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역사적 접근법

사상적 접근법이고 역사적 접근법이다. 역사 속에서 사상이 영그는 것이니까 사상의 몸체인 역사를 생각해본다. 기독교 계몽기 아들들은 주로 후기 헬레니즘에 맹목성에 대개 약하다. 그래서 헬레니즘 초기를 알렉산드로스의 출사에 시기를 맞췄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후기 몫이다. 그들은 요한복음서간 말이지 겨우 헬레니즘의 한 아류인 거야…, 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려 하지만 그들이 이 말씀 어디에서 “헬레니즘”을 찾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로고스라는 단어 한마디를 보고서 넋이 빠져버렸다면 그는 학문적 두뇌가 모자라거나 무성의한 사람이 틀림없다.

요한복음 21장 25절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하신 이 대목은 어떤 사상적 배경을 꺼내려 하는가? 아무리 살펴도 헬레니즘의 경향적 해석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대목의 말씀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스케일은 감히 예측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 그리스도인, 이슬람의 동일조상인 아브라함의 어법 이해력을 동원해볼까?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 최초로 팔레스타인 땅 세겜에 도착했을 때 나이가 75살이 넘었었다.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팔레스타인 땅에 왔으나 아흔 살이 넘어도 자식을 주시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어찌 하실 거냐며 하나님께 졸라대니까 하나님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저 하늘을 보라 내가 너에게 저 하늘 뭇 별들보다 더 많은 자손을 주리라, 또 저 바닷가 모래밭의 모래알들보다 더 많은 자식을 주리라 하였다. 이 대목과 요한복음 21장 25절을 연계시켜서 답을 찾아보라.

그리고 후기 헬레니스트들이 매달리는 요한복음 첫 줄의 “로고스”라는 단어 한마디에 목을 매는 수준을 겹쳐서 생각을 거듭해보라. 헬라, 그리스 사상에서 “로고스”는 단순한 해석법으로 제단하기 어려운 사상성을 지닌 어휘이다.

그리스어 또는 그리스 사상이 어디서 왔을까? 그리스가 이집트의 식민지였으니까, 이집트의 나일강 사상 또는 나일강이 지중해 바다의 페니키아로 나왔을 때 그리스와 만났을 터인데 페니키아 항구를 드나드는 배들은 어디서 무엇을 실어나르는 배들이었을까?

그들이 나일강 사상이나 그리스 사상보다 더 길고 장엄한 역사를 가진 북방 초원을 달리던 역사 이전기의 영웅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고대 인도-유럽인이라고 하는 그들 시대부터까지 말이다.

그들 인도-유럽인들 이후, 수메르·아카드·바벨론·아시리아·이집트 그리고 그리스나 이집트 인더스나 황허 문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겨우 그 이후에 형성된 로고스라는 철학적 용어에 요한복음을 묶어둘 수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은 구약 역사와 언어를 충분히 소화(공부)해낸 매우 겸허한 사람들에 의해서 집약적이고 집단성 탐구 과정을 거친 사상의 결정체이다.

로고스는 히브리 사상의 임마누엘과 만난다. 동의어로, 로고스를 임마누엘의 동의어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요한복음의 문으로 일단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우주에 가득한 모든 힘과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인간 세상을 만날 때 그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그 자리가 로고스요 임마누엘이다. 어떤 사람은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 고 투정하려 들겠으나 역사시대와 선 역사시대가 있다. 저 북방이 얼음바다였다가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제4빙하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부터 녹았고, 얼음덩이 밑에서 초원이 드러났다. 그때부터 인류는 본격적인 문명기를 시작했으니 아마, 하나님이 세상으로 뛰어드시기로 결심하셨을 것이다. 또는 3만여 년 전, 네안데르탈인 시대 자음 표현뿐인 그들 시대를 지나 크로마뇽인 자·모음을 활용할 수 있는 시대에 비로소 로고스가 나타났을 것이고 임마누엘 또한 발성음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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