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태 교수 비롯, 각 지역의 3.1운동과 기독교를 살핀 역사학자들을 통해 미래를 본다

몇몇은 일제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정책’에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자 이승훈 선생은 책상을 치면서 소리쳤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어?’ 하고 호통을 쳤다.

▲ 3.1운동 당시 한국인들이 공원에서 만세를 외치는 모습

3.1운동 당시 한국교회는 지금과 무엇이 달라서 큰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고 사회적 존경을 받았는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데 대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이렇게 피력했다.

“당시의 신앙은 사사화(私事化)되지 않고 공공성(公共性)을 띠고 있었다.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 대한 의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 공공(公共)의 선(善)을 위해서는 타 교파는 물론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했다.”

이미 지난해 11월 3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서울 YMCA는 공동으로 ‘3.1독립운동의 지역적 전개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3.1운동 100주년을 조명한 바 있다.

이날 김승태 소장은 ‘3.1독립운동과 기독교’라는 제목의 기조발제를 통해서 기독교인의 3.1운동 참여 동기,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역할과 수난, 3.1운동에서 선교사의 역할과 한계 등을 상세히 짚었다.
 

▲ 민족대표 33인이 회의하는 모습

●● 3.1운동 만세시위에 총 인구 10% 이상 참여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맨손으로 평화적 만세시위를 벌인 역사적 사건이다.”

3.1운동은 시기적으로 좁게는 그해 5월 말까지, 넓게는 이듬해 3월 말까지, 공간적으로는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살던 만주·중국·일본·미주·하와이·러시아연해주 등 모든 곳을 포함하고 있다고 김 소장은 피력했다. 시위 규모는 달랐지만, 그해 5월 말까지,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하더라도 1,500여회가 넘었고, 참여한 연인원은 202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우리 인구가 1천 800만에서 2천만 명이었으니까 총 인구의 10%이상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우리 민족은 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났다”고 김 소장은 평가했다.

3.1운동의 결과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비로소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꿈꾸고 연습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3.1운동이 3.1혁명(한국혁명)으로도 불리는 이유라고 김 소장은 말하면서 “그러나 3.1혁명에서 추구했던 이념 내지 정신이 아직도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3.1혁명의 이념 내지 3.1정신은 자주독립(自主獨立), 정의인도(正義人道), 평등평화(平等平和)라고 언급하면서 “이것은 하나 된 민족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결코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민족의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평화통일도 3.1정신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이 모든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3.1혁명이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독교인은 이 운동에 신앙적 결단으로 자발적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동자로 나서고 지도력을 제공했으며, 운동 확산의 조직을 제공하고, 통로가 되어 큰 기여를 했고 그렇게 큰 기여를 한 만큼 일제의 탄압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소개했다.
 

●● 기독교인의 3.1운동 참여 동기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은 교회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적인 행위가 아닌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경우가 많았다고 김 소장은 짚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 시대의 역사적 과제 해결에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님을 아는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신앙적인 결단에 의해서 참여했다는 것이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승훈 장로와 신석구 목사의 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919년 2월 서울과 평안도를 왕래하며 3.1운동 거사 준비를 하던 이승훈 장로가 2월 중순경 평양에서 몇몇 목사들을 모아 놓고 거사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자 그 가운데 몇몇은 일제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정책’에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자 이승훈 선생은 책상을 치면서 소리쳤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어?’ 하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그는 일제의 재판정에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각각 자유를 주었는데 우리는 이 존귀한 자유를 남에게 빼앗겼다. 자유를 빼앗긴지 10년 동안 심한 고난과 굴욕이 우리를 죽음의 골짜기로 이끌었다. 일본이 오랜 옛날 한국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원수로 갚되 이렇게 심할 수가 있느냐?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적의 칼에 쓰러질지언정 부자유 불평등 속에서 남에게 이끌리는 짐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이번 일은 제 자유를 지키면서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독립은 한국의 영광일 뿐 아니라 튼튼한 이웃을 옆에 갖는 일본 자신의 행복도 되는 것이다.”
 
신석구 목사는 1918년 11월부터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다가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는데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고 한다.

“오화영 목사가 1919년 2월 12, 13일경에 만나 나보고 말하기를 모처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천도교측과 연합코저 하니 거기 참가하겠느냐 하는데 내 생각에 두 가지 어려운 것은 첫째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둘째 천도교는 교리 상으로 보아 서로 용납키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하여 즉시 대답지 아니하고 좀 생각하여 보겠다고 하였다. 그 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즉각에 곧 뜻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곧 독립이 되리라고는 믿지 아니하였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는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 하여도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신석구 목사는 기도하는 가운데 신앙적 결단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독립'의 씨를 심으려 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는 일제 검사의 “장래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그렇다. 나는 한일합방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할 생각이다”라고 대답했고, 그는 이 일로 5개월간의 독방생활을 포함하여 2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고 김 소장은 전했다.
 

●● 1.5% 기독교인의 참여 극대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1919년 말까지 3.1운동 관계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종교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많아 3,426명으로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총 피검자 19,525명의 17.6%를 차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목사를 포함한 교역자는 244명으로 천도교나 불교의 두 배에 이르며, 특히 여성 피검자의 수는 총471명 중 309명이 기독교인으로 65.5%나 차지한다.

