다. 과연 이렇게 욕심을 부리는 것이 신앙과 믿음이며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를 교회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다. 전통과 제도를 강조하는 종교적인 의식과 관습으로는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은 형식과 습관에 치우친 종교적 행위는 믿음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와 나를 향한 구원의 결정체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 하신 것은 구원의 숙제를 다 마쳤다고 한 것이다. 나와 인류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어 살리신 구원의 은총이 십자가의 죽음이요 욕심이라는 죄와 허물로부터의 구원의 문(門)인 것이다. 교회는 구원의 놀이마당이지 세속적인 사업장이나 무속 마당이 아니다. 이러한 교회는 일찍이 예수가 직접 둘러엎지 않았는가?

 

25. 그러면 구원받은 결과는 어떠한 모습이며 구원의 열매는 무엇인가? 구원은 욕심의 사람이 자족의 사람으로 바뀌고,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화되며, 세상의 것을 바라보던 사람이 하늘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변화를 준다. 12제자들이 그러했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러했으며 또한 바울이 그러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의 목회와 신앙과 삶은 분명 그들과 현저히 다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 다름은 바로 욕심과 자족의 차이이다. 우리는 욕심을 구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족과 가난한 심령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으며 심지어는 그 복음을 위해 순교하기까지 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복(福)은 복 된 소리(福音)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 삶은 다름 아닌 성령의 삶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의 열매는 바로 성령의 열매요 또한 사랑의 열매이다.

 

2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갈라디아서 5:6)이라고 하였다. 구원 밖의 사람들은 육체가 원하는 욕심을 따르니 곧 돈과 재물과 명예와 쾌락과 음행과 호색과 무속과 시기와 다툼과 분열과 술 취함 등이니 이런 것들은 우상숭배와 같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갈라디아서 5:19-21) 그러나 성령에 취한 성도들은 오직 사랑이니 곧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과 온유와 절제(자족)이니 이러한 것들을 반대할 법이 없다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였다.

 

27.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육체가 원하는 바를 거스르고 성령을 따라 성령의 열매 즉 사랑의 열매를 맺고 세속적인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5:22-26)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가르침은 종교적인 의식(儀式)의 행위와 율법의 계명을 의무적으로 지키는 행위 그리고 위선 된 선행 등을 의미하는 것이지 선행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행은 성령의 열매로서 거듭난 사람에게 당연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언제나 성령을 따르고 사랑의 열매를 맺나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참 증거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는 자기 뜻은 죽고 성령의 뜻을 본성적으로 행한다. 결국, 믿음이란 사랑을 의미하며 그 사랑은 성령의 열매로서 구원을 증언한다.

 

예배에 대하여

 

28.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다. 그것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영이 죽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교통을 두절시킨 욕심은 죄(罪)의 본질이 되었으니 그 욕심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죽은 영(靈)은 다시 살려야 했다. 인간의 죽은 영을 다시 살리려는 방법으로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대속물(代贖物)로 이용하였고 신약시대에는 예수가 직접 대속물이 된 것이다. 그 대속물을 드리는 의식이 곧 제사요 예배였던 것이며, 희생의 제물이 되는 그 대속물은 우리 죄의 본질인 욕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욕심이 함께 죽은 것이 되는 것이고 그의 부활과 함께 우리의 죽었던 영이 다시 산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이후 대속물을 통한 예배 의식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찬양 즉 축제로 변하게 된 것이니 그 대표적인 예배를 초대교회(사도행전 2:42-47)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고, 성도들 간에 진실한 사랑과 물질의 나눔으로 인한 공동 소유 그리고 구원의 감격과 기쁨으로 인한 찬양 등이 있으니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더욱 증가해 갔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의 모습이며 교회 성장의 원리이니 ‘거듭난 영과 진실’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참 예배인 것이다.

 

29. 그런데 우리의 예배가 초대교회를 닮은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을 닮아 그 예배가 형식과 거짓된 의식(儀式)이 되고 말았다. 구약의 예배는 자아와 욕심의 희생을 제물로 상징하는 예배였다면 예수 이후에는 회복된 신령과 진실을 나누는 예배로 변모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너희의 무수한 헌금과 성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고 물으며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이사야 1:11-13)고 하신다. 다시 말하면 이기적인 욕심과 세속적인 기복에 치우친 채 이웃은 무시하고 경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 복을 받기 위해 예배하는 것을 크게 책망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 없는 몸이 형식과 거짓에 치우친 의식을 위해 마당 뜰만 밟고 있음을 한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기적인 예배와 절기 예배 및 각종 집회 등을 지겹게 여기며 우리의 무수한 기도를 듣지도 않겠노라(이사야 1:14-16)고 하였다. 왜일까? 이는 우리의 가증스런 예배와 이기적인 악습(惡習)을 버리지 못해서이다.

 

30. 하나님은 우리에게 웅장한 교회당과 수 없는 예배와 기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심이 죽고 영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신다. 다시 말하면 성령에 사로잡힌 바 된 나는 작은 하나님(god)이 되어 예수의 공생애를 이어받아 하나님과는 영으로의 교통을 하고, 이웃과는 인애와 자비 즉 사랑을 나누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에게 ‘선행을 배우고 사랑의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이사야 1:17) 하였으니 곧 사회의 모든 약자를 보살피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31.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하는 방법을 이웃 사랑하는 길로 제시된 것이니 하나님께 대한 예배 의식을 이웃에 대한 사랑의 삶으로 바꾼 것이다.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며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하였으니 율법과 계명은 종교적 의식이나 기복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 하나님의 삶, 성령의 삶을 위해 주어진 것이니 오늘과 같은 예배가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배의 대상이 영으로는 하나님이요 몸으로는 이웃이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언제나 보이는 이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이는 예배보다는 찾아가는 예배를 선호하되 약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예배는 의식(儀式)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日常)이 되어야 한다. 이제 예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예수의 공생애 가운데 성전에서의 예배 모습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사회의 약자들과 늘 함께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32. 그래서 예수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태 9:13, 12:7) 하면서 선량한 사람들을 무례하게 죄인 취급하며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라고 하였다. 또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였으니 화목과 평화 즉 사랑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의 형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정신인 이웃을 사랑하는 신실한 마음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공생애를 돌아보면 약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고민과 아픔과 상처 등을 어루만져 주신 것으로 전통적인 예배를 대신하지 않았는가? 특히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는 배신자 유다를 비롯하여 비겁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안다’(요한복음 13:34-35)라고 하였다.

 

33. 사도 바울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하였다. 바울은 이어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섬김과 가르침과 위로와 구제와 지도력 등을 행할 때 ‘사랑’으로 행할 것을 힘주어 강조하였다.(로마서 12:1-9) 그러면서 계속 말을 잇기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였으니 ‘사랑’이 거룩한 산 제물이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으로서 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믿음인 것이다.

 

34. 또한, 이웃의 쓸 것을 공급하고 대접할 것이며, 이웃의 희로애락과 함께할 것이며, 마음을 항상 높은 데 두지 말고 낮은 데 처하여 겸손할 것이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축복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 것을 당부하였다.(로마서 12:10-18) 야고보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신앙과 믿음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야고보서 1:27)이라고 하였으며, 히브리 기자도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이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와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히브리서 13:16)고 하였다.

 

교회에 대하여

 

35. 교회(ἐκκλησία)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부름을 받음 사람들의 모임을 뜻하니 곧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말하겠느냐’고 묻는다. 이때 베드로는 ‘주(主)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聖靈)이니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 16:15-18)하였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베드로를 교회의 기초로 삼은 것은 아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베드로 자신의 고백이 아니라 그의 입술을 통한 성령 하나님의 고백이다. 단지 베드로는 성령 하나님의 덕으로 자신의 이름값을 한 것뿐이다.

 

36. 베드로는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살아있는 반석이라 하였으며 그 반석을 기초로 하여 신령한 집 교회가 세워진다’(베드로전서 2:4-5)라고 하였다.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를 다시 살리어 교회의 머릿돌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고, 성령 하나님을 근간으로 하여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입고 부름을 받은 우리는 예수처럼 산돌이 되어 거룩하고 신령한 집을 세워 제사장이 되라고 하였으니(베드로전서 2:5) 그 교회는 곧 우리의 심령이요 심령 교회의 제사장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며 또한 참나이다.

 

37.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을 바탕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길(道)과 참(眞)과 생명(生命) 즉 성령을 바탕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주재(主宰)하실 뿐 결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사도행전 17:24)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교회당은 건물일 뿐 신전(神殿)이 아니다. 그러나 중세기에 웅장하고 화려하게 세워진 대성당들과 현대 대형 교회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진정 하나님 나라(天國)는 건물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있다(누가복음 20:21)고 하였다. 바울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고 물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 심령이 곧 성전이요 교회이며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38. 그러나 진실로 성령의 교회는 존재하는가? 세상에는 사람들에 의해,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의 교회만이 가득할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목회자와 신도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교회’를 건물 교회로만 알 뿐, 심령 교회가 참 교회인 줄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은 결코 목회자가 중심이 되는 교회, 돈과 재물로 쌓여진 교회,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수많은 부패와 부정과 악행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다만 교회 공동체는 초대교회처럼 서로 영적, 물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공간이면 어디든 족한 것이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는 신령할 뿐 세속적으로 부유하지 않다. 하나님 자신이 비움의 신(神)이 아닌가? 우리에게 가난한 심령을 말씀하시고 그 심령이 곧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 하셨는데 어찌 하나님의 교회가 크고, 넓고, 높아야 하며 또한 고가(高價)의 비소모품들로 가득해야 하는가? 성령이 없는 나는 존재의 가치가 없으며, 성령이 없는 교회는 마귀와 사탄의 소굴이며, 성령이 없는 하나님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이 모이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나누고, 물질도 나누며, 서로 사랑을 나눈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가 예수가 말하는 교회이고, 사랑 나눔 자체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는 것이다.

 

39. 따라서 하나님은 내 안에서 영으로 계시며 너와 나 우리 가운데 사랑으로 계신다. 내 안의 신(神)을 깨닫지 못하면 진정 ‘신’을 만날 수 없으며 또한 우리 가운데 계신 신을 볼 수도 없다. 나와 이웃을 볼 때 몸 형상과 이름과 신분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의 ‘교회’와 ‘나라’로 볼 것이다. 그래야 진정 사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당과 성구들과 십자가 형상 등을 통해서 신의 감각을 느끼려고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놓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 가운데서 존재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0. 우리가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가치와 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 교회의 본질과 가치와 그 의미는 초대교회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예수 부활 이후 변화된 사람들은 한 가정집에 모이면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나누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리고 물질의 유무 상통을 통하여 각자의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니 이 모임의 생명은 곧 ‘사랑 나눔’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기쁨과 진실로 나누는 그 사랑이 곧 교회의 생명이요 본질인 것이다. 베드로를 기념하는 대성당 건물이 교회가 아니고, 열두 제자들이나 성인들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들이 교회가 아니며 또한 목회자들의 욕심과 명예를 위해 세운 대형 건물들이 결코 교회가 아닌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본질이니 그를 믿는 우리 자신이 또한 교회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교회의 역할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다.

 

41. 그래서 우리가 성인들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성인들처럼 사는 것이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빙자하여 건물과 부동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인애와 사랑의 터 자체가 무형의 교회인 줄을 알아야 한다. 예수 자신이 교회이듯이 우리 자신이 곧 교회이며 사랑 나눔 현장이 곧 교회이다. 하나님은 살아있고 움직이는 교회를 원하시는 것이지 수많은 돈과 재물로 만들어진 건물들과 부동산 및 종교의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만일 교황이 면죄부 판매 설교자들의 속마음을 안다면 자기 양(羊)의 가죽과 살과 뼈로써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실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42. 혹시 오늘의 교회는 구원과 영생을 팔아 장사하며 교회 지도자들의 부와 권위와 명예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가 유대인의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들어가 보니 마치 장사하는 시장을 방불케 하는 것을 보시고 크게 노하며 차라리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하였으니 성전 건물이 교회가 아니고 자신이 곧 교회임을 말씀하셨다. 건물 교회는 부패와 부정과 비리를 낳는 불법의 소굴일 뿐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위에 세워진 나의 심령이 교회의 터가 되어야 한다. 만일 대형 교회 건축이 목회 성공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면 깊이 참회할 것이다. 목회에 대해서 성공 여부를 논한다는 것은 수치 중의 수치이다. 목회 성공의 기준이 물량적인 것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마귀의 앞잡이일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교회와 신앙의 개혁은 교회당 건물부터 무너질 때 시작될 것이다. 하나님께는 교회 건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 우물가나 들판, 가정집 등 어디서나 설교와 예배와 교제를 할 수 있는 곳이면 족한 것이다. 교회는 작은 규모, 소박한 모임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43. 특히 중대형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비리 중 하나가 교회 세습 문제이다. 교회 건물을 사유화(私有化)하는 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정치적인 세습과 기업의 세습도 악습(惡習)이거니와 감히 교회를 세습하는 것은 안하무천(眼下無天)이다. 세습 자체가 도둑질이요 강도질인 것을 진정 모르는가?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것을 절도하는 것이니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목사라는 거룩한 신분을 입은 채 교회 재산에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편법을 쓰면서까지 세습을 하고 있으니 누구를 위한 세습이며 무엇을 위한 세습인가? 교회 재산과 재물에 탐심을 버리지 못하면서 목회자로서 성의(聖衣)를 입고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할 수 있는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가? 신앙적 양심이 마비된 영적 무지와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4. 세습 문제만이 아니다. 퇴직금 명목으로 재산을 크게 늘리고 선한 교육 사업이나 복지 사업 및 언론 사업을 빙자하여 미리 가족 재산으로 사유화하는 일 등은 도무지 일어나서는 아니 될 악행들이다. 그래서 교회는 적은 재산이라도 축적하는 일을 처음부터 만들면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평생 욕심으로 목회를 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목회의 성공이고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거짓을 남발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신앙적 양심이 마비된 지 오래되어 돈과 명예를 좋아하며, 권위 의식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정치꾼들이며, 교회를 부패시키어 사회로부터 불신을 받고 비난을 듣게 하는 원흉들이다. 또한, 목회자들의 부정과 비리를 옹호하면서 부추기고 편법을 제시하며 변명과 변호에 앞장서는 측근들이 있다. 기본적인 양심조차 없는 사람들끼리 교회 안에서 권위와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교회 정치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 공동체를 떠나야 할 사람들이다.

 

깨달아라! 천국이 너희 안에 있느니라!

 

45. 하나님은 종교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식과 위선, 이기와 욕심 등이 끊이지 않는 것을 오랫동안 보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를 처음 시작할 즈음에 가장 먼저 선포한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태 4:17)였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 ‘깨달아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느니라’가 된다. 회개와 깨달음의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天國)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본래 인간의 본향이니 곧 에덴 낙원이다. 처음 인간은 에덴 낙원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행복한 삶을 누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미혹의 영(靈)에게 속아 그만 하나님의 계명을 벗어나 낙원을 잃은 것이다. 낙원을 잃은 것은 하나님의 영을 잃은 것이요 하나님 나라를 잃은 것이며 하나님 사랑을 잃은 것이다. 그 이후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의식(儀式)을 통해 간접적인 교통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마저 형식과 위선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욕심과 하나님 나라를 맞바꾼 것이다.

 

46.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죽으니 하나님 나라를 잃어 고통과 죽음이 따라도 깨닫지를 못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어느 공간을 말함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20-21)고 하였다. 에덴은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고, 생명 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인간의 두 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는 것이다. 생명 나무는 영생의 길이요 지식의 나무는 고통과 죽음의 길임을 미리 알리어 언제라도 죽음의 길을 선택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결국 죽음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상실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의 영적인 죽음 가운데로 오셨으니 이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회개하고 눈을 뜨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고 외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후(死後)의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고 현재의 하나님 나라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찾지 못해 여전히 욕심을 부리며 방황을 하는 것이다.

 

47.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고, 성육신의 주제도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주제도 하나님 나라이고,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주제도 하나님 나라이며, 세례와 구원의 주제도 하나님 나라이고 그리고 예배와 교회 및 교회 성장의 주제도 역시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초대교회처럼 교회와 신도들의 사랑의 삶을 통해 사람들 마음의 변화와 성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어느 특정한 공간을 말함이 아니라 인간의 심령이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원흉인 인간의 욕심이 죽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요 그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하나님 나라가 다시 회복된다면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환희가 가득하여 에덴의 행복한 삶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의 회복뿐이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나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였던 것이다.

