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자이자 서예가로서 걸어온 인생 책 한 권에 담은 황 재 국 교수

1972년부터 현재까지 쓴 글씨와
전국 방방곡곡에 새겨놓은
현판, 비문 등 220여 점 수록

고교시절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God First’ 신앙, 인생의 이정표 돼

 

▲ 황재국 교수

한학자이자 서예가인 중관(中觀) 황재국 교수(77, 강원대학교 명예교수)는 몰라도 그의 글씨를 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전국 각지 중요한 곳들, 우리 눈이 닿는 곳곳의 현판, 표지석, 기념비 등 300여 점에 그의 글씨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1972년부터 현재까지 쓴 글씨와 전국 방방곡곡에 새겨놓은 현판, 비문 등 220여 점을 추려 <중관 황재국 서집>을 펴냈다.

전·예·해·행·초서, 한글, 국한문혼용 등 다양한 서체로 쓰인 그의 작품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서집의 독특한 배열이 눈에 띈다. 서각, 목판, 주련, 문구석, 시비 등 장르를 구분하면서 가장 첫 머리에는 꼭 신앙이 담긴 작품을 넣은 것이다. 책이 시작하는 첫 장에는 ‘영생 사랑’ 문구와 함께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는 요한복음 3장 16절 작품을 배치했다.

그 이유를 묻자 황 교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강원도 춘천의 한울섬김교회 장로인 그는 “자질이 너무나 부족한 나에게 서예를 익히게 하시고 그 귀한 달란트로 섬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 미련함으로 쓰고 또 쓰고

서집에 수록된 전국 각지에 산재한 비문, 현판들은 개인적 요청에 의해 세워진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공의 의미를 담은 것들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담은 건물이나 장소, 표식을 나타내거나 기념과 의의를 담아낸 경우가 많다. 이것이 황 교수의 글씨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이유다.

황재국 교수는 강원대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서예가로서 굵직굵직한 역사적 기념행사와 기념관에도 자취를 남겼다. 퇴계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 이육사문학관 설립, 목은기념관 개관, 유성룡 선생 서세 400주년 기념전, 의병장 류인석 선생 현창사업 등에서 서예계의 유수 작가들의 작품 전시를 기획 운영했다. 천안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어록전 운영위원장으로서 주요 서예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강원서학회 초대회장, 강원도 기독교미술인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강원도 서예 발전에도 공헌해왔다.

또한 100년을 넘긴 역사 깊은 교회들의 현판을 비롯해 고 김준곤 목사(CCC 설립자)의 묘비 등 기독교계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금석문은 단 한 자의 오탈자도 없어야 하기에 시일이 오래 걸리고 그만큼 육체적으로 힘도 많이 든다. 학자이자 서예가로 살아온 길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금석, 현판 등을 남길 수 있었을까? 황 교수는 자신의 장점으로 ‘미련함’을 꼽았다.

“젊은 친구들을 보니 금방 멋진 글씨 쓰는 것을 보고 ‘내가 글씨에 소질이 없었구나’ 하는 것을 이제 깨달았어요. 그래도 여태 그것을 모르고 매달려왔으니 참 미련했지요. 그런데 한 가지를 꾸준히 지속하는 데는 미련함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그의 글씨 훈련은 신앙 여정과 많이 닮았다.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 요령 피우지 않고 달려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려서부터 글씨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가난한 살림에 붓과 벼루, 종이는 꿈에도 그려보기 힘든 것이었다. 소 꼴 먹이러 갈 때면 낙동강변 모래바닥에 막대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쓰고, 강물이 지우면 또 쓰고. 나뭇잎에도 쓰고, 어쩌다 신문지라도 한 장 생기면 먹물이 굳어 종이가 뻣뻣해질 때까지 쓰고 또 쓰고 하며 글씨를 연습했다. 그러다가 1961년 동방연서회에 입회해 일중 김충현 선생, 여초 김응현 선생에게서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웠다. 1964년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인전 입선, 1966년 제15회 국전에서 입선하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경희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중국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학문의 길을 선택했지만 서예의 끊을 놓을 수 없어 학문의 길을 가면서도 계속해서 실력을 닦았다.

