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유일하게 장애인 그리는 김근태 화백, 30년 작업 여정

4월 15~21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2019 들꽃처럼 별들처럼 전(展)’

5.18 사태의 깊은 트라우마로 4번 자살 시도,
중증지적장애인 모습에서 자신의 아픔 발견

“장애인과 함께가 자연스러운 곳이 천국, 불편하면 지옥…
장애·비장애 함께일 때 온전한 부활”

▲ 김근태 화백과 아내 최호슨 권사

그림을 그리다 시각도, 청각도 잃어버린 김근태 화백(61, 목포사랑의교회 집사)은 자신의 그림을 팔지 않는다. 처음엔 사려는 사람이 없었고 지금은 안 판다. 2015년 한국 서양화가로는 최초로 뉴욕의 UN 본부에 초청받아 전시회를 갖고 이어 독일 베를린과 브라질 리우 패럴림픽, 파리 유네스코 전시, 평창 패럴림픽 등에서 전시를 가질 정도지만 그럴수록 “이건 팔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장애인 그림을 그리는 김근태 작가, 30년 동안 지적장애인을 그려온 그는 “장애인이 배제된 천국은 없다”며 그림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거둬내고 그들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설 수 있도록 매진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을 그린 그림은 더더욱 팔 수 없다. 그림을 통해 자기 유익을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애인의 날(4월 20일)에 맞춰 4월 15일부터 21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 2관에서 김근태 작가의 ‘2019 들꽃처럼 별들처럼 전(展)’이 무료로 개최되고 있다. 슬프고 아픈 장애인의 삶? 그의 그림 속 장애인들의 모습은 순수와 밝은 빛으로 가득하다. 예수 부활은 장애인들에게도 생명의 빛으로 또렷이 밝혀지는 것을 그림은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장애인을 그리다 자신도 장애인이 된 그를 늘 곁에서 돕는 아내 최호순 권사(57)가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가 되어주고 있다. 최 권사의 도움을 받아 김 화백과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는데, 장애인을 그리겠다고 씨름하는 남편과 함께한 세월, 최 권사도 할 말이 많았다.
 

▲ 지적장애인을 소재로 그린 김근태 화백의 작품 ‘차가운 겨울’

# 자살하려던 나를 살린 장애인

김 화백은 왜 30년간 고집스럽게 장애인을 그려야만 했을까?

“내면의 상처를 해결하지 못해 네 번이나 자살 시도한 나를 구한 게 장애인들이었어요. 사지육신이 비틀어져 꼼짝 못하고 누워서 눈만 껌뻑이는 전신마비 중증장애인을 본 순간 ‘저게 나다’ 하고 그때부터 장애인들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장애인들을 그리면서 비로소 자신의 아픔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당시 김 화백은 대학생 신분으로 시민군 활동을 했다. 군부가 광주를 짓밟은 후 수습위원을 맡아 처참하게 찢기고 부서진 시신들을 수없이 보고 만져야 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고, 어째서 나는 살아있는가…, 이후 삶은 갈피를 잃었다.

최 권사가 결혼을 결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김 화백의 자살 시도를 목격한 것이 계기가 됐다. 교제를 시작한 지 다섯 달쯤, 자취방에서 그림 그릴 때 사용하는 파라핀을 마시고 죽어가는 그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겨 살려냈다. 김 화백의 프러포즈에 ‘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 결혼하고 환경이 달라지면 마음을 잡을 줄 알았다. 하지만 바람 앞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처럼 흔들리고 방황하는 것은 여전했다.

결혼 후 김 화백이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4년 반 만에 그만두고 파리로 유학 떠날 때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형편없던 시절에 그들을 그리겠다고 할 때도 최 권사의 마음에는 줄곧 ‘남편이 살 힘이 된다면’ 하는 심정으로 묵묵히 지지해 주었다. 생활은 최 권사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감당했다. 전시회를 열어도 그림 한 점 사는 사람 없고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김 화백은 장애인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 주제가 무겁고 버거워 방황을 거듭했고, 술, 도박, 외도가 반복되는 속에서 최 권사도 지쳐갔다. 최 권사마저도 ‘더 이상 소망 없다’는 암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쳐 우울증에 빠졌다. 가정이 스러져가는 최악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은 것은 섭리였을까? 하나님을 만난 후 김 화백의 그림은 180도 달라졌다. 어두움이 사라지고 색깔도, 장애인들의 표정도 모두 밝게 빛났다. 장애인들도, 그들을 그리는 자신도 하나님의 귀한 보배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 장애의 굴레 속 아이들, “오메! 예수님이네!”

“의대 진학을 준비하던 아들이 갑자기 신학교를 가겠다는 거예요. 그때 술기운에 ‘네 인생이니 알아서 하라’고 했는데, 정말로 신학교에 지원했어요.”

12년 전쯤, 아들은 부모를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 눈물로 새벽기도를 쌓고 어머니에게 먼저 권유했다. 철저한 불교집안에서 자란 최 권사였지만 오랜 기간 부모를 위해 기도해왔다는 아들의 말에 감격했다. 아들 따라 교회를 찾았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이 열렸다.

