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이 아니라 극복이 가능하다. 분단 70년이 너무 길었다. 그 세월이 아깝기도 하다. 겨우 이 정도 압박에 그리스도인이 당황해야 하는가. 민족의 속성이기도 할 것이다. 한반도인은 남북 가릴 것 없이 끈질긴 속성이 있다.

임진·병자 때부터 위기는 찾아왔으나 그 뒤 극복의 기회도 한두 번 있었다. 그러나 기회를 선용하지 못해 경술년 그 해 우리는 나라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1919년 3.1만세 때, 그러나 한두 해 지나고 나니까 민족의 독립은 자유민주와 사회주의의 두 경향으로 나뉘어졌다. 험난한 앞날이 예고되었으나 그때 우리는 남북의 세력 갈등이 이토록 깊을 줄 몰랐다.

그리고, 남북은 분단의 상처를 안고 오랜 세월 동안 주어진 시간들을 허송하기도 했었다. 6.25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남북 간 분단의 속성이 잠재해 있어서일까.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이토록 위태로운 시간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지금쯤 인류는 1,2차 세계대전은 물론 종교나 이데올로기들 간의 투쟁과 분쟁을 마무리해가는 때인데 광장 투쟁으로 날을 지새는 대한민국 현실 자체가 부끄럽다.

왜 우리는 좀 더 진지한 대화가 어려울까? 정부 관계자나 또는 대통령일지라도 좀 더 심혈을 기울여 남남 안에서의 대화가 가능할 터인데 그 방법이 없다. 기껏해야 청와대 청원이나 광장에 뛰어나가서 고래고래 고함지르고, 편향적인 자료나 제시하면서 울림이 부족한 일방통행들만 얽히고설킬 뿐이다.
분단 70여 년 아픈 역사를 남의 손에 맡겨두고 운수 감정사들의 점괘에 의존하는가. 휴전 당사자가 아니어서인가? 대한민국인의 고유한 대표성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대한제국의 주권을 도둑맞았다고 했던 1910년 비극이 있었다. 우리는 5천만 명의 자주 자유의 대표성이 있는 자유인들인데 침묵이 강요되는 현실이 고통스럽다.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몫을 감당했던 그분의 처지가 더 홀가분하지 않을까 하는 아픈 마음, 그리스도인의 책임감이 무겁고 무섭기만 하다. 죽으면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너무너무 두렵다. 이 고비가 큰 탈 없이 지나갔으며, 다시 한 번 힘껏 싸울 수 있는 기회만은 박탈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더 잘해보고 싶다. 그 많은 시간들을 허송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날들이 두렵다.

그러나 지금, 나는 누구를 탓하고 싶지 않다. 또 탓하고 떠넘길 수도 없다.

이제 내게는 어느 만큼의 시간이 남았을까?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 하신 말씀을 따라서 숨 쉬는 그 시간이 기도시간만으로도 넉넉하지 않다. 다시 한 번 고쳐서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주께로부터 용서를 받으며 은총의 남은 날 동안 더욱 온전한 처신을 찾아보면서 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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