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 되면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진달래꽃. ‘사랑의 기쁨’이라는 꽃말을 가진 진달래는 한국인들에게 단연 사랑받는 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어지간한 사람치고 김소월의 시 한 소절 외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냘픈 연분홍빛 꽃잎의 자태는 모진 세월을 견뎌온 우리 민족의 정서에도 부합한다.
지금껏 내가 본 진달래꽃 중에서 제일 감동적이었던 건 경남 창원에 있는 무학산 진달래였다. 무학산은 학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모습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원곡 입구에서 학봉까지 오른 뒤 정상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다 보면 언덕 아래 가운데가 십자 모양으로 갈라진 바위가 나타난다. 주기철 목사가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할 때 자주 올라 기도하던 곳이다. 그는 사시사철 이 십자바위에 무릎 꿇고 백척간두에 선 조국과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주변에는 황홀해서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진달래 군락이 형성되어 있다. 밑동이나 가지가 여느 진달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데다 꽃잎 또한 새빨간 핏빛에 가까웠다.
주기철 목사는 항일투사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당대 가장 뛰어난 설교자이기도 했다. 그는 목회의 중심을 기도와 설교에 두었다. 그의 목회는 ‘7분 설교, 2분 심방, 1분 사무’로 요약할 수 있었다. 10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7분 동안은 설교를 준비하고, 2분은 심방에 힘쓰며, 나머지 1분을 교회 사무를 보는 데 사용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주일이 지나면 곧바로 다음 주일 설교를 준비하기 때문에 토요일쯤 되면 얼굴이 병을 앓고 난 사람처럼 핼쑥했다고 한다. 틈나는 대로 무학산에 올라 십자바위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면 설교를 준비하곤 했다. 몇 년 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막내아들 주광조 장로는 이런 증언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부임하는 곳마다 기도처를 정해놓으셨다. 새벽기도회가 끝난 후 홀로 정해놓은 기도자리를 찾아가셨다. 초량교회 시절에는 구덕산에 오르셨고, 문창교회 시절에는 무학산 십자바위에 올라 이슬을 맞아가며 교회 문제와 나라의 장래를 위해 울면서 부르짖었다.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다음에는 다가오는 신사참배로 인한 고난을 예감하고 묘향산에 가서 사흘간 금식하며 철야기도를 했다. 순교를 각오하고 결심한 것은 이 산 기도를 마친 후였다.”
1944년 봄,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주기철 목사는 병감으로 옮겨졌다. 오정모 집사는 즉시 면회를 신청해 주기철 목사를 만났다. 주기철 목사는 간수의 등에 업힌 채 면회실로 들어섰다. 형무소장이 그에게 병보석으로 입원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당신은 꼭,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소. 내 살아서 이 붉은 벽돌문 밖을 나갈 것을 기대하지 않소.”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집사는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정에 끌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바로 그날,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경 주기철 목사는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고요한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48세였다.
일본 경찰의 강력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조만식 장로 등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주기철 목사의 장례식을 강행했다. 모두 구속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음에도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4월 25일 오전 평양제2고등보통학교 교문 앞 공터에서 500여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진 뒤 그의 시신은 평양 북쪽에 있는 돌박산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산 곳곳에는 그가 흘리고 간 순교의 피를 상징하듯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올봄에도 어김없이 한반도 전역에 진달래꽃이 피어났다. 한국 교회가 그 빛과 향기를 잃어 갈수록 더욱 그립고 생각나는 사람. 그 잔영이나마 떠올리기 위해 봄만 되면 나는 산을 오른다. 평양 돌박산은 갈 수가 없으니 이번에도 하염없이 창원 무학산을 오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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