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가 메시아의 모습으로 뜻있는 유대-이스라엘에 등장했을 때 유대인들은 ‘랍비’를 가지고 있었다. 랍비는 유대교의 지도자요 선생이었으나 제사장이 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1517년 이후 유럽에 등장했을 때, 16세기 개혁자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 지도자를 로마 가톨릭의 사제나 주교에서 찾지 않았었다.

프로테스탄트 조직신학 체계는 지금의 한국교회처럼 목회자가 제사장과 혼동하는 신학구조가 아니다. 그래서 제사장이나 가톨릭의 본당 신부나 주교처럼 행세하는 목회자들이 천국에 가보면 그곳에는 그런 목회자들이 머물 자리가 없을 것이다. 신부나 제사장을 그곳에서 만나면 그들에게는 머물 자리가 있는데 목회자는 앉고 설 자리가 없어서 민망한 처지가 될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예수 메시아의 만인제사론에 기초해 있고, 예수는 구약 이사야 66장의 신학에 기초해 있기에 16세기 신학개혁을 했던 이들의 초기 심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모범으로 구약, 특히 바벨론 포로기, 그 중에서도 헬레니즘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알렉산드리아에서 70인경(Septuaginta)을 번역해 낸 이후에 신선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랍비’가 있었고, 마지막 랍비 중에서 랍비 예수가 메시아로 모습을 드러냈던 때와 같이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에서도 제사장이나 사제가 아닌 랍비형 목사 운동이 일어난다면 한국교회가 세계기독교사에서 별처럼 등장할 수 있는데….

사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그가 죽기 직전인 1883년까지 다듬어낸 유물론 종교철학이었고, 그의 책에 기초해 러시아 볼셰비키들이 1917년 11월 혁명으로 공산당 세력을 만들었으나, 러시아, 동유럽, 중국, 북한 그 어느 곳에서도 기독교가 공산당 권력을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1953년 7월 27일 휴전, 그리고 휴전선 남방의 기독교가 잘하면 북한을 승복시킬 수 있다.

랍비형 목회자가 되면 개교회 목회자들의 경쟁심이나 교회 사이즈를 키워야 된다는 강박관념, 돈 많은 있는 신자들 눈치 보기, 이웃 동역자 교회와 경쟁하기, 교회의 사유화 유혹에서도 해방을 받을 수 있다.

날마다 노심초사는 오직 예수를 더 깊이 배우고 싶은 열망과 랍비형 목사로서의 몸 관리, 품위 지키기 등 뿐 아니라 모든 교회의 중심이 랍비들의 예루살렘 지향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채우기 위한 자기관리와 함께 더 중요한 것은 교회와 교회들, 이 교회와 저 교회 신자들 간의 오고감이 자유롭고 크게, 더 크게 대한민국 안에 있는 교회는 무조건 하나라는 모습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한국교회여! 내가 너희는 믿는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 기독교에게는 ‘시간’이 조금 모자란다. 초읽기 단계로 접어들었다. 5년만 늦게 남북대화가 이루어졌다면 좋았을 터인데, 조금 빠르다. 그래도 좋다. 한국교회 담임목사들이 제사장이나 사제노릇 그만두고, 랍비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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