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탐구(탐색)_31 요한복음 1:19~28 ①

10여 년 전후에 레이몬드 E. 브라운을 만났다. 그의 서책 자료이기는 했으나 모처럼 나는 그에게서 자신감과 소신, 즉 책임감을 지닌 신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 번 쯤 그를 찾아가보고도 싶었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복잡한 내용을 간결하게 정리하는 절제력은 물론 아는 만큼 다 털어놓는 것 같지 않은 겸허함이 내게는 쉽게 사귈 수 있는 어른으로 여겼는데 그는 내게 그 기쁨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안다. 그가 아직은 미완으로 남겨두어야 할 요한복음의 요체들은 좀 더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사실 요한복음의 키는 예수께서 쥐고 계신다. 그분은 인간들의 생각이 무르익을 시기를 늘 기다리시는 분이다. ‘내 때는 아직…’이라는 말씀으로 다시 침묵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어디 그분의 성품을 나만 알겠는가. 16세기에 쓸 만한 인재들이 몇 명 등장했을 때 혹시나 하고 기다리셨으나 그들은 서로 윗자리 다툼을 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예수께 직접 배우던 갈릴리 촌놈들도 서로 내가 먼저라면서 자리다툼 하다가 예수께 더 배울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요한복음 쓴 사람은 그 날들의 후회를 해보았기에 이런 대목의 글을 남길 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16세기 종교개혁기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멍청하게 자기만 잘났다고 핏대 올리다가 친구들도 잃고 기회도 놓쳤다. 계몽 사상가들이 가르쳐 줄 때도 귀를 막았다가 프랑스 대혁명(1789년) 때 교회들이 혁명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버림받지 않던가.

유럽 기독교가 프랑스 혁명기 뿐 아니라 러시아 공산당 정권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낸 것이나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책임은 유럽 기독교가 짊어져야 했는데 그들이 아직도 뻔뻔하게 마치 자기들이 역사의 주인공들인 양 모가지를 길게 뽑고 교만을 떨고 있다. 그들에게 글 한자도 더 얻어듣고 싶은 마음이 없다.

브라운 박사의 책에서는 요한복음의 배후(배경)와 그 전승 절차를 살피고 있다. 사상적 요소들, 기록 목적, 또 기록 연대, 기록 장소와 기록 당사자 순으로 출발점을 삼는다.

본격적인 자리는 신학적 요구를 찾는 것이 될 것이다. 더 전문적인 과정은 이 복음서의 기록언어, 사본 출처 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지면에서는 이미 본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앞서 요 1장 1절에서 18절까지의 핵심은 대강 살폈고, 오늘은 19절 이하의 내용들을 들여다본다.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눈에 쌍불을 켜고 세례자 요한을 에워싼다.

세례자 요한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유대와 예루살렘의 뜻있는 이들이 얼마나 기다렸던 음성인가. 그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그들 유대인들은 말라기 4장의 때가 되면 엘리야 보내주신다 했기에(말 4:5) 엘리야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 앞에 나타난 인물은 엘리야가 아니었다.

소문 듣기로는 광야 빈들에서 혼자서 살고 있는 성질머리 괴팍한 선지자라고도 하고, 한때는 엣세네파에서 수도생활 하다가 쫓겨난 자요,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예루살렘 명문가 출신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가 지닌 카리스마는 벌써 예루살렘과 유다국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앞 다투어 그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세례자 요한이 소리쳤다.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호통을 쳤다.

무서운 말이다. 예루살렘이면 제사계급의 상징이요 예루살렘 종교의 모든 것을 담보하고 있는 상징인데 예루살렘의 제사장 무리들이나 그들과 함께 온갖 기득권을 함께 누리던 종교가들을 뱀이요 독사의 자식들이라 했으니 어찌 뒷감당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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