 

48.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사리사욕에 취하여 거짓된 위선과 형식적인 외식만 취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그 본(本)을 따르기를 기대하셨지만, 하나님의 성육신과 예수 십자가의 죽음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말하고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으며(로마서 2:13) 무릇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표면적 세례가 참 세례가 아니고, 오직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로마서 2:28-29)고 하였다. 우리에게는 종교적인 의식과 이기적인 기도만 있을 뿐 정작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나라와 그의 삶은 없다. 이제라도 우리의 거짓과 위선을 깨달아 눈을 크게 뜨고 지금 하나님 나라를 내 안에서 회복하는 것을 인생과 신앙의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교회와 신앙은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의(義)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Ⅱ.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한 교회와 신앙 개혁안

 

49. 산상수훈(山上垂訓)은 예수님이 나지막한 산상에서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 보배로운 가르침이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기록된 수훈은 짧으면서도 간결한 가르침으로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고 세속에 대한 근심과 염려가 없는 평화로 안내하고 있으며 또한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애와 자비의 삶으로 사람 구실을 바르게 하는데 일침(一針)을 주고 있다. 특히 구약과 신약 성경을 대표할 수 있는 산상수훈은 팔복(八福)으로 시작하면서 그 팔복 모두가 하나님 나라(天國)의 실체와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福)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0. 그리고 그 뒤에 열거한 수훈들은 팔복의 실체 하나하나를 펼쳐 놓은 듯 역시 하나님 나라와 그에 상응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가 바른 신앙과 믿음을 지키고 정의로운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결코 수많은 가르침과 배움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팔복만으로도 충분하고, 빛과 소금의 말씀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하며,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나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는 말씀 등 어느 한 마디만이라도 온전히 실천할 수 있다면 본(本)이 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으며 사람 구실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자라야 복이 있는 것이며, 보화는 간직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용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행함이 곧 힘이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설교와 성경 공부 시간들이 변화와 성숙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와 신앙의 진정한 개혁은 삶과 신앙의 일치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에 성경의 진수(眞髓)라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을 통한 개혁의 장(場)을 열고자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

 

51. 예수께서 산상에 모여 있는 군중들을 보시고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 앉으신 후 입을 열어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마음의 영(心靈)이 가난한 자는 복(福)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天國)가 그들의 것’(마태복음 5:3)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과 신구약 성경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으뜸 가르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신앙은 가난한 마음에서 출발하고 일생 그 마음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인생과 신앙의 종착지가 바로 가난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처음 선포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신 그 천국은 바로 가난한 마음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마음이 곧 하나님 나라의 실체이다. 하나님 나라는 화려하거나 웅장한 곳이 아니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별궁(別宮)도 아니다. 하나님은 일정한 공간에 임금처럼 계시는 것이 아닌 것은 무한대의 영(靈)으로 계시기 때문이다. 우주와 천지와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인간 안에 영으로 계시니 곧 우리의 심령이다. 욕심으로 부유한 심령이 아닌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가난한 심령이 곧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하나님은 비움의 신이다. 그래서 진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 마음이 부유하여 욕심이 쌓이면 진리와 영성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2. 그러면 마음의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마음(心)의 본질은 영(靈)이다. 그래서 ‘가난’을 뜻하는 것은 물질적인 경제적 빈곤을 말함이 아니라 영의 빈곤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빈곤은 소유한 것이 전무(全無)한 상태를 말한다. 본래 ‘영’은 보이지 않고 잡을 수도 없으며 들을 수도 없어 이를 ‘없음’(無) 또는 ‘빔’(虛)이라고 한다. 마치 공기나 바람처럼 존재하기에 영은 무엇인가를 소유할 필요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으며, 소유할 마음조차 없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인간의 마음은 미혹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서 늘 욕심을 잉태하고 있는 상태이다. ‘욕심’(慾心)이란 정도에 지나치도록 소유하려는 탐심을 말하니 욕심이 바로 미혹의 영이며 그 미혹의 영이 지금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에 그 욕심의 마음을 텅 비워 빈곤하게 하라는 것이다.

 

53. 본래 인간의 마음은 성령의 마음이었는데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그 성령의 마음이 욕심의 마음으로 변질된 것이다. 변질된 그 마음에 각종 욕심으로 채워져 있음을 예수는 지적하는 것이다. 그 욕심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되었으며 삶의 수많은 고통과 죽음을 초래하게 된 것이니 삶의 의미를 모두 상실한 불행의 나라로 추락을 한 것이다. 세상에서 얻는 돈과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향락 등은 실로 헛되고 헛되며 헛된 것들이기에 삶의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결국 인생과 신앙을 허망하게 할 뿐이니 모든 욕심을 아낌없이 버리고 비우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성취될 것이며 그것이 곧 복(福)이라 하는 것이다.

 

54. 우리에게 가난한 마음 즉 하나님 나라를 얻게 하려고 하나님은 사람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의 탄생 자리는 마구간이었으며, 그의 가정 배경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그의 사회적 배경은 노숙자와 같아 무명인에 불과하였다. 또한, 그의 생애는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과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들 및 정신적으로 갈등하는 사람들 등 사회의 모든 약자와 함께하였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여 고통 가운데서 죽었으니 이는 우리 죄의 대가인 죽음을 대신해서 희생의 번제물이 된 것이다. 이처럼 그는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직 ‘가난한 영’을 떠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가난한 영이었던가? 오직 나와 인류를 온전히 구원하기 위한 가난한 영이었다. 인간의 죄와 허물로부터의 구원이요, 욕심으로부터의 구원이며, 가치 없는 무의미한 삶으로부터의 구원이었으니 구원의 배경은 예수의 가난한 심령이었다.

 

55.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그 사랑을 벗어나 이기적인 욕심만을 구하고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욕심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 욕심을 붙든 채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고 감사하며 사랑한다고 거짓을 말하고 있다. 목사 안수를 받아 성직자가 되고, 세례를 받아 교회의 정회원이 되고, 집사 권사 장로가 되며, 주일성수와 헌금 생활에 충실하면 우리는 구원받고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줄로 안다. 진실로 그러한가? 특히 교회의 물량적인 성장과 교회 부동산의 증가는 목회자의 영적인 능력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대형 교회당의 건축은 목회 성공의 마침표로 여기고 있다. 과연 크고 넓고 높고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당을 하나님의 종(從)으로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영광이며 축복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교회 개혁의 시작은 정도를 넘어선 교회당부터 무너져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겠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은 능력이 부족해서 교회당을 세우지 못했는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사도행전 17:24)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가난한 심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56. 누구보다도 마음이 가난해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부와 명예를 누리며 가난의 영성(靈性)을 상실해 가고 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설교를 하면서 신앙적 양심은 없는가? 돈과 명예를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강론하면서 양심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가 말이다. 하나님이 빔으로 존재하시고, 예수도 빈 마음으로 사셨으며,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빈 마음으로 사역하였고 더욱이 순교의 삶으로 지켜온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우리는 그들과는 달리 채움과 부와 출세와 명예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으니 과연 하나님의 종들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인가?

 

57. 하나님의 종과 성도는 성령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사람들을 일컬으며,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하나가 된 작은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은 빈 영이고 예수는 가난 그 자체였다. 따라서 우리도 마음의 영이 늘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 부유함을 추구한다 해도 우리만은 가난함을 추구해야 한다. 가난한 마음이란 이기적인 욕심이 없는 빈 마음이라 하였다. 가난한 마음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마음으로 비롯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한 마음 그 자체가 곧 천국인줄을 널리 알려야 한다. 이제 무엇을 하든지 어떤 사람이 되든지 우리는 항상 가난한 마음을 떠나서는 아니 될 것이다. 가난한 마음은 믿음의 숙제요 신앙의 해답이다.

 

애통하는 자

 

58. 그리고 ‘애통(哀痛)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늘의 위로를 받을 것’(마태 5:4)이라고 하였다. ‘애통’이란 몹시 슬퍼하며 가슴으로 아파하는 마음을 말한다. ‘애통’의 모본은 하나님과 예수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죄를 범한 후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의 이름을 불렀다.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부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애통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어리석어 하나님 곁을 떠나 욕심으로 인하여 고통 겪을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마음은 몹시 슬프며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녀들을 깨우치고 돌아오게 하려고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세워 경고하고 은혜를 베풀지만,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을 등지고 물질적인 우상을 숭배하면서 축복만을 요구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애통함은 여전하다.

 

59.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옷을 입고 예수의 이름 즉 구원의 주(主)로 오시니 이것 또한 인간을 향한 애통한 심정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외식과 위선에 빠져 있는 교회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말씀을 가르치는 데 온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 하는 것이 곧 애통함의 호소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안타까이 부르시는 것 또한 애통함이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애절함은 인간을 향한 애통함의 절정이다. 하나님과 예수의 애통함은 인간의 죄와 욕심으로 인하여 찢어지는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애통함을 철저히 외면하며 그의 오심과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 등 모든 의미를 상실한 채 육체의 삶을 위한 욕심만을 구하고 있다.

 

60. 우리는 자신의 죄와 욕심으로 인하여 애통해하는가? ‘주님! 나의 죄와 욕심으로 인하여 내 얼굴이 수척해졌으며 나의 뼈와 영혼이 떨리나이다. 나의 영혼을 주의 사랑으로 구원하소서’(시편 6:2-4) 하는 다윗의 기도가 있는가? 우리는 매일 매순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세속의 생각이나 욕심이 침투해 올까 염려하며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그 순간을 방심하여 미혹의 영에 빠지지 않았는가? 또한, 백성들과 나라의 지도자들이 욕심과 욕망으로 인하여 부정과 비리가 난무할 때 우리는 애통해하는가? 혹시 비난과 비판의 돌을 던지고 있지는 않은가? 비난과 비판은 정의가 아니다. 그들을 향한 애통함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61. 나를 백성과 나라와 분리할 수 없기에 그들의 죄와 욕심은 곧 나의 죄와 허물이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우리도 남모르는 죄와 허물을 얼마나 많이 품고 행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향한 애통을 토(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시 돈과 재물과 명예와 권세가 상실되어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는가? 우리는 몸나(自我)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한다. 반면에 참 나(眞我)와 영성을 잃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식이 없다. 죄와 욕심에 대한 내성(耐性)이 생겨 당연한 것이 된 것이다. 그래서 애통함을 잃으면 죄와 허물에 대한 감각이 없어진다.

 

62.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서 욕심이 사라져 가난한 마음을 이룬다면 나와 다른 사람의 죄와 욕심으로 인하여 진실로 슬프고 마음이 아파 괴로워하며 애통하게 될 것이다. 애통함은 가난한 마음이 근간이 되어 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성직자들은 가난한 마음을 회복하고 애통함으로 교회와 나라와 백성을 돌보아야 한다. 욕심으로 인한 죄악들이 관용한 현실을 직시하며 성직자들은 애통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성직자들과 위정자들은 나라와 백성을 항상 끌어안고 희로애락을 함께 해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의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고 우리의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야 한다.(야고보서 4:8-9) 진실로 나와 세상을 위한 애통함은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이보다 더 큰 위로와 복은 없을 것이다.

 

마음이 온유한 자

 

63. 그리고 ‘온유(溫柔)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마태 5:5)이라고 하였다. 온유함이란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말한다. 예수는 온화한 음성으로 우리를 부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 11:28-30) 하였다. 온유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상대를 존중하는 사랑함이 결합된 유순(柔順)함이니 역시 가난한 마음이 그 바탕이 된다. 자신이 비워질 때 온유는 저절로 발로될 것이다. 또한, 온유함은 짓밟힘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할 때 등 억울한 상태에서도 발휘한다. 당시 유대 땅은 로마의 속박을 받고 있었으며, 헤롯왕은 나라와 백성을 돌보지 않은 채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외식과 위선에 빠져 있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죄인 취급받는 약자들은 항상 천대를 받아 차가운 곳에 버려져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약자 자신들의 유약(柔弱)함을 스스로 원망하거나 세상을 향해 분노할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승화하여 인내하며 마음의 평화 얻을 것을 권면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64. 당시 유대교의 열성당원들은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있는 로마를 향해 분노와 살인을 일삼았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정당하다고 여겼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 분노하고 복수를 하는 행위는 자신과 이웃들에게 더 큰 고통과 화(禍)를 초래할 뿐이니 언제나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온유함은 적극적인 사랑이다. 물은 항상 주어진 환경과 여건을 탓하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순응하기에 최고의 선(善)으로 비유되고 있으니 물의 온유한 성질은 하나님의 품성을 보는 듯하다. 교회 안팎에서 다툼과 송사하는 일들이 생기는 것은 서로가 온유함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참는 것은 온유가 아니다. 나에게 해로운 일일지라도 불평이나 분노가 없이 그대로 그 환경에 순응하는 마음이 온유함이다. 예수는 모진 박해와 억울한 누명 그리고 제자들의 배신 앞에서도 변함없이 항상 온유한 품성을 보였으니 과연 온유 그 자체는 하나님 나라이기에 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 빈 마음일 때 가능해질 것이다.

 

65. 세상에는 언제나 온유함보다는 강함이 우위(優位)에 있어 왔다. 온유는 따뜻하고 부드러워 순하기에 늘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아 겸손하기까지 하다. 온유와 겸손은 마치 부부 관계처럼 한 쌍을 이룬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온유함과 함께하지 아니하고 강함에 아첨한다. 그것은 온유함의 성질은 세상에서 늘 얻어맞는 자리에 있고 강함은 늘 때리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힘(力)이 작용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강함은 온유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를 하며 미워하여 적대감을 느낀다. 사람들의 시선을 온유에서 강함으로 끌어오려는 심리이다. 그래야 강함,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파 지도자들이 그러했기에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며,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도 교회 내부에서 다툼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자기 사람들을 모아 불법이나 불의를 정당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66. 예수님의 온유함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늘 강직함으로 예민하게 대립각을 세우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고 나서야 만세를 불렀다. 강함이 온유함을 이긴 것이다. 온유함의 존재를 없애면 강한 자신들만 남으니 강한 세력의 존재가 정당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강함이 지나치면 오래가지 않아 반드시 꺾이고 부러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요 하늘의 법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겪는 동안에도 죽이라고 아우성을 치던 사람들의 고성이 메아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이다. 온유함과 겸손함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결국, 온유는 싸우지도 않고 강함을 이긴 것이니 온유(溫柔)는 유약(柔弱)이 아니라 인내 속의 강함이다. 온유는 시기와 질투와 미움 그리고 원망을 모르니 강함과 다투지 않는다. 언제나 승패를 떠나 긍정하고 웃을 뿐이다.

 

67. 세상에서 물처럼 온유한 것은 없다. 그러나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는데 물만한 것은 없다. 이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부드럽지만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 산천초목도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죽으면 말라서 뻣뻣해진다. 그래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성질이고 부드럽고 유연한 것은 삶의 성질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매사에 이기와 욕심과 독선으로 강한 자는 신뢰와 존경을 잃으니 살았어도 죽은 자요, 범사에 친절함과 양보와 관용으로 온유한 자는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가난하고 신분이 낮아도 진실로 높은 자이다. 그래서 강한 것은 아래로 떨어지고 온유한 것은 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의(義)에 굶주린 자

 

68.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마태 5:6)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의’(義)라 함은 인간의 의를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말함이다. 인간의 의를 인위적으로 행하는 도덕과 윤리라 한다면 하나님의 의는 자연적이면서 본성적인 하늘의 덕 또는 선함 즉 ‘사랑’을 의미하는데 ‘의’를 직역하면 ‘하나님’ 또는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라는 것은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갈망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마태 6:33)이다.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는 것은 세속을 향한 마음이 텅 비워진 가난한 마음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덕을 세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갈망하라는데 도리어 세속의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있는 실정이다. 세속의 것은 재물이든 명예이든 권력이든 무엇이든지 배부를 때가 없이 항상 배가 고프니 이는 욕심으로 인하여 자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약시대의 위정자들은 물론 교회 지도자들까지 호의호식(好衣好食)과 함께 권세를 자랑삼고 사회의 약자들을 업신여기며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으니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과 각계의 지도층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함이 전혀 없기 때문일 것이다.

 

69. 의로운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갈망하였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편 42:1) 하였으며 또한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을까!(시편 42:2)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편 63:1)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응답을 발견하였으니 ‘하나님이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편 107:9) 하고 고백을 하였다. 누가(Luke)도 ‘굶주리는 자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다’(누가복음 1:53)고 하였으며 또한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라’(누가 6:21)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에게는 세속의 것을 얻을 때와는 달리 심령의 배부름과 풍성함을 누리게 되니 곧 만족함과 평화함과 기뻐함이 가득한 것이다. 육적 그리스도인은 육적인 배부름을 갈망하고, 영적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배부름을 갈망하니 나는 거짓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참 그리스도인인가?

