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바닥에서 발견한 참된 행복 그리는 화가 용이림

연속된 부도,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태양을 바라볼 힘도 없던
나에게 빛을 비추신 하나님

고난은
이기는 것 아니라 견디는 것,
하나님의 이름 부르며
그림 그릴 수 있음에 감사

▲ 용이림 화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로비, 복도 하얀 벽면을 이용해 갤러리로 꾸민 ‘갤러리 치유’에 걸린 작품 앞에 걸음이 멈춰졌다. 어둠을 배경으로 한 한 그루의 나무, 나무 몸체 위는 동그랗게 보호막처럼 빨간색으로 채워져 있고, 그 안에 분홍, 보라, 노랑의 활짝 핀 꽃들, 새들도 여럿 깃들어 있다. 오랜 고난 속에서 비로소 ‘행복’을 만난 작가의 내면이 담긴 것일까. 그림에선 어둠도 밝음도 모두 강렬하다.

화가의 행복은 다름 아닌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카드빚에 허덕이고 공과금 독촉장에 시달리며 ‘겨우 먹고 사는 은혜’ 속에 있지만 그 무엇도 전업 작가로 사는 기쁨을 위협할 수 없다고 했다. 가난한 화가에게 쏟아지는 ‘배부른 직업’이라는 멸시와 조소일지라도….

용이림 화가(60, 꿈의교회 집사)의 ‘행복한 나무’ 작품전이 3월 15일까지 이어진다.
 

▲ 용이림 화가의 ‘행복한 나무’ 그림.
그의 그림 제목은 모두 ‘행복한 나무’다.

# 시지포스의 돌, 엎어지고 자빠지는 인생

‘…폭풍우가 휩쓸고 간 마른 나무에 카이로스의 봄이 오고, 나는 다시 행복한 나무를 꿈꾼다.’

작가노트가 눈길을 끈다. 그리스신화의 시지포스처럼 끝없이 돌을 굴려서 산꼭대기에 올려봤자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출구 없는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삶. 하지만 절망과 고통의 순간마다 자신을 일어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라고 고백했다.

그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까지 떨어졌다고 느낀 시절이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전하던 삶을 내려놓고 전업 작가로 전향한 지 7년, 그때도 그랬다.

“남편이 병으로 죽고 더 이상 살아갈 힘도 용기도 없었어요. 그래도 세 자녀를 위해 의무감에 살아야만 했어요.”

부유한 가정에 7남매 중 유일하게 딸로 태어나 온갖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미대 회화과에 입학해 화가의 길을 꿈꿨지만 21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빠가 이어 받은 사업은 부도를 맞았다. 결혼하고서도 남편 사업이 두 번이나 부도 맞아 지하 셋방살이를 전전해야 했다. 미술학원을 차려 생활비를 벌면서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에만 전념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병을 얻어 먼저 세상을 등진 남편, 장례식장에서 돌아와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썰물 빠져나가듯 모조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왜 나에게만 인생의 낭떠러지가 반복되는가?’ 절망과 의심 속에 습관적으로 펼쳐든 성경, 욥기 3장이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욥 3:1).
“욥은 극한의 고난 앞에서도 믿음을 지킨 대단한 사람으로만 알았는데, 펼쳐든 성경에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욥의 오감이 다 들어있었어요. 하나님이 ‘이게 너의 심정이지?’ 하고 위로하시는 것 같았어요.”

남편의 죽음 후 찾아온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삶은 망가져갔다. 또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늘 불안하고 초조한 연속이었다. 공공근로를 신청해 청소부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사람들의 멸시와 조소였다. 하나님 믿는다면서 왜 저렇게 사느냐는 비난은 삶을 더욱 힘들게 했다. 세상이 싫고 태양을 마주볼 자신도 없었다. 숲속의 공원을 가도 태양을 등진 삐쩍 마른 그림자만 보였다. 그때는 ‘그림자’를 주제로 어두운 그림만 그렸다.
 

