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아시아(AD 610~1625) 사제 왕 요한_ 70

“수부타이와 제베는 그루지아를 얻은 후 해변을 따라서 유럽 평원을 견학(탐색)했다. 몽골군의 전법이다. 정탐이었다. 정찰과 정보수집에 빈틈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숫자, 도시들의 위치, 정치적 상황, 즉 정치가 안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불안정한가까지 정밀하게 들여다보았다.”

 

▲ 타지키스탄, 크리스천들의 흔적을 찾는 여행자들.


사제 왕 요한과 징기스칸은 무함마드 호레즘 샤의 별궁 니샤푸르로 갔다. 막내아들 툴루이는 부친과 큰아버지로 호칭하는 사제 왕 요한이 니샤프르로 가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공부를 할 참이다. 징기스칸 입장에서는 큰아들 주치가 이끄는 군대나 둘째와 셋째인 치가다이와 우구데의 전투 경험을 신뢰하고 지도력 또한 인정하게 되자, 아, 내 시대는 저무는가 하는 직감이 있었다.

둘은 늦게까지 전쟁터 현황과 신앙양심의 문제로 토론했다. 징기스칸은 예수 이야기에 해박할 뿐 아니라 사제 왕의 늠름한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아홉 살 때 경쟁하던 부족들에게 독살당한 그의 부친 예수게이가 갑자기 떠올랐다. 자기가 예수를 좋아하는 것이나 자기 집안 여인들이나 부하들에게 기독교를 무한 허용하는 그 자신의 행위가 신앙보다는 예수님 이름과 그의 부친의 “예수게이” 이름이 유사해서일까를 생각해보았다.

“형님! 마유를 한 잔 올리고 싶소이다만…?”

징기스칸이 조심스럽게 요한의 의중을 타진한다. 사제 왕 요한이 빙그시 웃는다.

“아직 수부타이와 제베의 유럽 공격군 보고가 없는데….”

“형님, 저는 수부타이와 제베는 믿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생각보다 더 큰 전과를 올릴 것입니다.”

“물론 나도 믿고 있소.”

“저는 이 밤에 왕 사제 형님의 또 다른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어허, 천하의 징기스칸이 어찌 근심스런 목소리로 내게까지 걱정을 옮기려 하시오.”

“그렇군요. 이건 제가 그동안 많이 생각했던 일입니다. 저는 앞으로 정복전쟁 따위는 자식들과 부하들에게 넘기고 싶소.”

“아! 그럼 후계자 문제…?”

“그렇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형님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기로 하고 우리들의 제국은 후사들에게 넘길 준비를 하고 싶어요.”

“그럼 대칸의 자리는 주치나 툴루이가 되겠군요. 정착문명은 맏아들이고 초원문명은 막내인데 우리들의 제국은 이제는 초원과 정착지대를 다 포함하고 있으니 선택의 폭은 간단합니다.”

“둘 다 아닌 듯합니다.”

“왭니까?”

“사실 큰아들 주치는 용맹으로 보나 그 심성 또한 나무랄 데가 없어요. 그러나 그 애는….”

“아, 주치의 출생문제를 말하는군요.”

부족들 간의 투쟁을 할 때 테무진은 그가 사랑하는 아내 보르테를 메르키트 부족에게 빼앗겼다. 메르키트족의 급습으로 급하게 도주해야 하는데 타고 갈 말을 부하들에게 양보한 테무진(징기스칸)의 아내 보르테가 납치돼버렸다. 메르키트 족장은 보르테를 부하의 첩으로 주어버렸다. 뒤늦게 보르테를 찾았으나 그의 아내는 메르키트족의 아이를 임신해 있었다. 그때 얻은 아들이 주치다. 주치는 큰아들이기는 해도 징기스칸의 황금가문을 승계하기가 어려웠다.

“내 가족 어느 누구도 주치를 상속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럼 툴루이는요?”

