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탐구(탐색) _2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 이 말이 얼마나 당돌하고 무모한 표현인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뒤를 이어서,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제한을 해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말씀이라는 용어가 헬라어 단어 로고스()로 표기되면서 요한복음은 일차적으로 함정에 빠진다. 헬라어 어법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함정이라고까지 표현해보는데 로고스가 도대체 무엇인데 요한복음이 헬레니즘 아류가 되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요한복음은 한글로만 읽어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공관복음과는 그 골격이 다르다. 공관복음은 예수님 생애를 평면적으로 진술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입체적, 또는 수직적, 또 달리는 동양사상 하는 이들에게 익숙한 사유법인 ‘직관’이라는 이름의 상상력으로 관조할 수 있다.

또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주인공이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 또 예수만큼 예수를 바로 아는 자들은 누가 주인공으로 등장해도 메시아 예수의 계시성에 상처를 주지 않는다.

또 있다. 공관복음은 주로 헬라적 문화양식 냄새가 많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히브리적 또는 골통 유대인 냄새도 난다. 요한복음은 그래서 철저한 고대 족장시대의 히브리 사상까지도 손상을 입히지 않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 사상을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바벨론 포로기 이전의 히브리 사상, 곧 족장시대의 히브리가 있고, 70인경(SEPTUAGINTA)식 히브리로 바울과 같은 유대인 양식도 있다.

요한복음의 말씀, 곧 헬라어 로고스는 헬라어의 범위와 한계 안에 있을 뿐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로고스를 함석헌 선생이나 그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 같은 이는 “말을 씀”이 말씀 곧 로고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말은 추상이고 씀은 현상, 말은 관념 씀은 실상, 말은 그것 그대로 말이나 생각이고 씀은 열매라는 뜻으로 “말씀”(요 1:1)을 엄중하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일단, 헬라어 표현 로고스를 노자 도덕경 형식으로 풀어볼까? 헬라어 로고스는 노자 사상의 도(道)와 같은 의미다. 노자 같은 이는 도를 함부로 지껄이는 자들을 경멸했다. 道를 道라고 하는 순간 道의 참 모습은 아니라고 결벽증을 보이고 있다. 도가 무엇인지, 말씀이, 또 로고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나친 결벽이나 경외심을 품을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는 어떤가? 문명 언어들 중 히브리어 문법만큼 엉성한 문법이 없다. 아람어 아랍어가 히브리어 족보와 사촌 이내인데도 아람·아랍어 문법은 히브리보다 더 튼실하다. 히브리인들은 일찍이 “언어의 한계”를 알았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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