# 광야길,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

 

절망이 행복으로 바뀐 것은 전업 작가의 길을 가면서부터다. 빗자루를 들 수 없을 정도로 허리 디스크가 심해져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엄마에게 딸이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딸은 학교 졸업하고 취업하자마자 “돈은 내가 벌 테니 엄마는 그림 그리세요” 하며 더 늦기 전에 작품세계를 펼쳐가도록 지지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상황이 그리 나아진 것은 아니다. 전업 작가로서의 행복을 지켜가기란 그야말로 발버둥이다. 예술에 대한 인식과 대접이 녹록치 않은 한국 땅에서 화가뿐 아니라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현실. 용이림 화가는 전업 작가의 삶이란 ‘매일의 만나’를 기다리는 광야 같은 길이라고 했다. 꽉 막힌 상황을 만날 때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도 여전하다. 오죽하면 ‘따귀 맞은 여자’ 주제로 그림을 그렸을까. 여기서 때리는 쪽은 ‘하나님’이고 맞은쪽은 자신이라는 것.

12회의 개인전과 50여 회의 그룹전, 인도 첸나이 체임버 비엔날레, 싱가폴 호텔아트 페어, 2015 광주 국제 아트페어에 참여하는 등 화단에서 중견에 속하지만 전업 작가의 삶은 가시밭길이다.

미대에서 같이 그림을 공부했던 친구들까지도 ‘그림 그려서 밥이나 먹고 사냐?’며 걱정 섞인 핀잔의 말을 하고, 가난뱅이 작가에게 꽂히는 멸시와 조소를 느낄 때면 대차게 받아치지만 돌아서면 상처다. 그의 마음엔 어느덧 굳은살이 박였다. 그래도 찌르면 아프다.

하지만 예전처럼 절망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힘이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행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때리시면 “아 그만 좀 때리세요!” 하고 받아치면서 주거니 받거니, 그런 게 신앙생활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맞으면 대들고, 안 주면 떼쓰고, 깨달음 주시면 잘못했다고 용서 구하고, 주신 은혜에 감사를 고백하고…. 워낙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라 ‘나잇값 좀 하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앞뒤가 동일한 건 그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도리어 어떻게 슬픈데 기쁜척, 아픈데 아닌척, 믿어지지 않는데 믿는척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고 말한다.

전업 작가의 삶, 힘겹지만 하루하루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여정이기에 ‘은혜’를 경험하는 행복한 삶이라고 고백한다. 매일 아침 ‘할렐루야!’를 외치며 눈 뜨면 얼른 작업실로 달려가 붓을 잡는다.전업 작가로 전환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많이 회복됐다. 하나님은 고비의 순간마다 예상치 못한 도움의 손길들을 만나게 하셨다.

“당장 내일 카드값 60만원이 없으면 신용불량자가 될 상황인데 전혀 일면식도 없는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작가님 작품 좋다’면서 안부를 물어요. 이야기 주고받는 중에 자연스럽게 어려운 상황을 말하니 그 즉시 꼭 필요한 금액을 보내주었어요.”

어려울 때면 그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고, 그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딱 필요한 그만큼만, 용이림 작가는 “치사하다”고 툴툴, 그러면서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먹이며 교만을 꺾으신 것처럼 “고난은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훈련이기에 은혜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교만한 나를 버려두지 않고 고난과 환란으로 다듬어 가시는 것이 가장 큰 은혜라고.

작품세계를 물으니 “나이 먹을수록, 그릴수록 점점 단순해진다”고 했다. 초기에는 그림에 작가의 사상과 대단한 무언가를 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컸지만 이제는 보는 이들의 관점에 작품 해석을 맡긴다. 다만 자신처럼 고난의 한복판에서 힘겨워하는 이들이 그림을 통해 행복을 느끼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병원 전시는 더욱 소중하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 그는 무수한 고난 속에서 이기는 비결을 발견했을까?

“고난은 이기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예요.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 야곱이 돌베개 베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그 밤을 견딘 것처럼, 견디다보면 어느새 새벽이 오고 아침 태양이 밝게 떠오를 것입니다.”

용이림 작가의 ‘행복한 나무’ 가지는 그렇게 튼튼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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