 

70. 예수의 생애는 그 자체가 의를 행한 생애였으며 늘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었기에 그의 사랑의 덕은 쉴 곳이 없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부족한 것을 몰라 ‘의’ 즉 사랑을 행해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다. 이웃의 슬픔과 아픔과 괴롬에 관한 관심이 없어 그들을 향한 마음은 늘 굳게 닫혀 있다. 그러나 예수는 모든 약자에 대한 애정이 깊어 결코 그들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늘 심령이 가난하여 약자들의 근심과 고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의에 대한 지극한 갈증은 십자가상에서도 나타났으니 ‘내가 목마르다!’ 하시고 운명하셨다. 십자가상에서 오랜 시간 매달려 있어 몸이 지쳐 목마르기도 하였지만, 이는 상징적인 말이고, 그 갈증의 진실은 아직도 사랑을 베풀어야 할 약자들이 너무 많은데 그들을 속절없이 떠나야 하는 자신의 마음에 의와 사랑에 대한 갈급함이 심함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71. 이제는 예수님이 남겨주신 숙제들을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세상에는 시대와 나라와 종교를 떠나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늘 수 없이 존재해 왔다. 그것은 사랑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이 베풀지 않고 자신에게만 베풀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자신 안에서부터 죽이고 대신 이기적인 욕심만을 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정의가 사라진 것이다. 불의를 위한 거짓 정의가 정의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독립된 작은 사회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물질적으로나 인격적으로 항상 평등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는 불평등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의 주제가 생명과 사랑이기 때문에 교회와 신앙의 주제도 역시 생명과 사랑이어야 한다. 삶(生)이란 생명의 작용을 말하며, 그 생명의 작용이 곧 사랑의 드러남이요 하나님의 드러남이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의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목회자들이 교회와 이웃과 지역 사회의 약자들을 외면한 채 교회 사역을 하는 것은 목회가 아니라 경영을 하는 위선자일 뿐이다. 사랑의 의를 행하는 것이 곧 진정한 목회이기 때문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

 

72. 그리고 ‘긍휼(矜恤)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마태 5:7)이라고 하였다. 긍휼이란 불쌍하고 가엾이 여기는 자비심을 말한다. 긍휼의 원천은 하나님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과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곧 긍휼의 실체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면 예수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며 예수 또한 세상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보다 더 큰 긍휼과 자비와 사랑은 없다. 긍휼의 영성은 마치 물과 같아 항상 자신의 위치보다 아래로 흐르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긍휼은 낮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 베풀 수 있는 영성이다.

 

73.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긍휼’이 풍성해야 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았지 않았는가? 나도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어야 하나님의 긍휼이 내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긍휼은 이미 내 안에서 죽고 사라진 것이니 어찌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니 베드로는 그 의미를 몰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앞장서서 막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는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 16:21-24)고 하였다. 세상을 긍휼히 여기는 일에는 자기 부정이 앞서야 한다. 자기 부정이 곧 가난한 마음이다. ‘나’를 주장하면 결코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없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없는 것이다. ‘나’라는 아상(我相)이 사라질 때 비로소 마음의 영(靈)으로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그 긍휼의 대상은 인종과 종교와 재산의 능력과 사회적 신분 등을 초월한다. 긍휼의 영성은 나는 죽고 이웃을 살리는 영성이다. 그리고 그 긍휼의 영성은 신령과 진정한 예배의 시작이 될 것이다.

 

74. 하나님의 긍휼은 나를 통해서 이웃과 세상으로 흘러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알리는 일은 이웃과 세상에 대한 긍휼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보다는 긍휼을 받아야 할 사람들로 가득하다. 바울도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8:12)고 하였다. 내 안에 긍휼이 없는데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가 원하는 복을 얻기 위함이요 사후에 천국에 가겠다는 마음뿐이니 이러한 이기적인 욕심이 어찌 복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긍휼의 영성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긍휼의 영성은 어미의 젖과 같은 것으로서 신도들과 세상을 향해 언제든지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긍휼의 영성은 메마르고 권위와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세속적인 부귀영화와 문명과 문화 누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는 사리사욕에 눈이 먼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자일 것이다.

 

75.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슬프다 죄를 범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이사야 1:2-17)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적인 의식과 기도와 헌신을 가증스럽게 여기시니 이는 이기적인 축복을 기대하며 형식적인 의식만 행하는 우리의 외식과 위선을 악행이라 하여 크게 책망하는 것이다. 신령과 진실이 결여된 채 교회 마당만 밟으며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먼저 선한 행동과 정의를 배워 가난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불쌍한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진정 살아있는 예배라고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의식(儀式)이 먼저인가 긍휼이 먼저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신앙과 믿음의 본질인가를 확인시켜 주고 있는 말씀이다.

 

76. 또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해결해 준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라 하였으며(예레미야 22:16)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무시하지 말며 너희가 서로 해(害)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도 말라(스가랴 7:10)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호세아 6:6)고 하였으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 베푸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신다. 그뿐인가? 예수님도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태 9:13)고 하였으며 또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을 것(마태 12:7)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신앙에서 예배와 긍휼을 맞바꾼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보다 더 소중하고 앞서야 하는 것이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요 하나님께 가장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일이 곧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일임을 깊이 명심하고 우리의 목회와 믿음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할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

 

77. 그리고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마태 5:8)이라고 하였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깨끗한 마음, 맑은 마음,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정조 있는 마음을 의미한다. 속과 겉이 다르지 않아 꾸밈과 거짓이 없어 위선되지 않은 정직한 마음이다. 세례의식은 온갖 욕심으로 더럽고 추한 마음과 양심을 깨끗이 씻어내는 정결한 의식으로서 순전함과 경건함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났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죽음과 하나 되어 세속을 향한 모든 욕심이 죽고, 예수의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얻어 새 마음을 이룬 것(로마서 6:4)이니 곧 청결한 마음이다. 욕심은 더러운 영이요 미혹의 영이며 거짓 영이니 추한 것으로서 청결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마음이 깨끗하고 맑아 순수하면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 자리이니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78. 청결한 마음은 세속에 대한 욕구와 욕심이 없어 항상 깨끗이 비워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에 청결함도 가난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특히 돈과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극히 불결하고 거짓된 마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니 이는 신성모독이 되는 것이다. 에덴에서의 뱀의 등장은 곧 욕심의 등장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물질’을 숭배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더럽고 부정한 욕심이 섬기는 우상(偶像)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과 진리를 빙자하여 물질을 구하며 섬기고 있으니 어찌 우상 숭배가 아니겠는가? 진정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없고, 교회 지도자와 신도들의 마음 중심에도 없으니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이 항상 순수하고 진실하기를 원하신다.(시편 5:16) 순수함과 진실함은 한마음을 품은 것이니 곧 청결함이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하면 삶의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한다고 하였다.(시편 24:4)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청결의 영성이 깊은 잠에 빠지지 않도록 늘 신령(神靈)으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79.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외식(外飾)과 위선(僞善)이 가득하여 하나님과 예수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들어야 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처럼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마태 23:25-28)라고 하였다. 오늘 교회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속과 겉이 달라 잘 난 자에게는 친절을 베풀고 못 나 보이는 사람에게는 성의 없이 대하거나 외면을 한다. 그러면서 종교의식을 거룩히 인도하고 진리를 사람의 교훈으로 전하며 온갖 욕심을 부린다. 우리는 이미 화(禍) 안에 깊이 빠져 있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80.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은 오직 인류를 온갖 욕심으로부터 구원을 이루기 위함인 것을 정작 모르는가? 그런데 여전히 욕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며 그 욕심을 채워달라고 부르짖고 있으니 진정 교회의 지도자는 없다는 말인가? 굳이 대형 건물과 화려함과 웅장함이 왜 필요하며, 목회자의 권위와 독선이 왜 드러나는가? 교회가 재산을 형성할수록 목회자의 사리사욕만 높아지고, 각종 부정과 비리가 생기기 마련이며,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니 스스로 부패하고 타락하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목회자가 세속적인 부자가 되는 것은 욕심의 결실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는 어떠한 변명이나 변호도 할 수 없다. 목회자는 누구보다도 비움과 나눔의 선두에 서야 할 예수의 제자요 성직자이다. 비움과 나눔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욕심을 모르는 청결한 사람이요 사랑의 사람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정조를 지키는 청결한 마음이어야 한다.

 

화평케 하는 자

 

81. 그리고 ‘화평(和平)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마태 5:9)이라고 하였다. 화평이란 내면적으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뢰와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하며, 외면적으로는 세상이나 이웃을 향한 미움과 원망과 다툼이 없이 서로 사랑과 신뢰로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예수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어 둘이 아닌 하나이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 사랑 안에서 나와 이웃이 하나 되어 마음과 물질 등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화평이다. 이웃과 늘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사회적 도덕과 윤리적 의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평이 온전히 실현되었을 때 이웃과의 화평은 내 안에서 하나님의 본성이 작용하여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면 나를 통해 하나님의 평화가 나눠진 것이니 나는 작은 하나님(god)이 된 것으로서 이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다.

 

82. 과연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나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한 교회 생활이 아니라 이웃 사랑이다. 교회에서의 세례와 직분과 연조를 자랑 하면서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업신여기는 일이 있다면 그는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욕되게 한 범법자일 뿐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며 헌신한다면 그 사람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컬음을 받는다(로마서 2:24-29)고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본성이 작용한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83.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이웃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은 이기적인 욕심을 모르고 늘 마음이 비어 있기에 이웃 사랑이 무의식중에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마음이 전제될 때 하나님과의 평화와 이웃과의 화평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마음이란 하나님 마음이요, 성령의 본성이다. 대체로 사회적 신분이 높고 물질적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마음이 굳고 교만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표면적으로만 보일 뿐 내면에는 하나님도 이웃도 없다. 웃는 얼굴이 화평이 아니라 낮아지고 비워진 마음이 화평을 이루는 것이다.

84. 그러므로 우리는 몸에 세례를 받을 것이 아니라 심령에 세례를 받아 진정 거듭난 자가 되어야 한다. 세례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이웃과의 화평을 상징하는 십자가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저버렸으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과의 화평도 이루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논하고 있었다. 화평을 모르는 자들은 십자가의 정신을 모르는 자들이요, 그 정신을 상실한 자들의 목회와 신앙과 믿음은 모두가 위선일 따름이다. 화평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정신으로부터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한 것이니 어찌 하나님의 종들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이라 하겠는가?

 

85.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도 화목의 직분을 맡기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웃과 세상을 향해 화목의 사신으로 살 것을 부탁하였다.(고린도후서 5:18-20)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나누어야 한다.(로마서 12:18) 만일 화평함과 거룩함을 떠나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히브리서 12:14)고 하였다. 화평은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이며 사랑의 본질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을 떠나 이기와 욕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과의 화평은 물론 이웃과의 화목도 영원히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이웃과의 화평과 화목은 자신의 수고와 희생, 이해와 양보, 겸손과 온유 등이 전제될 때 가능할 것이니 곧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86. 그러므로 우리는 시기와 미움과 성냄과 다툼과 분열 등 모든 악행을 죽이고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고 관용하며 사랑하여 언제나 화평과 화목을 이루어 평화가 가득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예배와 예물보다 더욱 소중한 것이 바로 화평이요 화목이라 하였다. 십자가의 정신이 실현되는 일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종교적 의식보다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어울리며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요구하신다. 인애와 자비를 통한 화평과 화목 그 자체가 신령한 예배요 예물이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 일에 교회 지도자는 항상 화평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다 하였으니 화평을 상실한 것은 곧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상실한 것이다.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

 

87. 그리고 ‘의(義)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 5:10-12)라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한 ‘의’는 지금까지 열거한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를 목말라 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청결한 마음 그리고 화평케 하는 마음 등 일곱 마음 행하는 것을 ‘의’라고 한다. 이 일곱 마음은 각각 독립된 영성이 아니고 모두가 본질적인 면에서 성령의 마음으로서 때에 따라 적절한 영성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세상에서는 보기 쉽지 않은 하나님 마음이요 예수의 품성이기에 이러한 마음과 품성을 지니고 행하는 사람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받아 왔다.

 

88.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런 사람에게 흠과 티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가 억지 트집을 잡아 확대하여 비난을 퍼붓는다. 이런 것을 의로 인한 박해(迫害)라고 한다. 특히 박해는 강자가 약자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무차별적으로 돌을 던지는 물리적인 힘의 오남용이다. 세상에서도 강자들이 약자들을 상대로 핍박과 박해하는 소위 갑질을 할 때 힘을 이용해서 선량한 백성과 시민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불의가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는가? 종교적인 박해와 인종 차별적인 박해와 정치적인 박해 그리고 인격적인 모독의 박해 등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사회와 교회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불의가 정의를 향한 미움과 시기와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곧 박해이다. 정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니 세속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과연 예수의 생애를 보면 그는 진정 복 받은 사람이다. 박해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없던 것은 천국을 누려서일까? 그렇다면 참으로 복 받은 위인이다.

 

89. 박해를 받는 사람은 박해하는 자들과 차별이 분명한 인격과 품성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쏟아지면 마음속에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과 차별된 사람에 대한 시기와 미움이 분노를 일으키고 자신의 부족과 부정함이 반사적으로 드러나니 체면과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마음을 보면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고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인데 도리어 박해의 기회로 삼는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 자신들의 약점과 부정이 드러나게 되니 반사적으로 예수의 약점을 찾으려고 덤벼든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넣고 기어코 만세를 부른다. 이러한 모습들이 세상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또한 불미스럽게도 교회 안에서도 자행되고 있다. 악이 선을 이긴 듯 보이지만 결국엔 선이 다투지 않으면서도 악을 이기는 것이 자연의 섭리요 하나님의 섭리이다.

 

90. 목회자가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동조자들을 모아 세력을 형성한 뒤에 음모를 꾸미어 반대 세력들을 비난하고 비판하며 박해를 가하여 쫓아내고 있다. 어느 안건을 제시할 때 절대적인 지지를 얻는 것이 아니면 시행할 것이 아니라 일단 철회를 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비난과 다툼과 분열이 생기면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목회자의 부도덕한 일이나 부정한 일 등 사리사욕에 대해서 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짓밟는 행위를 하는 것은 부메랑이 되어 결국 자신을 스스로 박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반대로 교회 대표자들이 선량하고 의로운 목회자를 자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하여 소리 없는 박해를 하여 견디지 못하게 하는 일도 있으니 이런 행위들은 모두가 속히 멈추어지고 참회할 일들이다.

 

91. 앞에서 열거한 일곱 마음으로 인하여 비난과 박해를 받으면 도리어 기뻐하고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일곱 마음은 그 자체로 천국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가난함은 모든 욕심으로부터 자유하고, 애통해하는 마음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친구로 삼으니 벗이 있어 즐겁고, 온유한 마음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니 고요와 평화가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은 인애와 자비심이 샘솟듯 하니 신비롭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하늘 마음을 널리 선물하니 기쁘고, 청결한 마음은 맑고 순수하니 청아하고, 화평케 하는 마음은 십자가의 사랑이니 관용이 따른다. 이러한 마음의 의를 하나로 담고 있으면 핍박과 박해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인내와 지혜를 얻게 될 것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서 이루어져 두려움을 모르는 행복에 잠겨있기 때문이다. 도리어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을 수 있는 것(로마서 12:14)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福)은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마음의 행복이요 영생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이다.(시편 133:3) 그래서 행복의 근원은 가난한 마음과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다. 행복과 영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이며 최고의 상(賞)이다.

 

팔복의 영성은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門)

 

92. 지금까지 살펴본 여덟 가지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밝혀주는 귀한 가르침이다. 단순히 교회를 잘 다니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 안에 그리고 가정과 교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어가는 과정을 걷는 것이 곧 신앙과 믿음의 길인 것이다. 영적으로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마음이 이루어질 때 애통 온유 의 긍휼 청결 화평 그리고 순교 등 일곱 마음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이지 만일 가난한 마음이 형성이 안 되면 결코 그 나머지 일곱 마음도 형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거짓된 영성들을 만들 수는 있지만 거짓된 영성은 자신의 양심이 알고 주변 사람들이 알며 하나님이 아신다. 우리의 눈과 표정은 마음의 거울이다. 진실한 사람인지 혹은 거짓된 사람이지 그 사람의 얼굴과 언행을 보면 알고, 삶의 내용을 보아도 그 사람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인지 혹은 욕심 많고 교만한 사람인지를 안다. 팔복의 영성은 성령의 사람이 아니면 드러날 수 없다. 그 영성은 성령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93.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복’을 원하지만, 물질의 복만 구할 뿐 내면의 복 즉 심령의 복을 모르고 있다. 물질의 복은 참복이 아니라 어찌 보면 화근(禍根)이 될 수 있음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심령의 복은 화근이 없다. 여덟 가지의 마음은 그 자체로 영성이고 존재이기에 복의 근원이 된다. 나의 존재의 의미는 여덟 가지의 마음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팔복(八福)의 바탕이 하나님 나라요 교회이며 신앙과 삶의 터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팔복에 걸맞은 성직자와 성도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가 교회 지도자를 따를 때 실속 없는 학벌과 교회당의 규모와 언변 등 육적 배경을 보고 따르면 함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지만 내적인 하늘 마음을 보고 따르면 함께 행복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94. 진리는 내적인 행복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 종교적 의식이나 축복을 위한 축문(祝文)이 아니다. 진정한 교회 지도자와 성도는 팔복의 영성으로 가늠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 팔복의 영성을 널리 전파하여 모든 이들의 인품과 삶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파장을 일으켜야 한다. 세상과 교회가 전반적으로 돈과 권력에 의한 부정과 불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는 것은 진리가 죽고 팔복의 영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질의 다소(多少)와 상관없이 행복의 지수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팔복의 영성이 드러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복(福)은 하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가 바라는 물질적 축복이 아니니 기복 신앙을 철저히 배척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팔복의 영성과 반대편에 머물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팔복의 영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이요 순복해야 할 진리이며 살아야 할 생명이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95.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허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였다.(마태 5:13) 여기서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몸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여 형상과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영으로는 소금이라는 공통된 이름과 존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소금’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나의 ‘존재성’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할 때 ‘나는 소금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소금이라는 것(You are the salt of the earth)이다. 소금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결정체가 자연적으로 녹는다. 그리고 결정체 안에 있는 ‘짠맛’으로 자기의 사명을 다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항상 몸의 형상을 위한 욕심은 죽이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으로 세상에서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

 

96. 우리가 교회와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거짓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미 끊어진 것이니 이는 진리가 우리 안에 없어 영이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영이 죽으니 자아가 마음껏 욕심을 부리며 세속의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다. 영이 죽으면 인생과 신앙의 가치관이 물질로 전도(顚倒)되어 자신의 정체성 즉 소금의 짠맛이 죽은 줄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니 영적 감각 즉 영성(靈性)이 죽었기 때문이다. 영성이 죽었으니 참살이를 잊은 채 몸살이를 위한 욕심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찍이 교회 안에 팔복의 영성은 사라지고 아집과 이기와 욕심만이 살아 세상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잃어 외면을 받고 있다. 그래서 자기 부정과 자기희생 즉 가난한 마음이 없으니 교회와 세상에 화목과 화평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외면을 남의 일 보듯 하고 있다. 이는 영성에는 어두워지고 세속으로만 밝아졌기 때문이다.

