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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따름의 선제조건 ‘자기 부인’, 얼마나 이뤄가고 있나?[부활절 특집 1]죽음 이후 찾아오는 부활…세상의 거대한 흐름 돌이킬 ‘자기 부인’, 교회가 그 소망의 길 보여줘야
정찬양 기자  |  dsr12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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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호] 승인 2019.04.10  14: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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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보여주신 ‘자기 부인’, 그 걸음을 따라가야 할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십자가의 예수를 따르다 지쳐 세상에 휩쓸려가는 모습은 아닐까. 교회 공동체 지체들이 손잡고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듯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며  보내는 사순절 기간, 예수께서 성도의 길로 제시하신 ‘자기 부인’이 그것을 살아내야 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지 짚어보았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향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고 말씀하셨다. 삶 속에서 ‘자기 부인’이 이뤄질 때 비로소 십자가 죽음도, 부활의 능력도 드러낼 수 있는 신비를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의 ‘그리스도인’, 하지만 예수가 제시하신 ‘자기 부인’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을까?

이런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이라는 지적이 높다.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교단과 연합기구의 분열은 쉼이 없고, 매년 선거전에는 자리다툼이 치열하다. 또 교회들의 개교회 주의는 이웃지간에도 함께하지 못하고 ‘수평이동’ 방식으로 신자를 빼앗는 병리현상을 낳았다.

교회 안에서도 직분을 마치 직위인 양 서열화 하고, 그 속에서 더 높아지려는 모습들도 포착된다. 자기 안위에 머무르는 기복주의 신앙도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설교 강단에서 ‘십자가’, ‘실천하는 신앙’을 주제로 한 불편한 설교는 점차 사라지고 편안함을 주는 설교가 늘어나고, 신자들 간에도 복음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사교집단화’ 되어가고 있다는 우려가 높다.

‘자기 부인’은 커녕 세상의 탐욕이 교회를 잠식하고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 한국교회의 2019년 사순절 끝자락, 고난주간은 시작되고 있다. 2회에 걸쳐 한국교회의 실태를 짚었다. 진정한 성도의 길을 향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고대하면서…(기사에 나오는 이름은 부득불 가명으로 표기함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 편집자 주

 

성도들의 솔직한 이야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어려워도 그 길을
갈 수 있었으면…

 

  교회에서도 복음 가르치지 않는다?

모태신앙으로 60년 넘는 신앙생활을 해온 김진수 장로, ‘내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의 십자가’라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2천 년 전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 피부로 와 닿지 않아 고민이다. 특히 ‘자기 부인’ 대목에서는 사뭇 불편함을 느낀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이라는 것을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도무지 삶 속에서 그것을 살아갈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삶을 교회에서도 가르치거나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운 현실이어서 더욱 난감하다.

교회를 보면 답답함은 더욱 증폭된다. 장로가 되면서 교회의 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는데, 도무지 그런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인가 싶은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세상의 방법과 일들이 하나님의 일로 둔갑하는 때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직분을 마치 직위인 양 인식해 더 높아지려는 것을 보게 된다. 직분자 선출에 있어 그의 신앙 걸음이나 인품을 살피기보다는 마치 인기투표처럼 하고, 어머니 권사는 교회에서 도통 보이지 않던 아들을 안수집사 만들기 위해 암암리에 선거운동 펼치며 치맛바람 날리는 모습, 더 황당한 건 그렇게 해서인지 그 아들이 안수집사에 선출되더라는 것이다. 투표에서 밀린 이들 중에는 더 쉽게 직분을 얻을 수 있겠다 싶은 교회로 미련 없이 떠나기도 한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오늘의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 피부로 와 닿지 않아 고민…
교회에서마저
‘자기 부인’ 가르치지 않아


장로, 권사 임직 때면 돈을 걷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김 장로가 임직할 때도 적지 않은 돈을 각출해 교회 차량을 마련했다. 여력이 없는 이들은 눈치만 볼 뿐이다.

교회에서 누가 헌금 제일 많이 하는지는 모두가 아는 비밀이요 부러움의 대상이다. 새해면 서로 ‘복돈’을 주고받는데, ‘복=돈’의 개념이 교회에서도 거리낌 없이 통용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도, 선교, 구제 등 교회 사역의 핵심적인 부분도 숫자논리로 가득하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헌금이 많이 걷혀야 하고, 그러려면 신자가 더 많아야 한다는 식. 그래서 전도가 아니라 남의 교회 신자에게도 “우리 교회 와 보라”며 수평이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다.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것들도 ‘일’에 그치고 마는 것을 본다. 예배의 감격을 기대하기보다는 한 시간 잘 버티면 ‘주일성수’의 의무를 마쳤다는 생각에 위로를 얻는다. 설교에서도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예수의 십자가와 희생을 실천하는 삶이 설교 때마다 등장하고 강조됐지만 지금은 누구나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설교가 대부분이다.