김 소장은 “구한말부터 여성해방과 지도자 양성에 힘써오던 기독교의 영향이 3.1운동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봤다. 당시 총인구의 1.5%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인이 3.1운동과 관련된 피검자의 17.6%를 차지하고 이들 대부분 과격행위자이기보다는 시위주동자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과 피해의 정도를 쉽게 짐작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피해는 교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장로교는 교회가 1,705개소, 신자가 144,062명이었으며, 감리교는 교회가 472개 소, 신자가 35,482명으로 이 두 교파만 합하더라도 교회가 2,177개소, 신자가 179,544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 숫자는 3.1운동의 피해로 인해 전해인 1918년도 말에 비해 교회는 88개소, 신자는 무려 22,409명이나 줄어든 것이었다. 여기에 그동안 교인의 자연증가 추세까지 고려한다면 교회의 피해는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김 소장은 한국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와 현실 또는 역사적 과제 해결에 직접 뛰어들어 기여하였던 것으로, 기독교인의 정치와 현실 참여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평했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을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은 자신들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서나,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것이 아니었고, 그야말로 순수하게 우리 민족의 해방·독립을 바라서 자신을 희생하고 민족의 선두에 서서 일제에 항거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사 후의 그들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를 생각지 않았고, 종파나 계급적 이익을 내세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신앙은 사사화(私事化)되지 않고 공공성(公共性)을 띠고 있었으며,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 대한 의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 공공(公共)의 선(善)을 위해서는 타 교파는 물론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했고, 복음과 정의를 위한 고난과 거기에 동참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종교적 이념을 초월하여 타 교파는 물론 타 종교계까지도 포용하고 협력했던 당시 기독교계 지도자들,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하게 일어섰던 믿음의 선배들, 이들이 가졌던 3.1정신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민족사적 과제인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정신이다.”

김 소장은 이러한 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기독교인의 현실 참여와 역사 참여는 결코 정치적 문제만이 아니라고 봤다. 이것은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신앙의 문제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이웃에 대한 책임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올바른 3.1운동의 인식을 통하여 이 운동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키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의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 등의 역사적 과제 해결과 역사 발전에 앞장서 기여해야 할 것이다.

●● 각 지역의 3.1운동과 기독교

김 소장의 기조발제 이후 각 지역의 3.1운동과 기독교에 대해 발제했는데, 그 부분 또한 눈여겨볼만하다. 서울·경기, 호남(제주)지역에 대해서는 송현강 교수(한남대)가, 충청지역은 황미숙 교수(목원대)가, 영남지역은 이용민 교수(연세대)가 각 지역에서 일어난 기독교인의 3.1운동에 대해 발제했다.

송현강 교수는 “서울-경기의 기독교 3.1운동을 요약하면, 서울은 3.1운동의 발상지로서 기독교인 민족대표들이 활약했던 곳이고, 또 파고다공원과 남대문에서의 시위에 서울 시내 3개 스테이션에서 세운 교회와 학교 구성원들이 적극 연대해서 참여한 결과 그 주도권을 아낌없이 행사하며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였다. 이는 그 후 3.1운동에서 기독교가 대표성을 갖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면서 “수원과 강화처럼 지역교회와 교인들이 3.1운동을 강력하게 주도하는 경우도 물론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기독교인이 주동자로 참여하거나 지역교회가 다른 세력과 연합하는 사례가 더 많이 관찰된다”고 말했다.

또 “호남지방의 3.1운동은 3월 5일 군산에서 시작하여, 해남군 우수영에서 다음해 4월 23일까지 산발적으로 행해졌는데, 교계의 교회·병원·학교 등의 목사·장로·교사·직원들이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이끌며 참여했고, 특히 기독교계 학교들의 교사와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지역에서는 그들이 거사일을 비롯하여, 거사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3.1운동의 의의를 알리고 그들을 동원하는 일을 했으며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만세운동으로 참여자들을 체포해갈 때, 기독교인들은 이를 회피하지 않았고 재판정에서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송 교수는 밝혔다.

황미숙 교수는 “충청지역 기독교인들은 3.1운동 이후 교회에 더욱 헌신하는 모습도 있었으나 민족독립운동을 보다 확고하게 전개하기 위한 변화를 추구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떠나 타종교로 개종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모습 △무정부주의자로의 전환 △애국단체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민족독립운동 펼쳐 나갔다고 밝혔다.

영남지역의 3.1운동에 대해 발제한 이용민 교수는 “3.1운동에 있어서 유독 기독교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일부 지역, 예를 들면, 의성·영덕·구미·함안·창원 등지에서는 특별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적보다는 예전의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교회의 모습, 그리고 기념탑 정도가 다소 과장된 형태로 진열되어 있는 모습인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며 “일부가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이들 지역은 대구 경북지역이나 부산·울산·경남 지역의 선교 스테이션이 아닌 지역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스스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자 하는 기독교 측의 별도의 노력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영남지역의 각 노회 차원에서의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을 제시했다.

이 교수는 “영남지역의 3.1운동과 기독교의 관계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기독교의 역할이 상당히 크게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왜 그런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접근은 부족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영남지역의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특징들을 선교 스테이션이나 노회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살피지 않았던 데에 원인이 있었다고 여겨진다”며 “그러한 점 또한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세한 사정을 확인해야만 풀어낼 수 있는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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