 

97. 그러면 소금의 짠맛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금의 정체성은 ‘짠맛’이다. 소금이라는 결정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짠맛이 중요한 것이니 소금의 생명은 바로 짠맛이다. 소금이 소금 되게 하는 것이 짠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짠맛을 잃은 것은 곧 생명을 잃은 것이니 죽은 소금이 되어 쓸모가 없기에 버려지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몸이 있어 사람인 것이 아니라 생령(生靈)이 있어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란 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생령을 지칭하는 것이니 살아있는 영이다. 소금이 사람의 몸이라면 소금의 짠맛은 곧 생령이다. 생령의 본체는 성령이요 하나님의 형상이며, 성령의 본질과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이다.

 

98. 그러므로 사람의 정체성이 소금의 짠맛이라는 것은 내가 곧 ‘사랑’이며 ‘사랑’이 곧 ‘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을 잃으면 어찌 하나님의 사람이며 또한 무엇으로 교회와 세상에서 구원과 화평을 이룰 수 있겠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세상에는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지금까지 사랑을 잃어 더욱 메말라 가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이 없음이요 십자가의 정신도 사라짐이며 성령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라고 주장하고, 교회 지도자라고 우쭐대며, 성도라고 간증할 것인가? 단지 영과 진실이 사라진 거짓과 위선된 ‘교회 생활’로 구원과 영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인가? 사랑이 사라진 아집과 이기와 욕심이 우리의 심령과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면 교회는 이미 하늘로부터 버려진 쓰레기 소금 더미일 뿐이다.

 

99. 바울은 온 율법과 강령이 되는 사랑의 말씀을 외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I am nothing),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I gain nothing)고 하였다. 여기 ‘사랑이 없으면’ 하는 것은 ‘소금의 짠맛이 없으면’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쓰레기에 불과하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교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사랑의 짠맛을 잃지 않았는가? 사랑의 결정체는 십자가 정신이다. 십자가 정신은 ‘나’가 없다. 오직 ‘너’만 있을 뿐이다.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와 우리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100.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처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14-16) 하였다. 여기서 우리의 정체성 하나를 더 첨언(添言)한다. 나는 누구인가 할 때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빛’이란 어둠을 밝히는 착한 행실로서 삶의 본(本)을 말하며, ‘어둠’이란 이기와 욕심으로 얼룩진 세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한 것이다. 빛 된 착한 행실이란 도덕 윤리적인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표본으로서 팔복의 영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빛’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일컫는다.(요한일서 1:5) 그래서 착한행실이라는 빛은 인간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이다.

 

101. 태초에 말씀(道)이 성령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곧 말씀은 하나님이라. 만물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그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는데 이 생명은 사람들을 향한 빛이라(요한복음 1:1-4)하였다. 그 ‘빛’은 예수를 의미하며 예수가 어둠의 자식인 우리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셨는데 어둠인 우리가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고 하였다. 그 뒤 우리는 지금까지 어둠으로 살 뿐 빛에 대한 관심조차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상실하여 세상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삶의 표본이 없다. 오히려 교회와 종교가 세속의 문명과 문화 그리고 유행을 배우며 좇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세상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 보고 배워야 하는데 도리어 우리가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고 배우며 세상과 한 무리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열고 가르치며 배우고 있는데 그 가르침과 배움 모두가 형식과 의무에 그치고 있으니 무가치한 일들을 왜 멈추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빛을 잃은 목회와 설교와 예배와 가르침과 배움과 찬양과 기도와 헌신 등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

 

102. 우리가 진정 그의 죽음과 함께 죽었다면 분명 우리는 어둠의 삶을 벗어나 빛 된 삶으로 부활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와 십자가의 정신은 지식과 교리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빛’으로 오신 예수를 ‘믿는다’는 빌미로 그의 삶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세속적인 복을 바라고 있다. ‘믿음’이란 나의 인생을 그에게 ‘맡긴다’ 또는 완전한 결합으로 그와 ‘하나가 된다’라는 뜻을 가진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연스럽게 빛 된 삶으로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집과 독선과 재물과 출세와 성공 등 세속적인 많고 넓고 높은 것만을 추구하고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교회는 늘 어둠에 깊이 빠져 있다. 나는 지금 빛이 아니라 어둠인 것을 아는가?

 

율법의 완성

 

103. 그리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거나 말로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태 5:17-19) 하였다. 율법(律法)이란 인간이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이다. 그 계명은 처음 인간이 지음을 받아 존재하면서부터 주어진 사랑의 계명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을 법조문으로 구속하거나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화를 영원히 누리게 하기 위한 계명이다. 인간 앞에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두 개의 길이 있으니 죽음의 길을 가지 말고 생명의 길로 가라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계명이기에 사랑의 계명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품성을 보여준 것이기에 언제나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로마서 7:12)이라고 하였다.

 

104.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계명은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와 생명의 나무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세기 2:16-17) 한 것이다. 생명 나무는 하나님 사랑을 상징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는 탐심을 상징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독(毒)이 되는 것을 미리 알려주어 먹지 말라 한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그 자체가 생명이고 양식이 되어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탐심은 소유하고 먹을수록 더욱 갈증을 유발시키어 끊임없이 부족하고 목마르게 한다. 아담 부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지 못하고 탐심을 쫓아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상실한 채 갈증 속에서 살아야 했는데 아담 부부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105. 아담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상실하여 하나님 없이 율법과 계명만 남으니 율법이 무거운 짐이 되었고 올무가 되었다. 사람의 의지로 행하려 하니 힘들고 지치는 것이다. 그래서 겨우 하나님의 계명을 흉내라도 낸다는 것이 의무와 형식적인 종교적 의식(儀式)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신령과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식으로 부득이 행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의무와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라 영혼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나누자는 것이다. 영과 영의 만남, 진리와 진리의 만남, 진실과 진실의 만남, 사랑과 사랑의 만남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동행이요 교제이며 이것이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의무와 형식에 그치고 기복만을 바라며 하나님과의 만남과 동행과 교제 등 진정한 사랑의 교통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영으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관념으로 의식하고 있어 인위적으로 계명을 문자대로 지킬 것을 강조할 뿐 계명의 의미는 여전히 살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06. 예수님이 세상에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기 위해 왔다고 선언하였으니 사랑으로의 완성이다. 가난과 질병과 방탕 또는 방황 등으로 교회와 사회로부터 외면받는 약자들을 찾아간 것이 예수의 사랑이었으며 예수에게 험담과 오욕과 박해를 가하는 자들을 향해서도 관용을 베푼 것이 사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까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였으니 그 용서는 가장 큰 사랑일 것이다. 예수는 오직 사랑으로 온 율법을 준수하고 완성하였으니 예수에게는 율법의 조문과 준수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로마서 13:8-10) 한 것이다.

 

107.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거나 말로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한 것이다. 나는 계명을 따르지 않으면서 신도들에게는 계명을 따라야 할 것을 강요하거나 자신은 행하지 않으면서도 선생 노릇만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할 것이라고 하였다. ‘지극히 작다’라 함은 천국에서는 그의 흔적에 대해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외식과 위선으로 평생을 산 사람들은 거짓된 사람들이기에 처음부터 천국 백성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교회의 직분과 상관없이 천국에서는 가장 큰 자로 추대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작은 성인들이라는 것이다.

 

108. 우리의 인생과 신앙에는 오직 ‘사랑’뿐이며 삶과 신앙은 분리되지 않아 신앙은 곧 삶을 말하며 삶이 곧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아닌 생활신앙이 되어야 한다. 종교적인 의식(儀式)과 기복(祈福)은 물신(物神) 숭배요 무속 신앙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삶으로 완전히 드러낸다면 율법과 계명과 모든 종교적 의식은 자연스럽게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신앙과 믿음이 존재하는 이유는 의식(儀式)과 기복(祈福)이 아니라 오직 ‘사랑’이다.

 

교회 지도자들의 위선(僞善)

 

109. 예수님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道)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 5:20) 하였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이 목적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심령에 하나님 나라(道)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이유도 그러하고,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한 것도 하나님 나라를 우리 안에 그리고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함이다. 여기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당당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서기관은 율법에 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신학자이며 바리새인은 율법을 가르치며 종교적 의식을 인도하는 성직자이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것은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있으며 잘 준수한다 하여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의 준수라기보다는 지식과 경륜과 지도자라는 위치에 대한 우쭐한 마음이 앞서서 교만할 뿐 진리의 준수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관심은 없다. 하나님 나라는 지식과 경륜으로 사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 즉 사랑의 생활화로 지금 마음 안에서 누리는 것이 곧 천국이다.

 

110. 특히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권위 의식이 강하여 매사에 교만한 마음을 보였으니 그 교만은 마귀의 속성이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니다. 하나님은 권위가 없고 오직 사랑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면서 겸손한 모양을 내고, 더럽고 추하면서 거룩한 모습을 보이고, 율법의 정신도 모르면서 지식과 성직을 자랑삼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며,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타인을 가르치고, 자신을 정죄하고 심판해야 할 사람들이 타인을 정죄하며 심판 하는 위선자들이니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교회 지도자들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형식과 의무를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말로만 가르치는 자와 행함으로 본을 보이며 가르치는 자와는 그 말로가 현저히 다를 것이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듯이 지도자들의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11.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거짓이요 위선이니 본받지 말라 하시면서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무거운 일감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올리면서 정작 자신들은 그 짐을 지기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과 혀만 움직이고 있으며, 거룩한 행동이나 보이면서 어디서든지 상석에 앉기를 당연시하며 또한 지도자와 선생 노릇하기를 즐기며,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크고 높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마태 23:1-12)이라고 하시며 크게 책망하였다.

 

112. 이런 사람들은 결국 영이 황폐하게 되어 버려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마태 23: 38-39) 예수님의 책망은 그들이 저주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심으로 참회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온전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들을 귀가 막혔고, 보는 눈이 가려지고, 깨닫는 영이 어두워 예수님의 무거운 책망을 경솔하게 여겼다. 외식과 외선은 인위적인 꾸밈이요 가장(假裝)이며 거짓이다. 성령 하나님의 개입과 은혜가 전무(全無)한 상태이니 어찌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교회 지도자는 나라와 백성들 그리고 교회 안의 성도들을 정신적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님 대신 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자임을 결코 잊지 말고 범사에 본이 되고 덕이 되어야 한다. 겸손과 온유함, 절제와 검소함, 무욕과 무소유 그리고 인애와 자비를 외면한 지도자라면 차라리 참회하며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일 때 더욱 존경스러울 것이다.

 

분노하지 마라

 

113. 그리고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향하여 바보 멍청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 5:21-22) 하였다. 살인은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가장 포악한 행위로서 누구든지 무슨 일로든지 살인을 생각에서조차 그려서는 안 된다. 살인의 동기는 시기 질투 미움 원한 분노 비아냥거림과 막말 등이다. 이러한 마음은 실로 덕(德)이 크게 결여된 사람들로서 교만과 오만의 극치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분노와 막말은 상대방의 인격적인 모독이요 정신적인 살해 행위로서 살인과 동등하게 여긴다.

 

114. 또한, 바보 멍청이 또는 미련한 놈이라는 경멸스러운 모욕도 살인과 동등한 의미로 취급을 하였다. 바보 멍청이라는 말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나 머리가 텅 빈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상대방에게는 크나큰 모욕이 되며, 미련한 놈이라는 말은 너무 무식해서 아는 것도 전혀 없다는 경멸의 욕이 되기에 역시 인격적인 모독이요 심리적 내지는 정신적 살해가 되기에 충분하다. 때때로 이런 모욕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으니 어찌 살인 행위와 다르겠는가?

그뿐 아니라 모욕을 당하는 쪽에서 분노를 일으켜 무의식중에 살인을 행하는 때도 있으니 참으로 모든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 관리를 잘하는 수신(修身) 수행이 필요하다. 인위적인 수행보다는 팔복의 영성이 내 마음의 근본을 이룰 수 있도록 평소에 꾸준한 묵상과 기도의 수행이 요구된다.

 

형제와 화목 하라

 

115.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 5:23-24)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식적인 의식(儀式)과 예물을 받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받는 분이다. 그 진실한 마음이란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과 이웃에 대한 존중심 즉 사랑의 마음을 의미한다. 만일 가족이나 이웃에게 분노를 일으켰거나 무례하게 모욕적인 언사를 행하였다면 먼저 그들을 찾아가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어 서로가 진심으로 화목을 이룬 뒤에 평화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함께 나오라는 것이다.

 

116. 평소에 사람 앞에서는 교만과 무례함을 보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과 경건함을 보인다면 이는 외식과 위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보다는 인애와 자비심을 원하신다. 인애와 자비심보다 더 훌륭한 제사와 예물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 모습으로 헌신을 하고 예배와 예물을 드린다 하여 하나님은 기쁘게 여길 것이 없다는 말이다. 도리어 십자가의 의미와 그 정신을 짓밟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의미와 그 정신은 오직 서로 사랑함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의 가르침을 주는 이유는 예배와 예물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 사랑 안에 예배와 예물이 있고 헌신이 있는 것이며 그 사랑의 교제 자체가 살아있는 교회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용서 화목 평화 사랑은 하나님 품성이요 성령의 열매이기에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다.

 

117. 그리고 ‘다른 사람과 얽힌 감정을 풀지 않는다면 그 미움과 원한과 분노는 서로의 감옥이 될 것’(마태 5:25-26)이라고 하였다. 평소 쉽게 성을 내고 분노하며 때때로 사람들에게 모욕감으로 상처를 주어 원망을 듣고 있다면 성냄과 분노와 교만이 곧 나를 옭아매는 감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감옥에 갇혀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옷을 걸치고 경건한 의식을 인도하지만, 그들 마음에는 교만과 무례함이 가득하여 경솔하게 판단하고 정죄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특히 약자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성직자의 인품에 걸맞지 않은 교만이 앞서 약자들이 깊은 상처를 입는다. 당시 그들의 교만함과 무례함은 사랑의 전령사인 예수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박해를 가하다가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갔으니 그들이야말로 살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교만과 분노가 그들의 평생 감옥이 되었으며 공동묘지가 된 것이다. 그들의 거짓된 외식과 위선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으니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형제와 이웃과의 화목은 사람의 감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 그리고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간음하지 마라

 

118. 그리고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마 5:27-28) 하였다. 간음(姦淫)이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음란한 짓 행하는 것을 말하며 성희롱과 성추행 및 성폭행 그리고 미혼자들의 성행위도 포함한다. 또한, 부부일지라도 어느 한쪽에서의 강제성을 띤다면 역시 성폭행적 간음에 해당한다. 모든 간음의 행위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욕망은 사랑을 빙자한 거짓되고 이기적인 성적 욕망인 것이다. 모든 간음은 마음의 음욕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직접적인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의로운 사람은 아니다.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고 은근히 불필요한 접촉을 시도하는 성추행부터가 이미 간음을 한 것과 동일하게 취급을 하고 있다.

 

119. 마음의 음욕으로 시작되어 가벼운 접촉이 행해지면 간음으로 가는 것은 마치 언덕 아래로 미끄러지듯 쉽게 행해지는 것이 성적 욕망이다. 남녀는 각각 이성(異性)이기 전에 동등한 ‘사람’이다. 일상 속에서 남성으로서의 역할과 여성으로서의 역할이 서로 보완작용을 하면서 공공의 유익과 도움을 나누는 것이지 서로를 향해 성적 놀음을 위해 이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작금의 성적 문란 현상은 신분과 연령을 초월하여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으니 교회법이나 사회법과 교육으로도 선도가 되지 않는다. 성적 문란은 재물과 명예와 권력 등을 탐하는 것 이상으로 가장 추하고 더러운 짓임을 의식하고 자신의 마음을 영성으로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육체적 욕망이 담기기 전에 항상 팔복의 영성이 활성화되도록 마음을 늘 청결하게 할 것이다.

