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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유럽을 공격하다 ④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사제 왕 요한_ 69
조효근 / 작가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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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1호] 승인 2019.02.27  13:5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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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의 군은 호라즘 제국을 완전히 격멸시켰다. 징기스칸으로서는 호기심의 세력인 호라즘을 쉽게 격파했다. 그는 드디어 만주 벌판을 중심해 중앙아시아는 물론 서남아시아 중간 허리에 있는 호라즘 세력을 격파했다. 이제는 바그다드와 로마가 남아있다.”

 

징기스칸은 탕구트(서하)를 복속시키고 금제국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함께 살자면서 서로가 신뢰하고 살아갈 수 있는 연합제국의 약속을 받고 금제국의 통치 체제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금의 황제가 수도를 개봉으로 옮기고 배신을 결심했다는 전령의 보고를 받았다. 징기스칸은 군대를 이끌고 금제국의 황태자가 지키고 있는 중도로 향했다. 도시의 서남쪽으로 약 1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군진을 설치했다. 아름다운 주변 풍광을 의지해서 캠프를 설치한 것이다.

사제 왕 요한의 카라 키타이 군도 징기스칸의 군진에서 3킬로미터 간격을 두고 탕구트 지역 쪽에 진을 쳤다. 징기스칸의 5만 군대와는 달리 카라진 1만 명 정예군이었다. 징기스칸을 돕고 싶었다.

정탐을 보냈으나 중도에서는 징기스칸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성의 방어가 허술했다. 징기스칸이 다시 공껴해온다는 소식에 서둘러 도망친 듯했다. 징기스칸은 도시를 완전히 접수하기로 정했다.

도시의 재산을 모두 기록했다. 언제나처럼 점령지 재산은 철저하게 기록하고 부하들에게 분배할 때도 균형을 잃지 않고 고르게 분배했다. 빠지는 사람도 없었다. 왕실의 구성원이나 군의 계급에 따르는 약간의 차등 외에는 고르게 나눴다. 징기스칸은 심지어 초원의 본국 고아, 과부, 노인들까지도 일정한 몫을 보장해 주었다.

금 황제가 개봉으로 도망치면서도 했다는 말이 있다. 징기스칸의 군대는 끽해야 10만여 명이고 그의 백성은 겨우 백만여 명이지만 금제국 군대는 백만 명이고 그를 따르는 백성은 1억 2천만여 명이다. 징기스칸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자의 통 큰 소리다. 그러나 징기스칸은 한편으로 생각할 때 금 황제의 말을 웃어넘길 수 없었다. 징기스칸은 말을 달려 왕 사제 요한 왕의 군진으로 달려갔다.

“왕 사제시여, 나의 형님이시여. 저는 오늘밤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서 형님의 가르침을 받으러 왔소이다.”

징기스칸은 그동안 자기가 정복한 나라들, 다양한 종교와 언어는 물론 풍습을 따로 가진 민족들을 통치하는 일의 한계를 실토했다. 지금까지 정복전을 통해서 복종 맹세를 받는데 만족하고, 이전 통치자들에게 계속 다스리도록 허용했으나 이 정책은 실패했다. 금제국처럼 몽골군이 물러가자마자 배신하는 자들 중에는 한술 더 떠서 말하기를 자기들이 몽골군을 물리쳤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점령지 지배자들을 모조리 처형하기도 해보았으나 이 또한 현명한 대책이 아니었다. 부하 장수들을 현지 행정관으로 임명해 보았으나 이는 정복임무의 빈틈이 생기거나 또는 유능한 장수가 유능한 행정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징기스칸의 푸념어린 고충을 듣고 있던 사제 왕 요한은 일단 정복전 속도를 늦추고 몽골과 점령지 사이의 이질성을 줄이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가면서 초원문화와 농경문화의 절충점을 찾아보자고 했다. 앞으로는 농경문화와 도시문화 즉 상업문화가 발달할 터이니 장기적 대책도 세우자고도 말했다.
“일단 황하 이남의 중국인들과의 사귐을 찾아봅시다.”