“녀석은 나를 많이 닮았고 참 영특한데, 성격이 너무 예리하고 잔인성이 있어요. 우리들의 다민족 제국 통치자로는 최선이 아닙니다.”

“그럼 둘째 차가다이와 셋째 우구데이 중에서 찾는 수밖에 없군요.”

“차가다이는 정직하고 너그러움이 있으나 너무 고지식해요. 큰 그릇이 못 되는 것 같아요.”

“그럼 낙점이 됐소이다.”

“형님, 웃지 마세요. 우구데이는 배포도 크고 좋은데 그 녀석은 술이 너무 지나쳐요. 술 때문에 대사를 그르칠 수도 있죠.”

“헉! 그럼?”

사제 왕 요한과 징기스칸은 몽골제국 후계자 선정을 못한 채 밤을 새웠다.

다음날 수부타이와 제베의 전쟁터 소식이 와 있었다. 현제 그들 둘은 군사 2만 명을 유지하면서 두세 군데 지역 점령국에서 3만 명을 추가해 5만 군사를 이끌고 그루지아(현 죠지아) 인근에서 정탐 중이었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호라즘 샤(술탄)가 카스피해 주변의 조그마한 섬에 운신해 있다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전진했다. 북쪽 지역의 세계를 향한 정탐이랄까. 징기스칸의 허락을 받은 수부타이는 제베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수부타이는 징기스칸의 위대한 장군으로 성장해 갈 인물이다. 징기스칸의 세계제국 역사 기록에 으뜸가는 장군으로 세계 전쟁사는 기록했다. 그의 전술의 탁월함은 한니발과 로마의 스키피오에 버금갔으며, 책략가로는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자르와 어깨를 나란히했다.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은 수부타이가 7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2개 민족을 점령했으며 65회의 대 격전에서 승리했다. 그는 징기스칸의 게르(막사)를 지키는 군병에서 출발했으나 징기스칸의 가장 믿음직스럽고 훌륭한 장수였다. 수부타이는 징기스칸 이후 고려, 금(여진) 제국, 페르시아, 러시아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징기스칸이 죽지 않고 살아서 그와 함께했다면 서유럽 심장부 점령까지 마무리할 만한 큰 인물이었다.

1223년 그루지아는 조지 3세가 통치하는 기독교 왕국이었다. 흑해변에 인접한 나라로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흑해 남쪽으로 아나톨리아를 끼고 동로마 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까지 갈 수 있다.
수부타이는 제베에게 그루지아의 방어 수준을 타진토록 했다. 제베 역시 수부타이에게 지고 싶지 않은 징기스칸의 신뢰를 받는 장군이다. 그의 이름 제베는 화살의 속도에서 나온 말로 그는 아주 민첩한 몸놀림의 장군이었다. 몸이 빠르고 머리 회전 또한 빠르다는 뜻이 제베였다.

그루지아는 그들 주변 셀주크 이슬람 부족들과 수백 년 싸워오는 강국이었다. 매우 숙련되고 전문적인 조직과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그루지아 군대에게 미끼를 던졌다. 소규모 군을 그루지아 군영에 진입시킨 것이다. 과감하게 적군 깊숙이 들어간 제베의 군사들은 화살과 총을 쏘았다. 그루지아군이 공격해오면 제베의 몽골군은 겁에 질린 척 삼십육계였다. 이른바 몽골군 전문인 “개싸움”이었다.

