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에게 3.1 정신에 대해 듣는다

“당시 기독교인들의
목숨 건
3.1 운동 본받도록
한국교회, 의식
변화시키는 전환점으로
삼아야”

 

▲ 김승태 소장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 각 기관과 교단들은 저마다 기념행사로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런 속에서 비슷한 행사와 사업의 중복이 포착되는 등 자칫 3.1운동 정신의 계승보다 일회성 보이기 식 행사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에게 3.1운동 100주년에 새겨야 할 의미와 당시 기독교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배경에 대해 들어봤다.

△ 3.1운동 당시 민족의 고난 앞에 종교계가 힘을 모았고 특히 기독교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그 의미는 무엇인지?

- 3.1운동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말한다. 혁명이라는 것은 제국의 식민지 상황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체제를 바꾸는  동력이 됐다. 3.1운동 당시 자주독립, 정의인도, 평등평화 이념을 추구했다. 그러나 여전히 분단의 현실에서 살고 있기에 3.1운동은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있다.

또 하나,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정신사적으로 근대민족으로 거듭난 중생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공적 신앙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기독교인이 23만 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1.5%에 불과했는데 체포되어 옥고 치른 사람들 비중으로 보면 기독교인이 17.6%나 된다. 교세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이는 개인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다 교회, 나라, 민족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공적 신앙 정신으로 3.1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의 3.1운동 참여는 현실참여, 역사참여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총회장이나 노회장, 교회의 담임목사가 교단이나 교파적인 참여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참여했다. 종교, 교파를 초월해 협력했다. 한국교회가 공공의 가치를 위해 단결하고 다른 종교와 연합하는 좋은 모범을 보인 것이다.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3.1운동 100주년 관련 사업으로 무엇을 진행하고 있나?

- 3.1운동 당시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들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 기독교의 참여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정리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우리 연구소는 3.1운동 당시 기독신보, 매일신보, 신한민보, 독립신문에 게재됐던 관련 기사들을 모은 자료집과 기독교인으로서 재판 받은 사람들의 판결문 300편 중 150편을 번역해 책으로 발간한다. 이 외에도 선교사들이 남긴 영문 자료들을 번역해서 1,2권으로 만들고, 민족대표 33인 중 16명 기독교인의 열전을 전기 형식으로 발행하며, 기독교 관련 논문집도 준비하고 있다.

△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새겨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 3.1운동 100주년이 한국교회로서는 전환점이 돼야 한다. 기념사업들에 3.1운동 정신을 새기는 것과 함께 미래적인 지향점을 담아야 한다.

3.1운동 당시 모습에 비춰보면 오늘에는 신앙이 사사화, 개인주의화, 개교회주의화 됐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도 개 교단, 개 교회에 관련된 것들에 치중하는 것들을 보게 된다. 공적인 사업, 공동의 사업에는 거의 관심들이 없다. 3.1운동 당시처럼 단결해야 하는데 교회들이 너무 파편화 돼 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공적 신앙을 추구했을 뿐 아니라 축복관도 달랐다. 그때는 복음 위해 희생하고 고난당하는 것을 축복으로 여겼다. 오늘날은 자기 안위에 치중하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간다.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서 3.1운동이 추구했던 이념이 앞으로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보편적 가치인 것을 보여줘야 한다. 33인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목숨을 걸고 결단한 것이다. 그렇게 보편적 가치에 자신을 던지며 희생하는 것은 자유, 평등, 정의, 인도 등 성서의 가치와 통한다. 그런 희생정신, 의를 추구하는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 3.1운동 100주년 자료집을 준비하면서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 선교사들의 자료를 살피면서 발견한 것이 3.1운동이 한 달여 동안 준비됐는데 선교사들에게 일체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일 아침에 스코필드 선교사에게만 운동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달라는 당부를 했을 뿐이다. 그래서 3.1운동 관련 사진은 대부분 스코필드 선교사가 촬영한 것만 남아있다. 그만큼 3.1운동 준비과정에서 비밀이 유지된 것에 선교사들이 놀랐다.

또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이 비폭력 저항운동에 나서 각계각층이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보면서 감탄해 고국에 알린 자료들이 있다. 비폭력 무저항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이었다. 당시 일본은 의경을 탄압할 만한 무기를 모두 회수했고 무기 지니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폭력 저항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장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탁월한 이념이었다. 만일 폭력을 수반한 시위였다면 당시 1800만 인구 중 연인원 202만 명, 인구의 10% 이상의 참여가 가능했을까.

3.1운동은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기독교인들이 목숨 걸고 나서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에 대해 굉장히 배타적이고 비난했던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을 동경하게 됐고 만세운동의 지도자가 돼 줄 것을 기대했다. 강원도에서 유림들이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는 기록들이 있다.

3.1운동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3.1운동 100주년이 단지 기념행사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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