 

120. 그래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마 5:29-30)고 한 것이다. 이성(異性)이 존재하고 결혼과 성(性)이 성립되는 것은 자손을 번성하며 일상에서의 상호 보완을 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서로를 향한 유혹이나 놀이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부분 음욕의 욕망은 눈에서부터 시작되고 손으로부터의 감각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다. 보기에 아름답고 탐스럽게 느껴지는 감각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마련이니 상대방에게 큰 피해를 주고 내가 지옥의 고통을 겪기 전에 차라리 범죄의 도구들을 먼저 제거하라고 한다. 눈과 손을 제거하는 고통이 인생 전체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보다 낫다는 말은 스스로 끔직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의식하며 철저히 경계하라는 말이다.

 

121. 그러나 음욕과 그 욕망은 양 눈과 양손이 없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마음의 음욕에 대한 욕구와 욕망을 없이 하는 것은 육욕(肉慾)이 스스로 죽을 수 있도록 매일 매순간 영성으로 거듭나는 것뿐이다. 우리가 영성(靈性)에서 떨어지는 순간 죄성(罪性)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 진리를 먹고 마시며 또한 팔복의 영성이 온전히 회복되어 내 마음과 양심을 이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내 안에서 사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육적 감각에서 느껴지는 만족감보다는 영적인 행복감을 누릴 수 있을 때 진정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 간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122.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체적 간음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영적인 간음에 대해서 살피고자 한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음란에 깊이 빠져 있음을 지적하였으니(호세아서 1:2)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세상 사랑함을 의미한 것이다. 또한, 야고보는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야고보서 4:4)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어버이로 모시고 예수를 배우자로 섬긴다는 결혼의 의미가 있다.(요한복음 3:29) 그러면 하나님의 가풍을 따르고 예수 신랑과 한 몸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하나님과 예수를 세속적인 복을 얻는 데 이용을 할 뿐이니 이것은 물신(物神)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로써 음욕을 품은 것이며 간음을 하는 것이다.

 

123. 욕심을 품은 것은 음욕이고,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반으로서 간음이다.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과 구원의 십자가는 어디로 갔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모든 욕심과 욕망에서 구원하셨으니 마땅히 우리의 눈이 바라고 몸이 원하는 것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미 세속을 행해 음욕을 품고 간음을 저지르고 있는 현행범들이다. 그러면서 그 입술로 하나님을 부르고, 그의 말씀과 은혜를 나누며, 그 몸으로 헌신을 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으며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영성을 상실하면 자신이 큰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소경이 된다.

 

이혼하지 마라

 

124. 그리고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마태 5:31-32) 하였다. 결혼은 한 몸을 이루는 것이요 이혼은 그 한 몸을 가르는 것이며, 결혼은 사랑이 있음이요 이혼은 사랑이 사라짐이다. 인간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과 환경 및 여건 등에 따라 수시로 변하니 이것은 이기적인 마음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오래 참는 인내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온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자기의 이익과 유익을 앞세우지 않는다. 사랑은 감정과 환경에 구애를 받지 아니한 채 오직 사랑할 뿐이다. 감정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랑하는 것이니 그 사랑은 끝을 모르는 무한한 사랑(Endless Love)이다.

 

125. 그래서 사랑은 처음과 나중이 다르지 않다. 변함없이 처음 자리를 굳게 지키는 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사랑으로 시작하였다가 미움이 오면 사랑으로 용해하고, 실수와 허물이 보이면 관용으로 사랑을 베풀고, 원망과 원한이 있으면 이해와 용서로 사랑을 베풀고, 불만이 많으면 침묵으로 사랑을 베푼다. 사랑은 좋은 환경과 나쁜 환경을 구분하지 않는다. 사랑은 조건에 따라 분별과 판단을 하지 않는다. 더욱이 사랑은 너와 나를 구분 짓지 않으며 네 것과 내 것을 나누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하며 성내지 않으며 무례함을 하지 아니하며 늘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며 매사에 십자가를 먼저 진다. 이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 영원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내 안에 있고 네 안에 있으면 이혼할 일이 없으나 그 사랑이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면 이혼이 정당한 것이 되는 것이다.

 

126. 이혼은 서로가 간음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재혼으로 그 간음을 다시 한번 범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결혼을 하였으면 사랑으로 유지하고 이혼을 말 것이며, 이혼하였으면 재혼을 말 것이고, 재혼을 하였으면 두 번 다시 이혼하지 말 것이다. 이 말은 처음부터 사랑이 분리되지 말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만일 처음 사랑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성격 차이라면 이는 변명이 안 되니 처음부터 차이가 있었다. 처음 사랑은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는데 후에 왜 차이를 느끼는가? 당연히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돈이 문제라면 서로가 그 돈을 포기하고 사랑으로 다시 화합할 것이며 그리고 음행이 문제일 경우에는 용서할 것이나 마음마저 도망간 것이라면 부득이 이혼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끝까지 사랑할 뿐 아무것도 기대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이혼도 어찌 보면 이기와 욕심의 부산물은 아닌가?

 

맹세하지 마라

 

127. 그리고 ‘옛사람에게 말한바 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 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는 ‘그렇다’라고 할 때만 ‘예’ 하고, 아닐 때는 ‘아니요’라고 말하라. ‘예’나 ‘아니요’ 그 이상의 말은 악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마태 5:33-37)이라고 하였다. 분명 사람이 하나님께 서원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을 하라(민수기 30:2)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맹세의 계명을 재해석해 준다. 처음부터 맹세와 약속과 서원과 서약 등을 도무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야고보도 그 무엇의 이름으로도 자신을 신뢰해 달라고 맹세하는 일을 부디 만들지 말라(야고보서 5:12)고 간곡히 당부하였다.

 

128. 사람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꼭 얻고 싶은 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서원 서약 맹세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기 이익과 유익을 위한 의도적인 맹세라 하여 이를 악한 생각이라 하였다. 맹세나 약속을 이행할 때가 다가오면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미래의 일을 장담하는 것 자체가 거짓인 것은 내일 일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일과 미래에 대한 지혜가 없는 것이기에 언제나 진실을 앞에 두고 지금 할 수 있으면 ‘예’하고 할 수 없을 때는 ‘아니오’하면 된다는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면 말없이 행할 것이고, 만일 지금 할 수 없는 일이면 맹세나 약속을 할 것이 아니라 침묵하고 있다가 할 수 있을 그때 행하면 된다. 거짓된 사람이기보다는 항상 진실한 사람이 될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맹세나 약속을 강요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마라

 

129. 그리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 5:38-42) 하였다. 분명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으라’(출애굽기 21:23-25)고 하였다. 그러나 문자대로 이해하면 하나님은 복수의 하나님이니 하나님의 품성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내가 이웃에게 해를 끼치면 나도 그와 똑같은 해를 당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두렵게 생각하여 처음부터 악한 짓은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니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 한 것이다. 정말로 눈과 손을 자르거나 당한 그대로 보복을 하라는 것이면 하나님은 나쁜 하나님이 된다. 진정한 사랑은 오래 참으며 원수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어찌 보복을 권장하겠는가?

 

130. 때때로 우리 주변에는 악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그 피해를 보는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예수는 다른 시각에서 악을 선으로 이기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방법은 상대방의 행위와 요구를 그 이상으로 들어주라는 것이다.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도 돌려주고,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를 동행해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는 거절하지 말라 하니 이 일은 보복하는 일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상대방도 두 번 다시 그 이상의 악한 행위나 요구를 하지 못할 것이다. 도리어 미안하게 생각하고 다시는 악한 일을 도모하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감동되어 좋은 이웃이 될 것이다. 이것이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지혜이니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다.

 

131. 사람의 죄는 미워하여도 사람 자체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어서 마음에 큰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 것이 바로 거듭 난 하나님의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사랑의 정의(正義)인 것이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가져오니 보복의 악순환만 반복될 뿐이기에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것은 곧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 사랑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적인 동정이나 억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할 것이니 우리는 팔복의 영성을 지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신앙과 믿음은 사람의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도록 요구되는 것이지 기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악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 나라의 형제요 가족이다.

 

132. 그래서 ‘악한 자에게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18) 하였고 또한 바울도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로마서 12:20)고 하였다. 우리에게는 보복할 권한이 없고 용서할 권한만 있다.(잠언 20:22, 마태18:35, 로마서 12:19) 예수가 공생애 동안 억울한 누명을 썼지만, 자신을 변호하거나 위협자들과 타협하지 않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순명(順命)적으로 받아들였다. 오래 사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손해를 싫어하고 자존심과 체면을 앞세우거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를 지키기 위해 반사적으로 악한 자를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성을 악한 자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우리는 그들의 악성을 영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사랑의 무기를 활용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133.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태 5:43-45) 하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이 곧 하나님이다. 사랑 안에는 미움도 시기도 원망도 원한도 대적함도 그리고 원수도 없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지만, 그 이상의 판단과 정죄와 복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동등하게 볼 뿐이다.

 

134. 누군가가 미워하면 미움을 받고, 박해하면 박해를 받으면서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다. 오직 사랑할 뿐인 것은 사랑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미운 자도 없고 원망이나 원한 맺힌 원수도 없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내 안에서 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도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요, 구원의 목적도 서로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한 것이다.(고린도전서 13:13) 사랑이 없는 믿음과 소망은 허망할 뿐이며, 사랑이 없는 목회와 교회와 성도 그리고 예배와 기도 및 헌신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지 못한다. 사랑이 인생과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135. 그래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6-48) 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분명 세상 사람들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세상과 같지 아니하고 예수와 같이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온전한 ‘사랑’뿐이다. ‘사랑’은 사람과 신분과 배경 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인위적인 생각도 할 줄 모른다. 본능적으로 또는 본성적으로 자비와 긍휼이 발현되어 그저 사랑할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미운 자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끌어안을 때 빛이 날 것이다.

 

136. 존재적 사랑에는 우리가 표현하는 원수가 처음부터 없는 것이니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최절정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예수님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고, 억울한 누명을 쓰며, 제자들의 배신도 겪다가 결국엔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였지만, 예수에게는 미움도 없고, 원망도 없으며, 원수가 없으니 이것이 온전한 사랑이다. 우리에게 신앙과 믿음이 요구되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예수와 같이 품고 나의 삶을 통해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사랑 밖은 세상이요 사랑 안은 하나님 나라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137. 따라서 우리는 원수가 주릴 때 배불리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할 때 마실 것을 주며, 병들었을 때 찾아가 위로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 하는 것이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다툼이 없고 보복하지 않으면서 악을 선으로 이기는 지혜인 것이다. 이렇게 한즉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니 사랑은 악함과 선함을 구분하지 아니하며 긍휼과 온유함과 자비심을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공평하게 사랑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으며, 예수는 인류를 동등하게 사랑하시어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니 우리가 이와 같은 사랑의 모본을 세상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138. 이제는 그 모본을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고 예수의 십자가를 따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와 교회 앞에서 무릎을 꿇은 교회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여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미움과 증오와 다툼과 분열이 사라지고 화합과 화목과 화평이 항상 보존되도록 영성의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항상 온전해야 할 것인즉 오직 ‘사랑’으로만 온전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나를 통해 사랑으로 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며 인생인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된 의(義)

 

139. 그리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할 것’(마태 6:1)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의’는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대조하여 깨우치고 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명예욕 때문에 의도적으로 종교적인 의(구제/기도/금식 등)를 행하였는데 이를 예수님은 크게 책망한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과 위선을 행한 것이니 이는 의도적으로 꾸미고 만든 행위로서 가짜이고 거짓이며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이다. 그들이 행하는 의는 언제나 과시하고 우쭐대며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명예욕일 뿐이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취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구하지 않는 자들이니 실로 하나님을 상실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상실한 자들이 이미 익숙해진 신앙의 관습을 따라 가장 경건하고 거룩한 자들처럼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140. 그들은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것(누가복음 16:15)을 모르고 있는데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성직(聖職)이라는 신분과 거룩함을 상징하는 가운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힘주어 전하며, 하나님의 전능성과 예수의 이름을 강조하는 그 심령에는 온갖 세속적인 욕심과 명예욕을 담고 있다면 그 입술로 나오는 모든 가르침은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허망할 뿐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을 존경하지 않으며 그들의 가르침에 조소를 보낼 뿐 도무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큰 걸림돌이 될 뿐이다. 이는 자신도 천국(道)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천국 입성(道行)도 막는 악행인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불의와 불법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들을 교회 지도자로 섬기며 따라야 하는가? 함께 구렁텅이로 빠질 것인가? 시편 기자는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시편 4:2) 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안팎에서 신뢰와 존경을 잃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41. 예부터 성직자들은 나라와 백성들로부터 신령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어 공경을 받아 왔다. 그러다 보니 오래전부터 그들의 심성에는 아집과 독선이 심하고 재물과 명예를 탐하며 교만해지면서 문명의 혜택 누리는 것만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이렇게 세속에 물들어 있으면서 영적인 지도자로 행세를 하고 있으니 어찌 위선자가 아니겠는가? 그들은 분명 두 개의 마음과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위선자들이다. 대중 앞에서의 보이는 모습과 사적인 자리에서의 본래의 모습이 다르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사람들 앞에서 위선 된 종교적 의를 행하며 영적인 지도자임을 과시한다. 그들은 진리를 전하면서도 거짓의 영을 쓰고 거짓된 행위와 위선 된 의를 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따르면 스스로 능력 있는 영적 지도자로 착각을 하고 더욱 우쭐대며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고 있다.

 

142. 그러나 의로우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뿐(시편 119:137)이니 하나님이 곧 ‘의’가 되신다. 하나님의 의는 숨겨진 은밀함이다. 특히 자신의 소유나 명예를 위해 의도적으로 하는 행위는 조금도 없다. 자신의 존재가 그러하고,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으며,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무상으로 공급하면서도 자랑하거나 뽐낼 줄을 모른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은 침묵과 은밀함이다. 그런데 오늘의 성직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종교적 관습만 행하고 있으니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겉 사람(肉)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속사람(靈)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은밀한 중에 행할 줄 아는 사람이 영성이 있는 참 지도자요 참 성도이다.

 

은밀한 구제

 

143. 그러므로 ‘너희는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자랑하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희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 6:2-4) 하였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행하는 구제의 위선을 언급하고 있다. 구제(救濟)는 불쌍히 여김, 자비, 자선 등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위험이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건져내어 살리는 일을 말한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구제를 위한 성금 모금을 공개적으로 한 모양이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서 구제를 선전하였으니 이를 자신들의 공적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이렇게 명예욕을 채우기 위한 기회로 활용한다는 것은 구제에 대한 진실한 마음이 결여된 것이니 그들에게는 평소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안중에도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구제로 명예욕을 얻는다는 것은 약자들을 악용하는 정말 불손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144. 사회의 모든 약자를 찾아가고 보살피며 구제를 하는 것은 교회의 절대적인 본분이다. 물이 자연적으로 아래로 흐르며 가장 낮은 곳에서 멈추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는 곳은 낮은 자리이기에 낮은 자리가 곧 천국이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부터 낮은 자리는 피하고 높은 자리만 선호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종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자신도 육신을 입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한 생애를 보냈는데 우리는 낮은 자리를 찾기는커녕 약자들을 위한다는 구제를 통해서 돈과 명예를 얻는 기회로 삼는다면 분명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다. 그런 행위는 약자들의 고통을 상품화하는 구제 장마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구제의 행위를 겉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요 영광이라고 거짓을 표명하니 하나님 앞에서 가장 추악한 위선인 것이다.

 

145. 진정한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한 중에 행하는 것이다. 오른손과 왼손은 항상 함께 일한다. 그런데 왼손 모르게 하라는 것은 구제를 행하지만 구제를 행한다는 의식부터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제를 행한 후에도 구제를 행했다는 의식이 없으니 자랑이나 뽐 낼 것이 없다. 마치 숨 쉬는 것과 같아 무의식중에 행한 것이니 우쭐댈 일이 전혀 아닌 것이다. 이런 구제는 공개적으로 홍보하며 떠벌리지 않는다. 년 중 행사로 벌이는 구제를 교회의 자랑거리나 교회 성장의 기회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약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구제라는 이름으로 교회와 목회자의 명예를 취하려는 행위는 약자들에 대한 인격 모독이다. 그러므로 구제는 매일 매순간 무의식중에 본성적으로 소리소문없이 은밀한 가운데서 행해져야 하며 그리고 구제 행위에 대해서 기억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은밀한 구제이며 무엇보다도 약자들에 대한 예의와 존중함이 될 것이다.

 

은밀한 기도

 

146. 그리고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신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하였다.(마태 6:5-7) 여기서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건과 거룩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려고 일부러 많은 사람이 오가는 회당이나 큰 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즐긴다고 하였다. 겉으로는 기도의 모양만 갖추었을 뿐 속으로는 명예욕이 가득한 외식(外飾)자들이다. 사람에게서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 경건함과 거룩함을 의도적으로 꾸미고 만들어 마치 영적인 능력을 지닌 성직자로 가장하는 거짓된 사람들이다.

