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 승 진(사)
한국기독교출판협회 사무국장

어릴 적 나는 많은 위인전기를 읽으며 우리나라와 민족을 지키고 또 빛낸 인물들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살았다. 광개토대왕, 장수왕, 김춘추, 김유신, 계백, 을지문덕,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등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을 위인전기로 또 교과서로 배웠다.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용맹한 다윗, 지혜로운 솔로몬을 필두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최고의 변증가인 바울에 이르기까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웠다. 그러나 늘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어릴 적부터 ‘남다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대개 남다른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선택하고 집중하고 사랑한다. 책을 사랑하고, 무예를 수련하고, 예를 배운다. 미래를 향한 원대한 꿈을 꾸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 대단한 재능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학교에서나 집에서 어른들은 하나같이 ‘위인을 본받으라’는 메시지를, ‘남다르게 살라’는 메시지를 어린 자녀들에게 주곤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어린이 예수님이 있었다면, 어른들처럼 말했을지 의문이다. ‘남다르게 사는 법’이 조금 다른 의미이지 않을까?

아무튼 어린 예수님도 비범하기는 남부럽지 않아서, 누가복음에 따르면 “강하고, 지혜가 충족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다고 한다. 12살 때는 유월절에 부모님과 이별한 채로 두려움 없이 예루살렘에서 선생들과 토론도 하셨다(누가복음 2장). 당시 지금과 같이 초중고로 나뉜 학교가 있어서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버지 요셉도 목수였는데, 어린 예수는 대 랍비들과 토론을 했으니 그 지혜와 총명이 정말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였을까? 난 유년부 시절 어린 예수님에 대해 배우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늘 예수님을 예로 들면서 ‘너와 좀 다르지?’ 하는 뉘앙스의 훈계를 들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불혹을 넘긴 지금도 나는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 “예수님은 정말 어떤 어린이였을까?”

내겐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있는데, 성품이 좋고 쾌활해서 친구들과 잘 지내고, 두 살 많은 누나와 크게 다투지도 않는다. 학교 공부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수업시간에 장난치지 않고 늘 집중한다고 선생님이 칭찬해 주곤 하시니, 부모 된 입장에서 고맙기만 한 아들이다. 아마도 유일한 흠이라면 스마트폰에 ‘중독’ 증세를 보인다는 사실인데, 이마저도 또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 심각한 수준은 아니어서 가급적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착한 아들이 언젠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아빠, 아빠는 어릴 때 예수님을 닮고 싶었어요?” 약간 당황해서 급히 이유를 묻는 내게 아들의 대답이 걸작이다. “예수님은 엄친아 같아요. 엄마들이 바라는 아들이요. 난 예수님이 아닌데….”

이제 곧 성탄절이다. 아기 예수님, 어린이 예수님, 청년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까지 아마도 수많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교회에서 가정에서 들릴게 분명하다. 그 이야기들이 예수님의 뜻처럼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이야기면 좋겠다. 너무나 남다르게 완벽한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가르치는 무례함이 아니라,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연약한 죄인을 보듬어 안으시는 남다른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랑이 넘쳐나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로부터 주변을 향해 그 고백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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