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 은 성
총신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세 살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옛말이 있지만 난 이 문구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중생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 문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태신앙인으로 정말 신자들, 즉 교회당에 문턱을 밟거나 성경책을 들고 예배당에 앉는 자 중 불과 몇 퍼센트밖에 되지 않은 진정한 신자가 있다고 말하면 부인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2~3년 전 칭의와 성화의 문제로 신학계를 달궜던 뜨거운 감자가 있었다. 전자에 중점을 두는 자와 후자에 중점을 두는 자의 논쟁이었다. 여기서 신학논쟁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논점은 분명한데 신자가 신자답게 살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교회와 관련해 무수한 범죄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들이지만 버젓이 한국교회 내에서 일어난다. 많은 이들이 한국교회가 중세교회, 즉 로마가톨릭교회를 닮아가는 중이라고 판단한다.

중생된 자는 거룩한 자가 돼야 한다는 꿈을 가지고 지상에서 중생되기 전 영적 갈등이 있었지만 중생된 후에는 없다고 말하는 극우파도 있다. 또 성화가 없으면 칭의도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로마가톨릭주의는 이에 대해 성화로 칭의가 완성되는데 지상에서 불완전하면 연옥으로 간다고 피할 길을 마련했다. 어느 주장이 옳을까? 방금 제시한 견해들 모두 비성경적이다.

중생의 목적은 거룩함이다. 거룩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본질이다. 그렇다고 논리적 명제로 거룩이 중생이라든지 칭의라든지 말하면 그릇된 명제이다. 충분조건을 갖췄다고 하여 필수조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중생의 목적은 거룩함이다. 거룩하라는 명령은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문제는 중생이 인간에게 비밀적이고 신비적이라는 것이다. 불가해적이지 불가지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인간의 인지력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보니 인간은 자신이 중생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살아간다. 중생이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기에 인간은 수동적이다. 수동적이라는 것은 무책임하게 모른 채로 이뤄진다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상적 은혜라는 의미이다.

교회당에 모이는 자들은 중생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그 삶에 따라 살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만큼 중생을 확인, 즉 중생의 체험이 없다든지 중생되지 않은 유기된 자일 수 있다. 중생된 것을 확인하려면 배움을 통해 가능하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중생된 자의 도리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한 것이다(요 6:45). 배우는 자는 적어도 중생에 관심을 가진 자이다. 중생되었거나 중생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 관한 심정을 가진 것이다.

그러면 다시금 처음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신자는 거룩해야 한다는 문구를 수정해보자. 중생을 체험한 자는 거룩해야 한다. 그렇다! 자신의 중생을 모를 경우도 있기 때문에 말씀을 배워야 한다. 구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는 말씀을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를 돌아보자. 과연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 할까? 몇 명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고 있을까?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확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 교회당에 발을 딛는 자 중에 그렇다. 정말 성경을 읽지도 듣지도 배우지도 지키지도 않는다. 그러면 구원받을 수도 그만큼 적다는 것이다.

구원은 영원한 선택의 문제이고 중생으로 이뤄져서 믿음으로 깨닫는다. 구원의 경험을 교회가 담당해야 한다. 교회의 역할은 문화센터가 아니다. 이것은 준비에 불과한 것이고 궁극적 목적은 교회당으로 오는 자를 중생의 경험을 갖게 하여 지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복을 받고 누리고 믿음의 증거를 갖도록 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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