교회에서는 점점 문화센터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이야기만 하게 되고, 설교는 문화강좌를 듣는 듯한데, 과연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에 고민은 점점 커지고 있다.

누구도 ‘자기 부인’을 말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데 내가 굳이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도 그저 편안함에 젖어들어 살고 있다고 했다.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보며
가식적이고 관념적이었던
내 설교 돌아보게 돼.
‘자기 부인’은 삶 속 부단한 싸움

 

 삶이 없는 설교, 두렵다

정현진 목사(51)는 이제 자신을 목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10년 가까이 자비량목회를 해오다가 지난해부터 교회를 내려놓고 돈벌이에 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가 목회 해야지 왜 돈을 벌어?’하는 불편한 시선으로부터도 이젠 자유로워졌다. 목회를 하지 않으니까.

그가 목회보다 돈벌이를 택한 건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겠다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심을 믿는다며 목사가 된 사람이 제 힘으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게 옳을까 싶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녀들을 위해 최선 다해 뒷바라지해 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그것이다. 그리고 좀 더 정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목사의 가운으로 덧씌워 ‘거룩’을 흉내 내려 하거나 돈과는 담 쌓은 듯한 위선을 떨쳐내고 싶었다. 또 목회자 가정이라고 가난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녀들에게까지 그런 삶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정 목사가 하는 일은 오토바이 퀵 서비스다. 아등바등 힘을 내보지만 늘 통장은 마이너스, 그래도 매일매일 일을 통해 세상과 마주하는 것이, 그 힘겨운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그에게는 도전이고 보람이다.

최근에 집주인이 전세를 올려달라고 요구해 더 작은 집으로 옮기게 됐다. 책들도 절반 이상 버려야 하는 상황, 아내에게 “이젠 참고할 자료 없어서 설교 못 하겠다”고 우스개로 이야기했지만, 실상은 설교하는 게 겁이 난다.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동안 내 설교가 얼마나 가식적이고 관념적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없이 ‘거룩’을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습관적으로 때 되면 하는 십자가와 부활 설교를 들으며 성도들이 얼마나 자신의 삶과 거리를 느꼈을지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물건 배송 일을 하다보면 조금 늦었다고 욕설을 듣거나 가격을 깎아달라고 생떼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씁쓸한 건 교회 팻말 붙인 곳들이 더하다는 것이다. 뒤돌아서며 ‘내가 설교 잘못한 탓’이라고 치솟는 울분을 쓸어내린다.

힘들게 일을 마치고 귀가한 날, TV에서 방송설교 하는 것을 보면 ‘당신이 한 번 살아봐!’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방송설교에 얼굴 비치는 데 적잖은 돈이 든다는데, 그 돈은 다 어디서 났느냐고 묻고 싶다고. 자신도 살아내지 못하면서 성도들에게 어떻게 ‘자기 부인’을 설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교회 안에 ‘자기 부인’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모습이 사라져가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고.

정 목사는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면서 ‘자기 부인’에 대해 더 깊이, 더 현실적으로 마주대하고 있다. ‘자기 부인’은 자기를 내려놓는 것임을, 그것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인지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 목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으로 ‘자기 부인’을 설명했다. 왕이라는 분이 작고 약한 나귀를 타고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은 우스꽝스런 코미디가 따로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낮추심으로써 자기 비움을 보여주신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며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을 내려놓는 훈련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을 때까지 해나가야 하는 걸음이라는 것.

하지만 오토바이 타고 달리다 시내 한복판에서 만나는 크고 화려한 건물의 교회들을 보며 과연 ‘자기 부인’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을 ‘맘몬’의 상징으로 보여주는 듯해 안타까웠다고.

인간이 가장 연약한 부분은 물질이다. 요즘은 ‘꽃다발’이 아니라 ‘돈다발’이 유행이다. 꽃다발에 꽃 대신 돈이 꽂혀 있다. 꽃보다 아름다운 게 돈인 세상에서 과연 물질을 부인하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정 목사는 “불가능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을 매일의 삶에서 추구하고 따라가야 하는 것을 배우고 훈련하며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좇아가기 버거워

50대의 모태신앙인 한진규 집사는 자기 부인의 삶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공동의 터전이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탐욕을 가르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교회마다 기업논리, 경영논리가 깊이 들어와 모든 것을 수치화 하고 계산하는 모습이라는 지적이다.

인간은 늘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한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소유할 것을 이야기하셨다. 오죽했으면 직접 보여주러 오셨겠냐는 이야기. 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똑같을 거라고 보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 문명의 틀은 늘 바뀌지만 인간 삶의 메커니즘은 같기 때문이다. 이런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것이 아니라고 돌아서서 다른 길(자기 부인의 길)을 가기란 굉장한 고통이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교회마저도 지지기반이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한 집사가 출석하는 교회는 꽤 규모 있는 교회로 얼마 전 선한 사업을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할지 회의하는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경영논리를 가진 사람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계획했던 일들이 물거품 되는 것을 보았다.

