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탐구(탐색) ⑱

18세기 계몽철학기 문서비평 그룹들이 “요한복음”을 형편없는 잡물 취급하기도 했었고, 그들 영역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 중에는 지금도 요한복음을 가까이하려 들지 않는다.

삽화 한 토막이다. 지난 주 하다가 그친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간의 고고학 자료에 근거한 이야기이다. 지구의 마지막 북방 빙하기가 3만여 년에 끝났으나 원시 인류 형태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간에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그들은 유사한 외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능의 차이가 컸다.

고고학 진행 자료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은 자모음 조화법을 몰라서 우, 우아우 등 짐승들의 비명 같은 자음형 소리만 내고 크로마뇽인은 자모음 활용법에 능숙해 서로 간에 대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언어의 발달은 계속 두뇌발달로 이어지는데, 사냥도구를 정교하고 다양하게 만들 수 있어서 사냥 효과도 다양해졌다. 그들은 날쌘 사냥도구로 빠른 짐승을 잡기도 하고, 날짐승, 심지어 강가에 나가서 낚시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두뇌가 발전하면서 아직도 혹독한 추위를 깊은 동굴 속에서 견디지 않고 사냥도구 만들면서 발명한 바늘로 짐승가죽들을 이어 붙여서 따뜻한 옷을 만들었다. 그들의 이동거리는 확대되고 민첩해졌다. 그와 반대로 크로마뇽인은 장대한 몸체, 몸에 난 털로만 추위를 견뎌야 하고 사냥 또한 짐승들 가까운 곳에서 하다가 역습당해 낭패를 보는 등 인생이 참으로 공고해져갔다.

어느덧 네안데르탈인은 숫자가 줄어들어 문명기를 크로마뇽인에게 내주었다는 설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다. 자음과 모음조화가 가능한 경우 자음영역을 지식의 범위로 설정하고 모음은 신령한 영역까지 곧 하나님(神)의 언어영역이라고 가정해 본다. 자모음 조화 체계는 이성과 영적 세계까지의 조화로 설정했을 때, 겨우 만물의 영장일 뿐인 인간이 신언(神言)해독의 경지에 이른다면 우주의 조화와 신비를 헤아릴 수 있는 것, 그래서 시편에서 내가 너희를 신(神)이라 하였다(시 82:6) 하신 말씀과 만나게 된다.

너무 심했나? 과장법이 지나쳤나? 또 말씀 한 구절 떠오른다. 존귀에 처하나 깨달음이 없은즉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시 49:20)라는 말씀까지 도원하면 이해가 더 빨라질 수 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로 말하면 공관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을 평면적 진술로 대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복음서 기록자가 예수의 하신 일을 단순기록을 한 내용이 얼마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가 예수의 영역과 수준에 올라서서 마치 자기의 신앙고백과 예수의 생애가 1%의 오차마저도 양보하기 싫은 듯 자기의 삶 모두를 동원하여 쓴 언어다. 이런 언어를 20세기 초 프랑스문학에서는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라 했다. 몸으로 표현하는 기법, 묘사법의 원형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 하나, 충격을 감수하고 마음이 진리 찾기에 간절한 이들을 위해서 한마디 더 한다면 불교로 보자면 공관복음이 소승적 한계 안에 머물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대승론 단계다. 실제로 불교가 힌두쿠시 남단 인더스 강줄기에서 북쪽 저 너머 좌우로 천산과 곤륜 사이 중턱 박트리아 원경 지대에서 대승불교가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불교의 대승론자들은 요한복음 저자의 방계 제자 그룹에 속한 자들이 많을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기독론에 있어서 기독교는 예수 복음의 대승논법적 해석을 기피했기에 역사의 속도, 여기서 역사는 하나님의 걸음이다.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자는 퇴행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비극적 종교로 끝날 수도 있다. 그 경계는 요한의 책 해석법이 갈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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