“남편이 장애인을 그리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바보라고, 미쳤다고 했어요. 저 역시 그런 그림 그려서 어쩌려고 하나 걱정했지요. 그런데 하나님 만나고 그림 속 아이들이 죄 없이 우리의 고통을 짊어진 예수님으로 보였어요.”

최 권사도 아들처럼 남편을 위해 새벽기도를 쌓았다. 그리고 남편 앞에 무릎 꿇고 “내 퇴직금 다 줄 테니 한 번만 교회 나가자”고 애원했다. 김 화백은 “내가 돈에 환장한 놈인 줄 알아!” 호통치고 돌아서는데, 아내의 모습에서 진심이 읽혔다. 그래, 소원이라니 한 번만 가 준다던 것이 그의 표현대로 “코가 꿰어버렸다”. 하나님을 만난 후 끈질기게 절망의 나락으로 끌어당기던 내면의 상처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새털같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작업도 새로워졌다. 하나님은 더 이상 고통으로 점철된 불행한 장애인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함께 걸어가야 할 지체인 것을 보게 하셨다.

김 화백의 천국·지옥·부활의 이해는 장애인들을 통해 더욱 선명해졌다.

“내가 그려온 지적장애 아이들이 바로 천국과 지옥, 부활의 상징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어요. 그들과 함께함이 자연스러운 곳이 천국이요, 그것이 불편하면 지옥인 거예요. 또 그들과 함께일 때 온전한 부활이지요.”

캔버스 77개를 이어 붙여 무려 100미터 규모로 장애인들의 모습을 그린 UN 본부 전시회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UN에 전시회 개최 여부를 타진하기도 전에 먼저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남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최 권사가 걸었던 ‘퇴직금’ 약속도 UN 전시를 위한 그림에 쓰였다.

“남편이 UN 본부에서 전시회를 갖겠다, 100미터로 아이들의 모습을 펼쳐놓겠다고 발표했는데 눈앞이 캄캄했어요. 그러려면 당장 작업실과 캔버스, 물감 값만 따져 봐도 1억 정도가 필요하겠더라고요. 빚이 재산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너 퇴직금 있지 않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최 권사는 2013년 교직생활 30년 만에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그리고 퇴직금을 남편의 그림을 위해 과부의 두 렙 돈처럼 드리기로 결정했다. AI로 인해 버려진 오리농장을 작업장으로 빌리고 그림 재료를 한 트럭 실어 날랐다. 환경은 마련됐는데 그림 주제가 고민이었다.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그리고 덧칠해서 지우기를 반복, 캔버스가 무거워질 지경이었다.

김 화백이 고뇌 속에 잠들었는데 꿈에 높은 산을 힘겹게 오르는 양 옆으로 빛나는 하얀 바위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바위들을 붙잡으며 정상에 오르니 흰 옷 입은 사람이 굽어보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의 작업실이 펼쳐졌다. “아!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장애인 그림을 기뻐하시는구나” 하는 깨달음 이후 그림 색깔도, 아이들의 모습도 밝게 그렸다. 3년을 새벽기도와 찬양 속에서 그림에만 몰두했다. 그림을 마치고 사인을 그려 넣은 후 UN 본부로부터 전시 허가장이 도착했다.
 

# 장애·비장애 간격 없는 세상 향해

김 화백 부부는 지적장애인들을 수없이 대하면서 “그들이 아무것도 모를 거라는 생각은 오만”이라고 잘라 말했다. 지적장애 아이들을 그리기 위해 복지단체에 찾아가 그림을 지도하면서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매달 한 차례 그림도구와 간식을 준비해 아이들을 찾았는데, 과연 가능할까 싶었지만 두 시간 동안 그림수업에 참여한 아이들의 표정은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이 아이들에게도 꿈꿀 권리,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함께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고 있다.

UN 전시 이후에는 우리 정부에서 지원해 주어 지난해 국내외에서 전시회를 가졌는데 그때 지적장애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함께 전시했다. 이제는 지적장애인을 위한 국제예술학교 설립을 꿈꾸고 있다.
이번 예술의전당 전시회에서도 그의 작품 약 100점과 함께 장애 아이들의 그림이 전시된다. 특히 김 화백의 드로잉 작품 200점과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의 미디어 아트를 접목해 표하는 대형 설치작품을 ‘나는 자폐아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제목으로 선보인다.

김 화백은 젊은 날 교통사고로 왼쪽 눈을 실명했는데 UN 본부와 유럽 전시를 연이어 가지면서 오른쪽 시력마저 거의 소실됐고, 청신경도 손상돼 20%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야말로 장애인이 된 것이다. 거기에 더해 김 화백은 자신을 ‘자폐아’라고 했다.

그는 “자폐는 오직 하나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류 사랑과 구원의 오직 한 길로 가셨어요. 장애인에 붙들림 삶, 나는 행복한 자폐아”라며 장애·비장애가 함께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세상을 위해 오직 한 길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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