사제 왕의 말에 징기스칸은 호라즘을 먼저 치고 싶다고 했다.

“그거 나 또한 10여 년 전부터 그들의 속성을 주목하고 있어요. 단, 그들은 이슬람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통치자에 따라서 다르더군요. 어떤 지도자는 우호적인데 요즘은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가 흔들리니까 호라즘이 바그다드의 압바스를 대신한다고 큰소리치고 저들이 힌두쿠시 남단의 인도는 물론 흑해 북방 러시아까지 넘보고 있지요.”

“바로 그겁니다. 일단은 우리가 호라즘 샤(칸)에게 무역을 하자는 대규모 상단을 한 번 보냈으면 합니다.”

“오호라! 어찌 아우님 대칸은 내생각과 꼭 같으신가요. 내 참….”

“그거야 형제간이니까 그렇죠.”

“테무진! 나는 당신을 열 살 무렵부터 관찰했어요.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갔구먼. 나는 당신의 몽골 초원과 우리 카라 키타이의 중앙아시아가 서로 조화를 이루면 최소한 동로마, 저 콘스탄티노플과 우정을 쌓을 수 있다고 보았지요. 아시겠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제국이고, 더 정확하게는 새 로마, 신로마가 더 정확한 표현이죠.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종교로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가 서쪽 유럽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아시아 대륙과 북방 초원의 땅까지 세계를 그리스도교 나라로 만들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제국의 수도를 옮겼어요.”

“그래요? 왕칸이신 나의 스승이시여. 좋습니다. 이제 생각이 잡혔어요. 떠올랐어요. 우리 좀 더 구체적으로 역할분담을 합시다. 이놈은 본디 피 뭍은 옷을 입고 사는 놈이니 정복전의 선두에 나서고 형님은 정복지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행정가를 많이 양성하시오. 형님의 부족인 거란제국의 영특한 인물들을 많이 양성하는 대학을 만들어서 행정지도자와 기독교 지도자로 양성하면 됩니다.”

“그렇소. 내 생각도 같아요. 우선 호라즘 샤(SHAH, King)에게 무역을 요청하는 상단을 꾸려서 보냅시다.”

“그럽시다. 상품은 무엇으로 정하죠?”

“그거야 초원의 상품은 모피나 그 밖의 좋은 상품이 많죠. 스키타이 시대부터 초원의 부족들은 농경민족들과 무역을 해왔으니 동서세계의 상품들이 있죠. 카라코룸 몽골 제국 본부의 아끼는 귀중품도 일부 필요합니다. 호라즘의 무함마드 샤는 바그다드는 물론 유럽의 귀중품도 많이 가지고 있겠으나 우리도 상대할 만한 실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이 두 사람의 결의와 합의는 징기스칸이 유럽 문턱까지 진군하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연결된다.

호라즘 왕조는 1077년 셀주크계 투르크계 노예(맘루크) 출신 아누슈 테긴이 호라즘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점차 독자적인 왕조로 발전했다. 이 왕조는 12세기 전반 이후 카라키타이의 지배권 아래에 복속되기도 했다. 현재는 카라 키타이 사제 왕 요한의 제국과 점령군으로 등장한 징기스칸이 노리는 제국이다. 호라즘이 지배력을 넓혀가는 중일 때 징기스칸과 사제 왕 요한의 유럽 진출 길목을 그들이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징기스칸은 사절단을 보냈다. 너무 많은 상인들이 갈 경우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어서 백오십 명 정도로 꾸렸다. 상단 일행은 호라즘의 동부 국경도시인 오토라르에 도착했다. 시르다리아 물줄기가 흐르는 작은 도시였다. 징기스칸의 상단을 막아서는 사람은 수비대장 이날추크였다.

“멈춰라! 뭐하는 자들이냐?”

