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 자리가 든든합니다/시편 26:1-12

▲ 김 기 석 목사
청파교회 담임

+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을 읽다가 눈이 번뜩 뜨이는 대목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해 여름, 어린 카잔차키스는 아버지와 함께 포도밭에 있는 오두막에 가서 지냈습니다. 갑자기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고, 한바탕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집에 두고 온 건조 중인 포도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수도가 넘쳐서 길바닥에 물이 강처럼 흘렀습니다. 집집마다 1년 내내 고생해 거두어 반쯤 말린 포도가 물에 휩쓸려갔습니다. 마을 곳곳에서 여자들의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집으로 달려가면서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했습니다. 아버지도 흐느껴 우실까? 욕설을 퍼붓고 고함을 지를까? 집에 도착해 건조장을 보니 과연 포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문간에 서서 수염을 깨물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뒤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포도가 다 없어졌어요”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큰소리로 대꾸했습니다. “시끄럽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 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 순간이 내가 인간으로서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위대한 교훈 노릇을 했다고 믿는다. 나는 욕이나 애원도 하지 않고 울지도 않으면서, 문간에 꼼짝 않고 침착하게 서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항상 기억했다. 꼼짝 않고 서서 재난을 지켜보며,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 혼자만이 인간의 위엄을 그대로 지켰다.”

시련과 고통은 우리를 낙심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근본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쉽게 사라져 버릴 것들에 우리 삶을 비끌어 매는 것이 어리석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도 합니다. 인간의 위엄은 고통의 순간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 콩팥과 심장을 보시는 주님

감사절은 우리에게 삶의 근본을 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이러저러한 바람이 이루어졌을 때뿐만 아니라,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시고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발생합니다.

시편 26편을 몇 번씩 반복하여 읽으면서 이 시인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2).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으로 번역된 구절은 사실 ‘콩팥과 심장‘을 의미합니다. 옛 사람들은 마음이 장기 속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장이 생각과 결단의 자리라면 콩팥은 감정이나 양심의 자리입니다. 본문의 시인은 자기의 생각, 지향, 감정, 양심을 다 주님 앞에 내놓고 주님의 판단을 기다립니다.

내면의 힘은 고독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외로움은 홀로 있음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고독은 홀로 있음의 영광입니다. 홀로 있어도 비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려면 지향이 분명해야 합니다.
 

+ 양심은 자유 얻었네

시인은 고독 속에서도 기쁨을 누립니다. 그가 기뻐하는 것은 원하는 바를 다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등 돌리며 살지 않았다는 내적인 자부심 때문입니다.

“주님, 내가 손을 씻어 내 무죄함을 드러내며 주님의 제단을 두루 돌면서, 감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놀라운 일들을 모두 다 전하겠습니다“(6-7).

죄와 타협하지 않은 자의 기쁨,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자의 감사가 넘칩니다.
 

+ 거대한 뿌리

그러나 사람이기에 가끔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간절히 기도를 바치며 삽니다. 적당히 사는 이들은 절박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 수 없음을 아는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깨끗하게 살려고 하오니, 이 몸을 구하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예배하는 모임에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11~12).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살려고 작정한다면 우리도 이 시인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외로운 순간에도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다시금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감사는 깊어질 것이고, 그런 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고 사는 이들은 시인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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