한 집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추구하면 하나님의 뜻인 자기 부인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개개인의 자기 부인, 공동체의 자기 부인, 교회, 사회, 국가의 자기 부인이 이뤄진다면 온 인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라면서 자기 부인은 하나님의 분명한 구원 계획이라고 말했다.

작지만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 부인을 실천해 가는 모습이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예수의 ‘자기 부인’의 삶, 왜 어려울까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이선주 집사(40)는 기독교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묵상할 때면 이 대목에서 궁금증에 사로잡히곤 한다.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줄곧 하나님과의 동행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믿는 자의 삶을 가르치셨던 예수님. 그런데 정작 그 절정인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을 향해 돌연 ‘왜 나를 버리셨냐’고 절규하는 모습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다시 그 대목을 읽으면서 연달아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고 또 한 사건, 공적 사역에 앞서 광야에서 지내시던 예수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사탄이 떠올랐다. 혹시 사탄이 십자가상의 예수에게 접근했던 걸까? 철저히 자기를 죽이는 자리로 나아가신 예수를 마지막까지 괴롭히는 사탄의 속삭임, ‘하나님의 아들? 당신 같은 자가 백 명도 더 될걸. 실패자를 용도 폐기하는 십자가에서 그만 내려오라’.

구약은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 그리고 용서가 반복된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우상숭배 근절에 집착하셨을까. 우상숭배는 하나님과의 합일된 삶으로부터 멀어져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는 인간 탐욕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내 힘’으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본성과 싸워 끝끝내 ‘자기 부인’을 이뤄내신 것을 보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에도 내가 ‘자기 부인’을 이뤄낼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을 알고 난 뒤에야 ‘내 죄를 대신 지신 예수의 십자가’가 더욱 선명해졌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나를 내려놓고 그분의 이끄심을 고대하는 삶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내 안에 가득한 탐욕 때문인 것도 보게 됐다. 사탄은 오늘도 불안한 내일을 위해 더 가져야 한다고, 더 준비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빛을 따라 가는 길, 나를 죽이는 ‘자기 부인’의 걸음을 작지만 용기 있게 걸어가고 싶다고 했다.
 

하나님은 결과보다는
여전히 흙투성이, 죄악 투성이라도
순간순간 돌이키기 위한
싸움을 했느냐,
그 과정을 더 귀하게 보신다

 

 자기 부인, 인류 구원의 길

정교회 신자인 이성제 성도(54)는 그동안 자신이 훈련해 온 ‘자기 부인’의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힘겨운 사투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래야 예수를 따를 수 있으니까. 예수를 따르는 것은 우리 안의 죄의 본성이 자꾸만 방해하기에 기존의 삶의 방식과 생각, 습관에 저항하지 않고는, 그것으로부터 돌이키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자기 부인은 나 자체를 없애는 것이기 보다 참된 나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어 있고, 그것을 기반으로 거짓된 자아와 싸워 분열된 자아를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통일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부인’은 투쟁을 전제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듯이 말이다.

물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성도는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설교문을 소개했다.

“하나님은 결과만 보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당신이 금식을 얼마나 했는지, 덕스런 사람이 되었는지 그 결과보다는 여전히 흙투성이, 죄악 투성이라도 순간순간 돌이키기 위한 싸움을 했느냐, 그 과정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이 성도는 “자기 부인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싸움,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향해 가는 것 같지만 혼자가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해 십자가 은총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서 “신앙은 결국 가능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시도하는 것이고 그것이 믿음”이라고 했다.

그럼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삶은 무엇일까? 이 성도는 우리 신앙이 우상숭배적 요소로 가득 차 있고, 세상의 유혹과 참된 신앙의 길이 명쾌하게 구분되지 않는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시도를 게을리 할 때 하나님은 저 멀리 버려두고 자기 안위를 위한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진짜 하나님으로 숭배하게 된다면서 “사도 베드로처럼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고백과 함께 자신의 신앙을 날마다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성도는 ‘자기 부인’이 곧 부활의 능력을 드러내는 삶 자체라고 했다. 자기 부인이 이뤄질 때 비로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삶의 태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또한 평안을 지속하기 위한 방향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인간의 탐욕인데, 탐욕을 부추기는 것은 인간에게 잠재돼 있는 불안감이라고 했다. 선한 길을 따라가려고 하면 손해인 것 같고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러한 불안감을 이용해서 악은 끊임없이 자라난다고 보았다.

이 성도는 자기 부인을 위해서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삶 속으로 녹아들지 않고 늘 구호에 그칠 뿐 아니라 결국 자신의 삶을 모두 세상에 내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성도는 매일 매일의 실천이 없으면 삶이 될 수 없고 삶이 되지 않으면 관념에 머무르게 된다면서 “일상생활에서 선한 기운을 함양할 수 있는 작은 실천들을 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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