한국미술협회 초대작가, 한국서예가협회 상임위원, 한국서예학회 이사, 근역서가회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서예가로서의 활동을 이어왔다.

“교수 정년퇴임 전에는 학문에 치중했고, 40년 교수 생활 마치고 정년퇴임한 후에는 서예에 진력했습니다. 학문과 글씨를 병행하는 것이 어렵지만 한학자이니 글씨에 정성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어요.”

황재국 교수의 작품들. 우리가 언젠가는 봤음직한 글씨들은 전국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서체 또한 다양하다. 붓을 든 지 70여 년의세월이 글씨에서 느껴진다.

# 먼저 하나님(God First!)

그가 책의 장마다 신앙 작품을 앞세운 것은 그동안 살아온 신앙의 삶과 맞닿아 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했지만 신앙의 깊이를 배우고 깨달은 것은 안동의 경안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복음 앞에 자신들을 내어놓은 선교사들의 삶을 가까이서 목도한 것이 계기가 됐다.

경안고등학교는 1954년에 설립돼 반피득(Peter Van Liero), 우열성(Stanton R. Wilson), 마삼락(Samuel Hugh Moffett) 선교사 등의 헌신으로 세워졌다. 기독교 정신에 기초해 봉사하고 애국하는 학생을 육성하는 것을 건학 목적으로 삼고, 교시가 ‘먼저 하나님(God First)’(마 6:33)이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일을 우선하는 삶을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보았다. 선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복음에 기초한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힘썼고, 그 아내 선교사들도 영어 등의 수업을 진행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촌 형이 결혼하는데 주례를 우열성 선교사께 부탁드리려고 찾아갔더니 흔쾌히 허락했어요. 포장도 안 된 산골짜기 길을 지프차로 모시고 도착하니 허리를 한참 구부리고 들어가야 하는 초가집이었어요. 외국인을 처음 본 사람들이 놀리고 해도 온화한 표정으로 진중하게 결혼예식을 진행하셨어요. 모두가 감격한 결혼식이었지요.”

 

공부도 넉넉히 한 수재들이 이역만리 한국 땅에 와서 헌신하는 이유는 오로지 복음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복음화 하는 일 앞에 그 어느 것도 우선하지 않은 그들의 삶을 보며 신앙인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을 그때 배웠다.

서집 두 번째 장인 ‘문구석·시비·어록비’ 장을 시작하면서는 왼쪽을 백지로 한 면 남겨두고 ‘오직 예수’ 작품을 실었다. “예수님 앞에는 누구도, 그 어느 것도 설 수 없다”는 그의 신앙 표현이다.

‘먼저 하나님’과 ‘미련함’으로 다져온 그의 신앙은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힘 있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힘을 잃어가는 강원도기독미술인협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강원대 교수로 가면서 강원도기독미술인협회를 시작한 초기 멤버로 이미 회장을 지냈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나 많이 약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매년 갖는 협회전마저 진행하기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는 황 교수가 호기롭게 나섰다. 자신이 총무 맡기를 자처한 것. 힘껏 도울 테니 힘내서 해보자고 제안해 11월 1~30일까지 갤러리 오르에서 21회 강원도기독교미술인협회전을 잘 마쳤다.

황 교수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금석문 작품을 모은 서집을 내면서 다시금 신앙의 결단을 새롭게 하고 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의 작품들마다 나에게는 너무나 힘이 들었고, 정성을 쏟은 소중한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공이 든 금석문 작품들도 머지않아 하나씩 소멸해 갈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것, 영원한 생명 영생을 바라며 기도하고 섬기는 데 매진할 것입니다.”

황 교수는 “이제부터는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기도하고 섬길 것”이라면서 노년의 삶을 ‘영원한 것’을 위해 헌신하며 살 것을 고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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