 

147. 기도뿐만 아니라 구제나 금식이나 예배와 찬양과 헌신 등 무슨 일을 하든지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하는데 매사에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자신의 명예에 집착하면서 의도적인 행동을 취하는 거짓은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음이다. 나무는 열매로 알듯이 평소 그 사람의 언행과 삶을 보면 경건의 사람인지 위선의 사람인지 누구나 알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정말 기도해야 할 때는 아무도 모르게 골방과 같은 은밀한 곳에 들어가 소리 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진실과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고할 것이다. 기도란 소원 성취가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과의 동행을 구하고, 잠자는 영혼을 깨우며, 범사에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경건함과 거룩함과 영성이 자라는 것이다. 내 영혼이 어두워지거나 약해져 갈 때 하나님 앞에 진실히 설 곳은 은밀한 골방이다. 골방에서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응답인 것이다. 골방은 곧 내 마음속을 의미한다.

 

148. 그리고 사람에게 보이는 기도는 소리를 내고 기도의 내용도 다양하며 반복하여 기도가 길어진다. 기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령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보일 것 같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횡설수설하는 기도요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로서 진실하지 못한 거짓 기도가 아닌가? 또한, 기도 시간이 너무 짧으면 체면이 서지 않으니 부득이 중언부언하면서 기도 시간을 의도적으로 길게 늘릴 수도 있다. 누구를 위한 기도이며 무엇을 위한 기도인가? 아무 의미도 없는 기도도 아닌 기도를 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운 짓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 자체에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라면 그만 멈추어야 할 것이다. 기도의 중심은 자신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 요구되는 하나님과의 교감이요 교통이기 때문에 은밀한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기도의 모본(模本)

 

149. 그러므로 ‘외식(外飾)하는 자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8-13) 하였다. 예수님은 거짓과 꾸밈으로 일관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을 경계할 것과 일상에서의 필요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 참기도인 것을 모본적으로 제시해 주었다.

 

150. 기도의 모본을 살펴보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부자(父子)관계인 것을 기억할 것과 아버지의 나라와 그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 하였으며 일용할 양식 외에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말 것과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받았듯이 이웃의 죄와 허물도 용서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세속으로부터 미혹을 받지 아니하고 항상 하나님의 선(善)에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하라 하였다. 아버지의 뜻은 최고의 선이요 사랑을 의미하니 곧 하나님 나라를 구할 것과 무욕과 용서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을 할 것이며 그리고 미혹의 영에게 속지 않도록 영성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기도하라 한 것이다.

 

151. 우리의 기도와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본다. 우리는 오직 세속적인 욕심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영성의 삶을 구해야 하는데 육적인 삶을 위해 출세와 성공과 장수 등을 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복을 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줄로 안다. 그러나 우리의 기복을 들어주고 응답해 주는 신(神)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어리석은 착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자연과 인간의 양심과 성인들의 가르침인 경전들을 통해서 이미 다 듣고 응답해 주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우리가 구할 것을 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욕심 거리를 구할 것을 아시고 우리에게 이미 가난한 심령으로 응답을 주셨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눈이 어둡고 귀가 가려져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떼를 쓰고 있다. 언제나 하나님의 소리는 우리 영혼의 소리, 마음의 소리를 통해서 들려준다. 그래서 골방 기도는 마음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것이다.

 

152.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통곡의 벽에서 날마다 평화를 기원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거듭날 것과 원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며 사랑할 것을 이미 응답해 주셨는데 그 응답을 깨닫지 못한 채 보복과 정복을 통한 평화를 기원하고 있으니 이스라엘의 기도를 듣고 응답해 줄 하나님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생활 속에서 복(福)과 화(禍)를 구분하여 복은 구하고 화는 벗어나도록 구할 것이 아니라 복과 화에 대한 분별심 없이 모든 환경과 여건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골방 기도를 하면 격려와 위로와 능력 등으로 내 안에서 응답을 받을 것이다. 특히 평소에 늘 팔복의 영성을 기도의 모본으로 구한다면 신앙과 믿음의 진면목을 새롭게 깨닫게 될 것이다.

 

용서에 대하여

 

153. 특히 용서에 관해서는 별도로 강조를 하였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마태 6:14-15) 하였다. 용서란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허락하다, 포기하다라는 뜻이 있고, 법적인 용법으로는 면제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어느 용법으로 보든지 용서란 두 번 다시 문제로 삼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무언의 약속이요 상대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다. 상대가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용서할 수 있다면 최고의 대접이요 가장 큰 사랑이 될 것이다. 만일 용서를 못한다면 그 미움과 원한과 분노는 나의 고통과 감옥이 될 것이다.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며 또한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큰 자유를 알게 될 것이다.

 

154.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십자가 사랑은 용서의 원천이며 구원의 은총이다. 내가 십자가의 사랑을 힘입어 용서와 구원을 받았으니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다. 조금도 억울해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다. 만일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나는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죄인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용서하였는데 내가 그 용서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여전히 죄인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진정 십자가 죽음으로부터의 용서를 경험했다면 그 은총이 크게 다가와 감격스러워 결코 용서의 사랑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용서를 받고 이웃에게는 용서를 베풀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는 내 안에서 죽은 것이다. 내 안에서 그 용서가 죽었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용서하셨지만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지 못한 것이기에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용서는 이웃의 허물에 대한 포기와 면제이며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다.

 

은밀한 금식

 

155. 그리고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으니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마태 6:16-18)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사람들에게 보이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외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신약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였다. 금식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슬픈 기색이나 지쳐가는 모습을 보인 모양이다. 자신의 경건함을 사람들이 알아주며 존경을 받고 싶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금식이며 무엇을 위한 금식인지 혼란스럽기만 하고 금식의 의미도 사라지는 것이다.

 

156. 지금도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금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자신이 다급하거나 절실한 문제가 있어 금식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금식을 알아주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기를 바라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금식을 먼저 밝히기까지 한다. 신앙과 믿음의 돈독함을 자랑하고 싶은 것인가? 그러나 금식의 목적이 영성과 관련이 있든 일상과 관련이 있든 금식을 은근히 공개한다는 것은 신앙의 돈독함이나 진실함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처럼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을 하여 금식을 하는지 모르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금식은 소원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영성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육신의 욕구를 죽이는 수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금식은 자기를 부정함이요 생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든 종교적 외식도 사라질 것이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라

 

157.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해충과 부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해충이나 부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니라. 네 재물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태 6:19-21)고 하였다.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하늘 사람과 땅의 사람으로 나누겠다. 하늘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요 땅의 사람은 재물을 추구하는 사람이며, 하늘 사람은 마음의 풍성함을 바라고 땅의 사람은 재물이 풍성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늘 사람은 텅 빔 속의 충만함으로 기뻐하고 땅의 사람은 꽉 참 속의 충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하늘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행복할 줄 알고 땅의 사람은 소비로 행복을 말한다.

 

158. 그래서 하늘 사람은 실패한 인생으로 보이고 땅의 사람은 성공한 듯 보여 땅의 사람이 하늘 사람을 비웃는다. 그러나 진리로 인하여 비웃음을 받지 아니하면 그도 역시 하늘 사람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재물 쌓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성공과 행복의 지표로 삼는다. 그러나 재물을 쌓는 것은 욕심을 쌓는 것이요 진리를 쌓는 것은 사랑을 쌓는 것이다. 물질의 풍성함 속에서 정(情)이 메마른 것보다는 진리의 풍성함 속에서 사랑이 넉넉한 것이 삶의 질을 높여주지 않겠는가? 이웃사촌이 사라진 가장 큰 원인은 돈과 재물일 것이다. 돈 때문에 가족의 화목이 깨지고, 돈 때문에 친구의 우정도 상실하고, 돈 때문에 수많은 범죄가 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돈을 좋아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되며, 돈에 대한 탐심이 커질수록 진실한 믿음을 떠나고, 더 큰 근심과 고통만 초래한다(디모데전서 6:10)고 하였다.

 

159. 그리고 돈에 대한 욕심은 우리의 영혼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가 된다고 하였으니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쉴 곳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라(디모데전서 6:8-9)고 하였다. 그러나 당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은 돈과 재물로 인한 기쁨이 있으니 마치 마약과도 같아 멈출 수 없고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재물의 마약 맛을 본 것이다. 문명과 문화와 향락의 맛을 보았기에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까지 재물을 구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마약에 중독된 상습범과 같은 것이다.

 

160. 그래서 재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 한 것이다.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것은 비움과 나눔을 통한 사랑을 쌓으라는 말이다. 욕심은 재물과 인생과 신앙을 좀 먹는 해충이요 마약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욕심이라는 해충과 부식과 도둑이 없어 영원하다. ‘사랑’은 인간의 감성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를 의미하기에 돈과 재물에 욕심을 부리는 것은 ‘사랑’의 신비를 모르는 것이니 결국 하나님이 내 안에 없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진실로 돈과 진리를 맞바꾸겠으며 재물과 영혼을 맞바꾸겠는가?

 

161. 그리고 우리의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평소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평소 내 마음은 어디에 두고 있는가? 재물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만일 재물보다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의식이 있다면 저절로 나의 재물은 늘 누군가를 위해 쓰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보다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욕심을 부린다면 나의 재물은 가장 먼저 내 창고에 가득히 쌓일 것이다. 그리고 명예를 좋아한다면 그 재물은 명예를 위해 쓰일 것이고, 부동산을 좋아한다면 건물이나 땅을 얻는 데 쓰일 것이며, 향락을 좋아한다면 그 향락을 위해 쓰일 것이고, 사치와 허영을 좋아한다면 아낌없이 과소비를 즐길 것이다. 자신과 가족을 위할 뿐 사회의 약자들을 돌아보는 데는 매우 인색할 것이다.

 

162. 사람은 돈과 재물로 살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의 의미를 압축하면 ‘삶’이 되고 삶을 펼치면 ‘사랑’이 된다. 사람의 삶은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늘나라의 삶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체요 본질이며 본성이다. 하나님 나라가 곧 사랑이요 사랑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므로 재물을 땅에 쌓기를 그만두고 하늘에 쌓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 중의 뜻인 사랑을 쌓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공평히 나누자는 것이다. 이웃은 곧 나의 하늘이요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은 우리의 의식과 삶의 습관 변화를 기대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도리어 하나님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재물과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는 일로 일생을 보낸다면 과연 그는 하나님의 사람인가? 욕심의 노예인가? 욕심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며 모든 부정과 비리와 불의는 재물에서 시작됨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재물은 선용(善用)하기보다는 악용(惡用)되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재물이 많음은 결코 자랑이 아니며 부끄러운 수치요 큰 죄인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필요한 만큼은 내 몫이지만 필요 그 이상은 내 몫이 아니라 이웃의 몫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은 몸의 등불

 

163. 그리고 ‘눈은 몸의 등불이니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라. 이처럼 네게 있는 마음의 빛이 어두우면 인생의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태 6:22-23)고 하였다. 그렇다. 눈이 정상적으로 건강하여 밝으면 사물이 밝게 보이고 행동에 아무런 불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어두워지면 사물이 흐리게 보이고 행동에도 다소 불편을 겪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실명(失明)이 되면 우리 몸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스럽고 불편하니 그 답답함이 한층 더 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빛이 밝으면 세상 속에서도 진리를 보지만 마음의 빛이 꺼져서 어두우면 욕심과 재물만 보이니 그 인생의 어둠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문명의 빛을 선호하지만 예수와 성인들은 마음의 빛을 지킨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문명의 빛은 멀리하고 마음의 빛 곧 진리의 빛을 찾고 따라야 할 것이다.

 

164. 그리고 마음의 눈이 보는 것을 육체의 눈이 보고, 마음이 쫓는 것을 몸이 따른다. 겉에서 보고 따르는 눈과 몸은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겉 사람의 행동은 속사람의 뜻에 따를 뿐이다. 마음이 하늘을 바라보면 눈과 몸도 하늘을 보고 따를 것이지만 마음이 땅을 바라보면 눈과 몸도 땅을 바라보고 따른다는 것이다. 마음이 욕심으로 채워져 있다면 돈과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따를 것이고 마음이 비어 있다면 영성과 진리와 사랑을 따를 것이다. 마음의 눈이 밝으면 온몸의 지체도 바른길을 갈 것이고,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온몸의 지체는 구덩이로 빠질 것이고, 마음의 빛이 어두우면 인생의 어둠과 죄악도 깊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것이 몸으로 투영되는 것이기에 마음의 눈은 곧 몸의 등불이라 한 것이다.

 

165. 교회 지도자들이나 우리가 돈과 재물에 탐욕을 부리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빛을 잃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등대가 교회요,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둠에 빠진 자들을 구원해야 할 사람이 성직자이며, 이웃의 아픔과 고통의 짐을 나눠야 할 사람들이 성도이다. 인생의 가치는 돈과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팔복의 영성과 자족에 있음을 삶의 표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과 하나로 동화(同和)되어 같은 생활 의식과 습관과 욕심을 부리고 있으니 세상과 함께 죽은 자들이 된 것이다. 세상과 교회는 죽은 자들끼리의 투사 장이 되고 만 것이다. 돈과 재물에 밝은 것은 죽음의 길이요 마음의 영성이 밝은 것은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과 재물

 

166. 그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귀중히 여기고 저를 가볍게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태 6:24)고 하였다. 진정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며 신앙의 대상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아닌 재물이 내 인생의 전부이고 믿음의 목적이라면 차라리 교회 공동체를 떠나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자요, 예수 십자가의 정신과 그 의미를 버린 자이며 성령의 옷을 벗고 세속의 옷을 입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으로 교회 안에 머물러 성직자 노릇을 하거나 성도 흉내를 낸다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자로서 거짓되고 위선 된 가증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진리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거나 재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교회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하는 질문은 사랑이냐 욕심이냐를 묻는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은 욕심이고 취해야 할 것은 사랑이다. 사랑과 욕심을 맞바꾼 것은 신앙도 믿음도 아니요 실패한 인생이다.

 

167.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섬긴다고 하면서 사실은 재물을 섬기고 있다. 한평생 재물을 위해 마음을 쏟는 것과 재물을 모으는 것이 재물을 섬기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서도 출세와 성공, 부귀와 영화, 교회의 성장, 부동산 매입 등을 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미 재물에 의해 하나님이 밀려나 있는 실정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으나 속으로는 갖가지 축복을 기대하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비합리적인 신앙과 믿음을 바로잡아야 할 목회자 자신이 먼저 물질적 의식 속에서 교회 성장과 재물과 명예와 권위를 붙들고 있으니 교인들의 마음도 밝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재물을 좋아하지 않으며 재물 역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일이니 만일 두 주인을 섬긴다면 이는 영적인 행음을 저지르는 것이다. 지금 교회 안에는 거짓되고 위선된 행음자들로 가득한 것은 아닌가?

 

16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열중하지 말라. 생명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노력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집착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으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태 6:25-30) 하였다.

 

169. 대부분 사람은 한평생 의식주(衣食住)에 대해서 염려하며 걱정하기도 하고, 또 너무 지나치도록 욕심을 부려 넘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영혼의 굶주림과 헐벗음에 대해서는 대부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좀 더 고급스러운 가방과 액세서리를 걸치고,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좀 더 운치 있는 안락한 집을 선호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돈과 열정을 투자하면서 정작 진리와 영혼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인생과 신앙의 가치는 물질의 부(富)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물질의 부와 문명의 혜택은 사람들을 더욱 이기와 욕심으로 몰아가 경쟁과 다툼으로 유도할 뿐이며, 양적인 가치는 누릴 수 있겠지만 질적인 가치는 영원히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와 성인들의 삶과 가르침이 그들에게는 쓸모없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170.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생명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몸은 형상이기에 눈에 보이니 몸을 위해서 여러 가지를 공급해 주지만 너무 지나쳐서 몸이 지쳐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질병이다. 또한, 공기로부터 수질과 생활용품 그리고 먹을거리 등에서 인체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환경 호르몬들이 끊임없이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문명화된 의식주를 찾아다니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마치 진리와 영혼의 생명은 없는 듯이 철저히 외면하고 물질을 소유하는데 일생을 다 보낸다. 더욱이 교회 지도자들도 돈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말문이 막힌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부귀영화보다 들풀을 더욱 아름답게 보신다. 부귀영화는 욕심의 부산물이요 작은 들풀은 자연의 섭리이니 욕심은 추한 것이요 욕심을 모르는 자연은 아름다움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재물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

 

171. 그러므로 ‘이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요 한 날의 고민은 그 날로 족하다’(마태 6:31-34)고 하였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심지어는 교회 지도자들부터 호의호식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진정 하나님은 죽었다.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직장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끼리 교회 아닌 교회를 세우고 죽음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172.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의식(意識)과 습관과 유행을 똑같이 행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정말로 교회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우물우물하지 말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자문자답해 보라. 당신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인가? 십자가의 정신과 그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세례와 성만찬과 구원의 의미를 잘 살려내고 있는가? 영생은 또 무엇인가? 지금의 교회가 과연 구원을 얻었으며 영생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 증거는 무엇인가? 당신은 높은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늘 낮은 자리에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의 성직(聖職)에 대해서 양심선언 할 것은 없는가?