자신감에 넘친 그루지아 정예군은 몽골군을 추격했다. 대오가 흐트러지는 줄도 모르고 뒤쫓았다. 몽골군은 추격을 견디기 어려워서 기진맥진한 것처럼 연출까지 해가면서 잡힐 듯 말 듯한 간격으로 도망질이었다. 그루지아군은 군장비까지 싣고 달리다보니 군사들뿐 아니라 말들까지 지쳤다. 지친 기마병들이 뒤로 쳐지고 좌우로 흐트러지기도 했다. 제베와 수부타이가 지휘하는 몽골군은 이때다 하는 사인과 함께 잠복군들이 등장했다. 예비마를 바꿔 탄 쫓기던 몽골군까지 합세해 달리는 말에서 화살을 날렸다. 말을 거꾸로 몰면서 또는 말의 배 밑으로까지 몸을 피해 방어하면서 화살을 퍼부었다. 가까이 오는 그루지아 군은 명중, 뒤에 따르는 군을 향해서도 멀리 화살을 날렸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전투는 끝났다. 수부타이는 그루지아 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기록상으로 몽골군의 유럽 최초 점령국이었다. 그루지아는 몽골이 기독교 국가임을 확인한 후 동유럽 지역의 충성스러운 몽골제국의 우군이 되었다. 그루지아 군 조직은 수부타이 군사령부 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세계제국을 꿈꾸는 몽골군은 함께 멍에를 매기로 한 피점령국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 진실 게임이라고 해야 하나. 이는 징기스칸의 처세요 몽골제국의 법칙이었다.

수부타이와 제베는 그루지아를 얻은 후 해변을 따라서 유럽 평원을 견학(탐색)했다. 몽골군의 전법이다. 정탐이었다. 정찰과 정보수집에 빈틈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숫자, 도시들의 위치, 정치적 상황, 즉 정치가 안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불안정한가까지 정밀하게 들여다보았다.

수부타이는 제베와 함께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드넓은 평원을 발견했다. 킵착 평원이었다. 제2의 몽골 초원을 닮았다. 그들에게 익숙한 초원이 무한대로 열려 있었다. 그들 몽골의 언어와 비슷한 언어의 사용이었다. 수부타이의 몽골보다 천년 훨씬 전 스키타이 문명의 중심지가 바로 킵착 초원임을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을 수 있다.

수부타이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북서쪽으로 자리 잡은 농경지였다. 농경지 주변으로 크고 작은 도시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여기가 동로마교회 또는 동방정교로 불리는 로마 가톨릭과 쌍벽을 이루는 정통파 기독교 국가들임을 그들은 뒤늦게 알았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아직 통일제국이 아님을 수부타이는 알아차렸다. 좀 더 정밀한 탐색이 필요했다. 군대를 투입했다.

스몰렌스크, 갈리치, 체르니코프, 키예프, 볼리니아 등 킵착크 지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정밀탐색이 쉽지 않았다. 가장 영향력이 큰 영주국은 키예프였다.

수부타이는 일단 정중한 예를 갖춰 사절단을 보냈다. 10명으로 구성했다. 통상 제의였다. 키예프 정부는 몽골 사절단을 무시했다. 그들을 즉각 처형해버렸다.

수부타이는 “개싸움 전략”을 다시 시작했다. 몽골의 작은 요구를 거절했으니 큰 대가를 지불할 준비를 하라고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키예프군의 추격을 피해 지긋지긋할 만큼 잡힐 듯 말 듯한 속도로 몽골군은 앞서 달렸다. 러시아군은 키예프가 주력군을 형성하고 주변의 영주들로 군사를 동원했는지 군기가 무질서했다. 추격을 중단하고 되돌아가는 군사들도 있었다.

두 주간 동안 긴 줄다리기였다. 큰 고기떼라고 수부타이는 계산했다. 키예프 연합군은 아조프 해로 흘러들어가는 칼가 강 주변에서 몽골군을 따라잡았다. 몽골군의 선택이었다. 이곳은 수부타이가 가장 적절한 전투지역으로 이미 점찍어둔 곳이었다.

러시아 연합군은 잠시 주춤거렸다. 몽골군이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우려였을까. 주춤거리는 것이 아니라 서두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함정으로 유인되어 왔다는 것을 모르는 수준이었다. 키예프 등 연합군은 부하들에게 숨고를 여유도 주지 않고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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