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3:12-4:2

▲ 김 기 석 목사
청파교회 담임

+ 변모주일      재의 수요일을 앞둔 주일인  ‘변모주일’은 수난의 시간을 앞두신 예수님이 제자 셋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영광과 수난은 모순된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날 제자들은 잘 안다고 여기던 스승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늘 병자들, 귀신들린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곁에 머무시던 주님의 모습에 익숙했던 제자들은 빛에 감싸인 채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은 미구에 벌어질 우주적 파국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하늘에서 벌어지는 천상 예배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분과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을 보았습니다. 그 주위에 있던 금 면류관을 쓴 장로 스물네 명과 앞뒤에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명, 그리고 천군 천사들은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에게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놀라운 비전을 공유한 이들은 이후에 닥쳐올 시련의 시간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비전의 사람들에게도 시련은 쓰리지만 그것이 곧 절망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변모 사건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빛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하늘 예배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 5:16)고 명하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둠의 옷을 먼저 벗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롬 13:12,  엡 5:8).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우리도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서술인 동시에 명령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라고 말합니다. 수신인은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이웃’은 물론이고 ‘피조물’도 포함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피를 잉크 삼아 영으로 쓰신 편지가 바로 우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편지에 적힌 내용은 구원 이야기 혹은 변화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자식이 빛의 자녀로 바뀐 이야기, 이기적이던 사람이 이타적으로 변한 이야기, 절망의 심연에 갇힌 채 우울하게 살던 사람이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변한 이야기, 적개심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대하던 이들이 이웃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사람으로 변한 이야기 말입니다. 교회사는 온통 그런 이야기들의 향연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을 변화시키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속상해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변화되려 하지 않습니다. 굳어짐의 표징입니다.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 대담한 처신  바울 사도는 이런 소망을 품고 사는 이들의 당당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대담하게 처신합니다’(고후 3:12).  믿음의 사람들은 괜히 남의 눈치나 보며 지레 주눅이 들거나, 어정쩡하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갑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대담한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롬 1:16, 8:31). 이 당당함을 담대한 희망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3장 12절에 나오는 ‘대담하게 처신한다’는 구절은 4장 1절의 ‘낙심하지 않습니다’라는 구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당당함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요? 4장 2절이 그 대답입니다.
 

+ 너울 벗 실상을 보라        바울 사도는 이런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모세의 너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과 만난 후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은 빛났습니다. 하지만 그 빛은 지속성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모세가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얼굴에 너울을 썼다고 말합니다. 너울은 우리로 하여금 실상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너울이 벗겨질까요?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3:16).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할 때  그 너울이 벗겨진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분단의 질곡 속에 있는 이 나라가 참 가엾습니다. 하나님의 각별하신 도움과 보호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롭게 열린 3월,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생명의 씨, 평화의 씨를 뿌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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