 

173. 언제나 교회 지도자와 성도가 구할 것은 세속의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義)이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 몸을 담고 살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인생의 목적이다. 우리가 정기적인 예배와 예물을 드리며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세속적인 복 받는 것만을 구할 뿐 정작 하나님 나라와 그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보이는 일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 조금도 구별되는 바가 없다.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 직전에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해 마지막 유언 기도를 하였는데(요한복음 17:1-26) 그 기도의 중심은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였다. 예수님의 마지막 간절한 소원은 자신이 곧 겪게 될 고통과 죽음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머물러 언제나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다.

 

174.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잊은 채 세속적인 풍습과 유행을 따라 재물에 대한 욕심을 추구하고 있으니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출세와 성공과 교회 성장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과 무관한 일로서 욕심의 산물일 뿐이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는 들어주고 누구의 기도는 거부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속적인 복의 근원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풍성함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무엇이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의 의인가? 바로 팔복의 영성이 하나님 나라요 하나님의 의이며 그리고 참복의 근원이다. 팔복의 영성이 우리의 품성이 되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묻어 나와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사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天國)요 하나님의 의(義)이며 교회이고 신앙이며 예배인 것이다.

 

175. 그래서 우리의 일상과 신앙의 표준은 팔복의 영성인 것이다. 이 영성을 잊은 채 넘치는 의식주를 구하며 소유와 소비를 자랑삼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을 교회와 지도자들도 구하고 있으니 수치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더 좋은 옷과 더 맛있는 음식과 더 좋은 주택 그리고 더 웅장한 교회당과 문명의 특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향한 모든 믿음의 행위들을 속히 멈추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사사로운 욕심을 하나님 나라와 의(義)로 대체하고 자신을 속이며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여 죽은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의 삶과 신앙의 방향을 물질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비판하지 마라

 

176. 그리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 7:1-5) 하였다. 비판(批判)이란 다른 사람의 언행으로 드러난 실수와 허물에 대해서 일방적인 판단으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을 말한다. 비판이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으로 더 크게 활용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좋은 대안과 함께 비판한다면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위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경우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실수와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 오늘의 비판이 내일은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올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77. 그러므로 상대방의 실수와 허물을 보거든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도록 겸손과 온유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비난과 비판을 즐기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더 큰 허물을 안고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덕(德)이 한없이 부족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품격은 ‘덕’으로 결정되는 것이니 매사에 긍정적인 대안도 없이 부정적인 비난과 비판을 하는 것은 일방적인 매도 행위이기 때문에 부끄러운 소치가 되는 것이다. ‘덕’이란 팔복의 영성이요 성령의 열매이니 항상 진리를 가까이하면서 수신(修身)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상대의 작은 티를 크게 확대해서 비판하는 것이니 우리는 영성(靈性)으로 무장하여 언제나 겸허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상대의 허물을 보는 것은 부덕(不德)이요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은 상덕(上德)이다.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마라

 

178. 그리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 7:6) 하였다.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란 동의어로써 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개나 돼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과 위선을 취하며 아집과 사리사욕에 빠진 자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밥벌이를 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전통과 제도를 고집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의 정당성과 그 의미를 말해주어도 자신에게 불리할 때는 도리어 그 진리를 무시하고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성냄과 분노로 대적하여 상대방을 몰아세운다. 그들은 책망과 훈계받는 것을 싫어하고 못 견뎌 아래 때문에 책망과 훈계를 겸허히 수용하지 못하고 도리어 힐난하고 비난하며 찢으려고 덤벼드는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교만하고 오만한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말해줄 것이 아니라 개나 돼지로 취급을 하라는 것이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그리고 개돼지와 같은 사람들을 교회 지도자라고 추앙하며 옹호하고 따르는 사람들 역시 영성이 죽은 사람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179. 이렇게 외식과 위선에 빠진 사람들은 재물과 명예를 구하는 사람들이지 결코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기껏해야 진리를 제도화하여 사람들을 구속하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전통과 제도권을 주장하며 아집과 권위와 기득권에 빠져 있다. 그들은 진리의 의미를 세속적으로 왜곡하여 자신도 하나님 나라를 상실하고 교인들도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하는 소경들의 집단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외식과 위선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들은 이미 진리를 떠난 사람들이요 진리를 말할 자격도 상실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진리를 말해주면 겸손히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진리를 전하는 사람을 비난과 비판으로 정죄하며 욕되게 하는 사람들이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강조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이미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며, 진리를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으로 삼아 가르치니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하는 사람들이다.(마태 15:8-9) 그들은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다. 진리는 허리를 굽힐 줄 아는 사람의 것이다.

 

성령을 구하라

 

180. 그러므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7-11)고 하였다. 교회는 이 말씀을 소원 성취용으로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육(肉)을 위해 주는 말씀이 아니라 영(靈)을 위해 주는 말씀이며, 소원 성취를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구하고 찾고 하늘 문을 두드리라고 주는 말씀이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반복적인 강조는 세속을 향한 이기와 욕심에게 틈을 주지 말고 성령 하나님에게 집중하라는 것이다. 성령은 참나의 본질이요 나의 생명이며 내 인생과 신앙의 주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81.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고 찾을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뿐이니 곧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이 곧 하나님 나라이며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의 의(義)이며 이것이 바로 팔복의 영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팔복의 영성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늘 성령을 떠나 인위적인 종교적 전통과 제도와 사사로운 욕심을 따르며 모든 행복의 원천인 팔복의 영성 즉 성령을 상실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육신의 삶을 위해 목이 쉬도록 재물의 부(富)와 문명의 특권과 교회의 물량적 성장을 구하며 하나님을 찾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좋은 믿음으로 착각을 하고 있으니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묻고 싶다. 진정 세속을 향한 욕구와 욕심은 죽고 성령을 향한 신령과 영성은 깨어나야 할 것이다.

 

182. 하나님은 사람들이 날마다 생각하는 계획이 악하고 죄악이 성행하는 것을 보시고 사람 지은 것을 한탄하셨다(창세기 6:5-6)고 하였다. 우리는 어머니가 죄 중에서 잉태하여 죄악 중에서 출생한 죄인들이다.(시편 51:5) 우리 육신의 환경은 물질적으로는 풍성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이미 가물어 기근 상태에 있는 형편이다. 육신은 살아있고 영은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는 일을 교회 지도자들이 해야 할 막중한 사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함께 육은 살고 영은 죽어있는 상태에서 종교적인 전통과 제도만이 진리인 양 고집하며 물질적인 축복과 교회 성장과 사업의 번영 및 출세와 성공의 길을 왜곡하여 가르치며 배우고 있는 것이다.

 

183. 교회는 아직도 영의 양식인 진리를 육신의 배부름과 평안함을 위해 악용하는 이율배반적인 흐름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그 흐름을 막고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할 것인즉 바로 성령의 길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흐른 것이 물질에 대한 욕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성령이 흐르도록 마음의 모든 욕심을 온전히 비워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은 오직 성령뿐이다. 내가 영적으로 목마름을 느껴야 하고 내 마음이 메말라 있는 것을 알아채야 비로소 성령을 구하고 찾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속을 향한 모든 욕구와 욕심을 비워야 한다. 욕심을 비우면 성령으로 채워지고 성령으로 풍성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어 자유와 평화와 사랑으로 영혼이 날마다 춤을 출 것이다.

 

율법의 정신

 

184. 그리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 7:12) 하였다. 이 말씀은 내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말이다. 특히 억압하지 말고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말라는 것이니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줄 아는 품위를 지켜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은 진실로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 하였다. 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하고 물었다. 이때 예수는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마태 22:25-40) 하였다. 대접하라는 것은 곧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대접하는 것이 곧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요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 것이다. 이 짧은 말씀 하나가 온 율법의 정신이라 하였으니 나머지의 모든 가르침은 이 말씀을 펼쳐놓은 주석에 불과할 것이다. 율법의 주제는 존중과 대접이요 사랑이니 늘 마음에 두어 수신(修身)의 기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185. 우리는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이웃사랑하는 것을 분리해서 이웃 사랑은 윤리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고 신앙과 믿음에서 이웃 사랑은 은연중에 배제하고 있다. 우리가 이웃 사랑을 모르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교회 생활이 신앙이 아니고 이웃 사랑이 신앙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우리도 온전하기를 배우고 수행하는 것인데 그 온전함이 곧 ‘서로 사랑함’이다. 이웃 사랑을 외면한 채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이방인들이 기복을 바라고 우상을 찾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살아있는가 아니면 죽어있는가?

186.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사랑이 없는 종교적 행위는 하나님 없는 인위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그 신앙과 믿음으로는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뛰어난 언변으로 설교를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신령한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재산과 목숨까지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는 행위라면 아무 유익도 없다(고린도전서13:1-3)고 한 것이니 여기 ‘사랑’이란 ‘하나님’을 의미한다. 사랑은 신앙의 대상이요 믿음의 과정이며 종착지이다. ‘하나님’을 신(神)으로 생각하면 우상이 될 것이고 ‘사랑’으로 인식한다면 종교와 신앙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며 또한 교회의 모습도 새롭게 변모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87.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마태 7:13-14)고 하였다. 모든 사람 앞에는 두 개의 문이 놓여 있다. 하나는 좁은 문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문이다. 좁은 문이란 하나님의 뜻이 담긴 진리의 문을 의미하고, 넓은 문이란 인간의 욕심이 담긴 미혹의 문을 의미한다. 두 개의 문은 에덴동산에서와같이 생명의 문과 죽음의 문이다. 좁은 문을 선택하면 살고 넓은 문을 선택하면 죽는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188. 좁은 문이란 팔복의 영성, 율법의 정신, 인애와 자비의 문으로서 현실성과 동떨어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다. 현실에 비추어 보면 가장 어리석어 보여 대부분 사람이 찾지 않아 좁은 문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좁은 문 안에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대자유와 대평화와 대자비로 가득한 행복의 나라이다. 그 대신 세속에 대한 욕구와 욕심을 버려야 얻을 수 있는 축복의 나라이다.

반면에 넓은 문이란 지식의 문, 경험의 문, 출세와 성공의 문, 유행의 문으로서 육체의 소욕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가장 현실적이며 노력에 따라 새로운 문명과 문화를 누릴 수 있어 대부분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이 선호하며 찾아가는 문이기에 넓은 문이라 비유하였다. 그러나 그 문 안에는 생존 경쟁이 치열하여 정신적 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가 있고 수고와 무거운 짐 그리고 고통이 따르는 곳이다.

189.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기복(祈福)을 바라는 것은 넓은 문을 통과하며 죽음의 길로 가는 미련한 사람들이고, 팔복의 영성을 따르는 참지도자와 성도들은 좁은 문을 통과하여 생명의 길로 가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팔복의 영성은 좁은 문이지만 생명의 길이고, 욕심과 문명은 넓은 문이지만 죽음의 길이다. 겸손과 온유와 관용과 용서와 인애와 자비는 좁은 문이지만 교만과 정죄와 권위와 차별과 몰인정은 넓은 문이다. 마음의 가난함은 생명의 길이고, 마음의 부유함은 죽음의 길이다. 나는 날마다 매 순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가 아니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가? 오늘의 교회는 생명의 터인가 아니면 죽음의 터인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190.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 7:15-20) 하였다. 아름다운 열매라는 것은 팔복의 영성을 근간으로 하여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22-23)와 사랑의 열매(고린도전서 13:4-7)를 의미하며, 나쁜 열매란 육체의 열매(갈라디아서 5:19-21)를 의미한다. 열매를 보아 그 사람을 안다고 한 것은 보이는 언행을 통해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마음 바탕을 안다는 말이니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 중에 가장 선호하는 인간미가 된 사람이어야 한다.

 

191. 그래서 그 열매를 보아 참지도자인지 거짓 지도자인지를 누구나 쉽게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짓 지도자들은 자신도 좁은 문을 피하고 사람들에게도 넓은 문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웃음을 보이고 겸손과 온유함을 보이지만 속으로는 차갑고 교만하며 권위를 앞세운다. 자비와 사랑을 말하면서 사람을 차별하고 차등을 둔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달라 외식과 위선을 취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부른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성령의 뜻으로 가르치지 못하고 왜곡하여 세속에서의 승리와 성공의 원리로 악용을 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정당화하기 위한 속임수일 것이며 또한 영성이 죽었음을 숨기기 위한 가장(假裝)일 것이다.

 

192.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아 교회를 통해 부와 명예와 문명의 혜택을 누린다. 영성(靈性)은 없고 물성(物性)만 가득한 도둑이요 강도이다. 공인(公人)으로도 사사로운 욕심을 가지고 지나친 사례비와 대접과 특권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하다고 여기며 또한 사인(私人)으로도 지나친 재물과 재산을 쌓으면서도 부끄러운 소치인줄을 모른다. 자신의 부와 명예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간증하며 마치 영적인 능력자로 자처한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부정한 일들을 지적받으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분노하며 상대를 평가절하하고 매도를 한다. 그들로부터는 언제나 겸허함과 온유함과 검소함과 참회를 보지 못한다. 비움과 나눔은 절기 설교에서나 꺼낼 뿐 자신과는 먼 얘기이다. 그들은 말만 할 뿐 행함은 없으며, 섬기려 하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자들이며, 낮아지기보다는 높아지려는 사람들이며, 대접하기보다는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며,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사람들이다.(마태 23:3-28)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193. 그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리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 7:21-23) 하였다. 이제 산상수훈의 결말에 이르게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리와 신앙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의’에 있다.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이며 주의 성산에서 사는 자는 누구입니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는 자’(시편 1:1-3)라고 하였다.

 

194.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진실하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머무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팔복의 영성이 살아있는 나라이며 또한 누구에게든지 겸손과 온유함으로 먼저 사람대접할 줄 아는 신실한 사랑함(慈愛)에 있는 것이다. 평생 교회 목회를 하고, 많은 성도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며, 대형 교회로도 성장을 시켜 추앙도 받다가 임종을 한 후 장례식에서 그의 평생의 업적을 찬양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는데 정작 예수로부터 불법을 행한 자라고 죄인 취급을 받으며 버림을 받는다면 얼마나 충격적이며 놀랄 일인가? 지금 그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교회 목회자가 아니라 경영자일 뿐이었고, 성도가 아니라 교인일 뿐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195. 평생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언제나 자신의 뜻만 세웠다면 그동안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신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평소 하나님을 대면한 일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일도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으로 선한 일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인 줄로 알았다면 그는 평생 하나님 없이 자아의 힘으로만 산 위선되고 거짓된 선지자이니 이것이 바로 불법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경을 앞세우고 행한 일이면 모두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평가를 보니 내 뜻으로만 가득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 그에게 성령 하나님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팔복의 영성을 찾아볼 수 없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가 어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는 사후에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 또는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21)고 하지 않았는가? 그의 언행과 삶의 열매를 보아 지금 천국의 사람인지 지옥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지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과 그 사랑을 잃으면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6. 우리가 평소에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자주 부르는가? 왜 주님을 찾고 부르는가? 나를 위함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의를 위함인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겉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면 공허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 뜻을 펼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데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뜻을 위해 존재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뜻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요한복음 6:38)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본(本)받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요한 6:40)고 하였으니 하나님의 뜻은 영원한 나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지 교회당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사후(死後)에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성취되는 영성의 나라이니 바로 팔복 영성의 자리이다.

 

19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태 7:24-27)고 하였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잘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고, 참 진리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기복(祈福)만을 쫓았다면 그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다. 우리에게는 생명 나무와 지식의 나무가 있고,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있으며,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다. 선택은 우리 자신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자신이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우리의 인생살이와 신앙생활은 마치 건축을 하는 것과 같다. 건축할 때는 반드시 기초공사를 가장 먼저 해야 한다. 만일 기초공사를 하지 않고 건축을 한다면 그 건물은 오래가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 기초가 바로 여덟 가지의 영성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터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세속적인 욕심만이 가득할 뿐이다.