수비군의 차디찬 한마디에 상인들은 깜짝 놀랐다.

“저희는 이동 상인들인데 몽골에서 왔소이다. 호라즘 제국과 무역의 길을 트고 싶어서입니다.”

“뭐! 몽골? 이놈들, 정탐꾼들이구나. 모두 꼼짝 마라.”

졸지에 당했다.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고 모조리 죽임 당했다. 가지고 간 상품들도 모두 압수됐다.

졸지에 당한 일이다. 뒤늦게 징기스칸이 이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당장 쿠릴타이(국가 대회의)를 열었다. 자초지종을 더 이상 알아볼 필요 없었다. 오트라르는 서양과 중앙아시아와의 무역 중심통로였다. 동서 문물이 오가는 도시로 군사적 이해관계가 크지 않은 도시이기에 정탐시비로 희생자가 났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혹시 몽골의 징기스칸 세력이 더 크기 전에 기세를 꺾어버리기 위한 호라즘 샤 무함마드의 전략일까? 당시의 소문들 중에는 호라즘 세력이 정통 이슬람이 아니라 하여 이슬람 상인들이 징기스칸을 불러들여 호라즘 세력을 꺾어버리려는 술수였다는 내용도 있었다.

징기스칸은 안타까웠다. 서양 세력을 향해 진군할 때 호라즘이 연맹군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생각이 산산조각 났다. 쿠릴타이는 15만 명의 대군을 직접 징기스칸이 이끌고 호라즘 총력전에 나서기로 결론 났다.

15만 대군을 이끌고 나타난 징기스칸의 기마군이 단숨에 오트라르 뿌리를 흔들었다. 1219년 겨울, 오트라르에 도착한 몽골군은 4개 전투형 군세를 만들었다. 맏아들 주치를 대장으로 한 부대는 시르다리아 하류 잔드(현, 페로프스크)로 향했고, 좌군은 상류 오젠트로 향했다. 오트라르는 둘째 아들 차가타이와 셋째 아들 우구데이에게 맡기고, 징기스칸 자신은 막내아들 툴루이와 함께 부하라 쪽 방향을 잡았다.

몽골군을 맞아서 싸우는 호라즘 군은 40만여 명이었다. 호라즘의 무함마드 역시 군사를 벌판으로 집결하지 않고 각 도시별로 분산시켰다. 그러나 핵심은 공성전을 통해서 몽골군을 지치게 하려는 계산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또 무함마드는 40만 대군이지만 충성도를 다 확인할 수 없는 부하들의 사정도 감안한 계획된 전략이었다. 그는 아랄해 방면의 캉글리족의 충성도를 자신하지 못했다. 또한 무함마드와 투르칸 카툰 세력이 서로 적대하던 때라 병력 집중에 자신이 없기도 했었다.

호라즘 샤는 징기스칸의 공격을 얼마나 견딜까? 징기스칸은 수부타이 장군과 제배 장군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주어 무함마드 샤를 추적하게 했다. 무함마드 샤는 쫓기기 시작했다. 1220년 겨울 마함마드 샤는 카스피 해의 작은 섬에서 죽었다. 추격자들은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흑해 북방 칼카 강변에서 루시(러시아) 연합군과 만나 이들을 격파했다. 전투는 1223년에도 계속되었다 몽골군이 동유럽 기독교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유럽은 충격 속에 빠졌다.

징기스칸의 중앙군은 무함마드 후계자인 잘랄 웃딘을 추격해 아무다리아 건너 아프가니스탄까지 갔다.

징기스칸의 군은 호라즘 제국을 완전히 격멸시켰다. 징기스칸으로서는 호기심의 세력인 호라즘을 쉽게 격파했다. 그는 드디어 만주 벌판을 중심해 중앙아시아는 물론 서남아시아 중간 허리에 있는 호라즘 세력을 격파했다. 이제는 바그다드와 로마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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