 

권위 있는 가르침

 

198.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다’(마태 7:28-29)라고 하였다. 이제 보화와 같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마친다. 산상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현저히 다르게 큰 울림과 감동을 주어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졌다. 권위 있는 가르침은 어디서 나오는가? 가난한 마음을 비롯한 팔복의 영성에서 나온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마치기까지 세속적인 것은 그 어떠한 것이라도 마음에 담지 않았으니 이를 ‘비움’(虛心)이라고 한다. 그 비움 자리가 가난한 마음이요 성령의 자리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예수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뜻만이 가득하여 늘 영적으로 배부르고 부유하였다. 텅 빔 속의 충만함이니 세속의 욕심으로는 텅 비우고 영성으로는 꽉 채워짐이다. 누구보다도 교회 지도자들이 날마다 체득해야 할 영성이다. 그리고 그 영성을 살며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199. 다시 강조하거니와 팔복의 영성이 우리가 머물러야 할 교회요 집이다. 그 팔복의 영성은 곧 하나님 나라요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나라이다. 영성이 없는 신앙과 믿음은 결국 기복만을 바라는 무속신앙과 우상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기독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종교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종교들이 기복을 신앙과 믿음의 전부로 여기고 있는 실정이다. 기복을 신앙의 주제로 제시하는 성인(聖人)은 없으며 경전(經典)도 없다. 이런 점에서 세계 종교 지도자들은 기복적인 모든 종교적 행위를 멈추어야 할 것이다. 기복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곧 구원이고 해탈이다. 구원이란 세속적인 모든 욕심으로부터의 죽음을 의미하고, 영생이란 영성으로의 부활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육신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가 퇴색된 지금, 우리는 모두 신앙의 바른 의식과 삶의 일치를 위해 가난한 마음과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날 때 진정한 신앙 개혁이 일어날 수 있어 내가 살고 교회가 살며 그리고 세계가 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사랑의 삶이 곧 신앙이요 신앙은 곧 사랑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종교(宗敎)는 의식(儀式)과 기복(祈福)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근본 가르침이요 사람이 가야 할 길(道)이다.

 

Ⅲ. 왜 교회와 신앙이 개혁되어야 하는가?

 

200. 산상수훈의 중심은 가난한 마음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가르침에 있다. 가난한 마음이란 무욕의 빈 마음을 말하고, 대접하라는 것은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가까운 지인이나 모르는 이웃 더 나아가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빈 마음이 아니면 불가한 일이다. 인간이 존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오직 서로 존중하고 사랑함에 있는 것이다. 사랑을 떠난 인간의 존재와 부귀영화 그리고 신앙과 믿음은 모두가 헛되고 헛되며 공허할 뿐이다.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고, 삶의 의미도 없으며, 신앙과 믿음을 배반한 일이기에 결국 그의 존재가 무익할 뿐이다. 몸살이로는 잘 살았겠으나 참살이로는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그는 세상에 존재한 흔적도 없을 것이다.

 

201. 무가치한 삶을 살면서 교회 지도자나 선생 노릇을 하고 부와 명예를 누리며 권위 의식에 빠진 자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한, 기복적인 종교적 의식과 가르침을 계속 진행하는 한 수많은 영혼을 어둠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음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을 품으면서 세속적인 출세와 성공 등 물질적 복을 기대하는 신앙과 믿음은 무속신앙에 불과할 뿐 기복을 들어 줄 신은 어디에도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사랑’(God;道)은 없고 이기와 욕심만이 있는 삶과 신앙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예수 십자가의 정신을 망가뜨리는 행위이니 우리는 지금도 성령이 주는 말씀을 마음으로 깊이 깨달아야 한다.

 

202. 이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a more excellent way)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린도전서 12:28-31) 하였다. 그 가장 좋은 길이 곧 ‘사랑’이다. 가장 좋은 길이란 우리가 모두 함께 추구하며 가야 할 믿음의 길임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모든 은사와 교회와 신앙이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20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린도전서 13:1-3)라고 하였다. 그 어떠한 은사와 능력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곧 ’사랑‘임을 강조하고 있으니 우리의 직분과 각종 은사와 종교적인 모든 행위는 사랑이 뿌리가 되어 사랑의 열매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랑을 벗어난 모든 은사나 능력 그리고 의식(儀式)들은 세상에도 있으나 세상에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본성적으로 드러나는 ‘사랑’이다. 그러니 은사나 능력을 과시하거나 우쭐대지 말고 본디 사랑이 없는 모든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라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행위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도 없는 외식이요 위선이며 결국 하나님이 없음을 증명할 뿐이기 때문이다.

 

204. 그리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4-13) 하였다. 사랑의 실체는 하나님, 예수, 성령이다. ‘사랑’ 대신에 각각 하나님, 예수, 성령으로 다시 한번 묵상해보자. 그러면 참으로 잘 어울릴 것이다. 이제 각자의 이름을 대입하여 읽어보자. 많이 어색하고 부끄러울 것이다. 바로 그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어울림으로 변화를 주기 위해서 교회와 신앙의 변혁이 요구되는 것이다.

 

205. 우리가 성직자임을 자부하고, 교회 장로 권사 집사임을 자랑삼고, 교회 생활의 연조를 뽐내며,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한다 할지라도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외면한다면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모욕을 받는다고 하였다.(로마서 2:23-24) 오히려 이방인이 사랑을 드러내면 그가 곧 하나님의 사람이요 우리가 사랑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도 하였다.(로마서 2:25-29)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말하고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본성적으로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였다.(로마서 2:13)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만이 참 지도자이며 참 성도요 참사람이다.

 

206. 사도 야고보도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고 하였으며,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지만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야고보서 2:8-9) 하였다. 그리고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진대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야고보서 2:13)고 하였고,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물으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4-17)고 하였다.

 

207. 사도 요한의 가르침이 우리의 신앙적 양심을 일깨운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다’(요한일서 3:14)라고 하였고,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그러므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7-18) 하면서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요한일서 3:23)고 하였다. 요한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라’(요한일서 4:6-8) 하였다.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받은 계명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도 사랑한다’(요한일서 4:21)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 간의 마지막 만찬에서 마지막 남겨주신 유언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4-35) 하였다. 지금 나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인가 아니면 배신자인가?

 

208. 교회는 작은 천국이요 목회자는 사랑의 제물이며 성도는 화목의 사신이다. 하나님은 신(神)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가 가야 할 길(道)이요 따라야 할 스승(敎)이며 살아야 할 품성(性)이다. 길(道)은 곧 말씀을 뜻하니 이는 사람의 길을 의미하고, 스승(敎)은 근본 가르침인 종교를 뜻하니 이는 율법의 정신을 의미하며, 품성(性)은 성령의 열매를 뜻하니 이는 곧 사람 존중이다. 사람의 길은 예수의 공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었고, 율법의 정신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보이셨으며, 사람 존중은 사회의 약자들과 함께하고, 박해하는 원수들을 용서함으로 보여주었다. 따라서 예수의 공생애가 우리의 삶이어야 하고,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의 생활신조가 되어야 하며, 예수의 품성은 우리의 품성이어야 한다. 성직자들이여, 신도들이여 그리고 온 인류여! 진정 깨달아라! 인생과 신앙의 보화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사랑으로 있느니라. 사랑은 인생의 해답이요 신앙의 전부이며 또한 모든 경전과 율법의 근본정신이다. 이제 새장 속에서의 신앙과 믿음을 벗어나 사랑의 날갯짓으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맘껏 누려보자.

 

끝머리(末尾)

 

209. 하나님은 사랑을 베푸는 분이 아니라 사랑이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은혜를 베푸는 것은 사랑이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의인화(擬人化)된 하나님 또는 관념화된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성령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다. 성령의 본질은 오직 ‘사랑’이니 그 사랑이 곧 하나님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형상이며 말씀의 생명이다. 그래서 ‘사랑’은 동사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210.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니라 사랑의 영이 내 몸을 통해 살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 및 부활과 일치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 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옛사람과 옛 성품이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의 부활은 죽었던 사랑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와 하나 되어 함께 죽고 함께 산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이기적인 모든 욕심은 죽고 그 대신 사랑의 영이 내 마음(心靈)을 이루고, 내 의식(意識)이 되고, 나의 말과 행동이 되어 사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곧 ‘사랑’과 동의어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곧 사랑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음을 성경 수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서 예수 사랑이 사는 것이요 성령 하나님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자아와 욕심은 죽고 내 안에서 사랑의 성령이 내 몸을 통해 온전히 살게 하는 것이 교회와 신앙의 본질이다.

 

211.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기와 욕심과 경쟁을 위함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베풀기 위함이다. 마음의 욕심은 텅 비우고 작은 것이라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과 생명을 만물과 인간에게 나누듯이 우리도 본성적으로 이웃과 함께 마음으로부터의 진실과 사랑과 물질 등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내 안에서 성령 하나님이 사는 것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니 신앙과 믿음의 원형이다. 나에게 가난한 마음이 회복되면 항상 겸손하고 친절하며,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진심으로 동참하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기 위해 늘 청렴하고 검소하며, 사람 차별 없이 화평과 화목을 이루고, 이웃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는 오래 참고, 시기와 자랑과 교만과 무례함과 성냄을 행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구하기 위해 악한 생각을 도모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다.

 

212.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다. 일상(日常)에서 늘 소소하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나누는 것이 하나님이 말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마음으로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도 나누는 것이니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따르기 때문이다. 많이 가진 자는 많이 나누고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나누면서 물의 흐름처럼 사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세계관이 달라져야 한다. 인생과 신앙의 가치관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제 관념화된 신(神)으로부터 자유하고, 신전(神殿)과 종교적인 모든 의식(儀式)에도 매이지 않으며, 기복(祈福)과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참신앙과 참믿음은 진리를 삶으로 승화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기복적인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말씀의 정신을 따라 이웃과 세상을 섬겨야 하고,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요 믿음인 것이다.

 

213. 인간의 모든 욕심은 인간의 본질인 사랑(慈愛)을 죽이고 결국 자신의 얼(靈)도 죽이니 이것이 인류 멸망의 초석이 될 것이다. ‘사랑 하나님’이 외면을 받은 채 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며 발달하지만 결국 인류는 그 문명의 바벨탑 아래에 묻히게 될 것이다. 예수는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인간의 이기와 교만과 오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명의 바벨탑은 무너질 것이고(창세기 11:1-9), 세상의 권력 서열도 무참히 부서질 것이며,(다니엘 2:29-44) 자랑으로 여기던 성전 건물도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하고 모두 무너질 것이며, 거짓 교회 지도자들이 진리를 왜곡할 것이며,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 소문과 기근과 지진 등 자연 재해가 끊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진리를 말하는 자를 박해할 것이며, 불법과 거짓과 변명이 정의를 괴롭힐 것이니 이 모든 마지막 때의 징조들은 결국 사랑이 식어 죽어가기 때문(마태 24:1-13)이라고 하였다. 사랑이 식어 죽어 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미 우리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이 죽어가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사랑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것은 곧 우리에게 고통을 더하며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것이다.

 

214. 입술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으니 물신(物神)을 섬기는 것이 그것을 증언한다. 세상과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때의 징조를 알아채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누구보다도 늘 깨어서 예방을 선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앞서서 부패하고 부정을 앞질러 가고 있는 실정이니 참으로 애통할 일이다. 진실로 이제라도 깨달아야 할 것을 진정 깨닫고 참회하며 세속을 향한 모든 욕구와 욕심과 종교적 기득권 등을 포기하고 비움의 성직자가 되어 신앙적 양심의 오염도를 낮추는 일에 선두주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아닌가? 세상에 나올 때 빈손으로 온 것처럼 세상을 떠날 때도 빈손으로 떠나지 않는가? 그런데 굳이 살아있는 동안 욕심을 부리며 소유하고 쌓고 권세를 부릴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계속 그리 할 것이면 차라리 교회 공동체를 떠나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이름을 보존하는 일이 될 것이다.

 

215. 교회 지도자들이여! 세상의 모든 성직자들이여! 그리고 온 인류여! 우리는 이미 마지막 때의 징조인 고통과 죽음 안에 머물고 있음을 아는가? 지금의 소유와 권세와 명예가 우리의 고통과 죽음을 가중하고 있으며 그 고통과 죽음은 더욱 후손들을 무겁게 짓누를 것이다. 세계관이 달라지면 다른 세계관에 머물지 않는다. 욕심의 세계관에서 사랑의 세계관으로 탈바꿈하자는 것이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아닌가? 예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이다. 누구를 위한 죽음이며 무엇을 위한 죽음인가? 이미 죽었어야 할 욕심이 여전히 살아서 지금도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음을 진정 모르는가? 이제는 부디 욕심을 죽이고 사랑을 깨우자! 사랑은 영혼의 고향이요, 하나님의 품이다. 그 사랑이 진정 나를 구원하고 교회를 구원하며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의 마당이 곧 하나님 나라요 사랑의 나라이며 행복의 나라가 될 것이다. 이제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자.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없고 인생도 무가치한 것이니 종교적 의식이 중심인 신앙생활에서 성령의 열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생활신앙으로의 혁신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누구든지 회개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과 무관하고 하나님 나라도 얻을 수 없으리라!

 

에필로그

 

가장 위대한 종교, 위대한 신앙

영원 전부터 한 침묵(沈黙)이 있었다.

어느 날 오랜 침묵을 깨고 기지개를 핀다.

침묵은 자신을 둘러보니 허공(虛空)이었다.

허공에는 곳곳에 물이 있고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침묵이 빛을 불러오니 어둠이 잠시 물러나고,

하늘을 불러 위에 세우고

땅을 불러 아래에 세운다.

 

하늘 허공에는 해를 두어 낮을 주관하게 하고

달과 수많은 별을 두어 밤을 주관하게 하며

침묵은 빛이 되어 밤낮으로 땅을 살피고 보호한다.

그리고 공중에는 종류대로 날짐승들을 두고

땅에는 산천초목(山川草木)과 짐승들을 두고

땅 아래에도 종류대로 생물들을 두었으니,

침묵과 허공은 한 영(靈)이요 그를 하나님이라 부른다.

 

하나님은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와 지식의 나무를 두었으니

생명 나무는 사랑의 영이요 지식의 나무는 미혹의 영이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지었으니

그 형상은 사랑의 형상이다.

동산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되니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 곧 하나님이라.

너와 나 사이에 사랑 하나님이 있어

자유롭고 평화로우니 이것이 곧 행복이다.

 

어느 날 사람들은 지식의 나무를 바라본다.

먹음직스럽고 아름다워 탐스럽게 보이니

그만 미혹되어 사랑의 영을 빼앗긴다.

사랑을 잃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으니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리고 사랑의 동산을 떠나 밖으로 나오니

수고와 무거운 짐과 죽음이 기다린다.

 

오랫동안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니

다시 사랑의 동산으로 부르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희에게 평안을 주리라!

많은 사람이 그 평안을 거짓으로 여기지만

그 평안을 얻은 사람들이 있으니

곧 사랑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이다.

 

사랑은 하나님이요 성령임을 아니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밀려온다.

사랑이 채워지니 모든 욕심은 사라지고

빈 마음이 되니 이웃이 보인다.

사랑으로 이웃을 보니 또 다른 나의 모습이라

인애와 긍휼과 자비가 내 안에 가득하도다.

마음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니

여기가 곧 하나님 나라요 사랑의 나라이며

여기가 나의 고향이요, 어머니의 품이라

세상에서 구하고 찾던 행복이 아니던가!

 

사랑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요 성령의 삶이다.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든지 교만하지 아니하고 온유하며

사랑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시기와 미움과 원망과 무례함과 성냄이 없으며

사랑은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모든 해로움에 대해서는 오래 참고 또 참으며

관용을 베풀어 언제나 악한 생각을 도모하지 않는다.

 

사랑은 가난한 마음이요 빈 마음이며

사랑은 긍휼과 자비요 검소함과 청렴함이라

사랑은 늘 변함없이 자족(自足)을 따를 뿐

결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다투지 않는다.

사랑의 사람은 이기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성령으로 생명 삼아 성령을 따라 산다.

사랑은 곧 하나님이며 성령이고 말씀이며 진리이다.

사랑을 회복하면 하나님 나라요 하나님의 교회이고

참 신앙이며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 존재, 성령 존재

가장 위대한 종교는 사랑이고,

가장 위대한 신(神)은 사랑이며,

가장 위대한 성직자도 사랑이고,

가장 위대한 신도도 사랑이니,

사람 사랑할 줄 아는 교회,

사람 사랑할 줄 아는 성도,

이것만이 가장 위대한 삶이요

가장 위대한 신앙이다.

 

■ 김영찬(金泳贊)목사 소개

(행복문화교실 ; paulyck@daum.net)

1954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성결신학대학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교회 목회를 10년간 하였으며, 호스피스 사역을 17년 동안 하였다. 동양철학과 이웃 종교의 경전들을 꾸준히 공부하여 진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신앙의 갱신을 위한 세미나와 인문학 강사 활동을 하였으며, 진리파지의 정신으로 일관하면서 학위 논문으로는 <구원과 관련된 믿음과 행함에 대한 이해>로 신앙과 사랑의 관계를 밝혔다. 저서로는 비매품 <삶에서 삶으로> <유전자를 알면 건강이 보인다>의 소책자와 최근 노자 도덕경을 번역.풀이한 <잃어버린 사람의 길>상.하권을 출간하였으며 금번 <교회와 신앙 개혁서>를 내놓게 되었다.

본 개혁서를 출간하지 않고 비매품으로 내놓은 것은 배포의 폭을 제한하지 않고 누구든지 무상으로 널리 읽혀져 교회와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들이 모여져 결국 교회의 개혁과 지도자들의 변화를 일으키는 초석이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개혁서를 선한 의미에서 릴레이식 추천 전달이 되기를 바란다. 특히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구분하지 않고 본 개혁서가 모든 이들의 마음을 살리고, 정신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는 진정한 생명의 양식이 되기를 기대한다. 생명(生命)은 곧 삶(生)이다.(Life Is Life.)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