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칼럼 > 칼럼
요한복음은 도마의 글(복음)과 다르다요한복음 탐구(탐색)_33
조효근 / 본지 발행인  |  dsr123@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1704호] 승인 2019.08.14  14:00:2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요한복음 1:29~34

1. 예수께서 내게 나아오시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이 놀라운 발견, 이 감격스러운 만남! 예수,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발견했다. 지금 그가 내게로, 세례 요한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오신다. 이는 구약 이스라엘과 유다의 승리요 사가랴, 제사장의 아들 요한의 성공이다. 무릇 역사와 인생은 이 맛으로 사는 법이다. 세례자의 복이다. 아브라함 자손들의 큰 복이다.
 

2. 세례자, 예수, 요한 기록자의 공동 승리다

요한복음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본문(요 1:29~34)의 기록 내용을 다시 읽어 보자. 세례자는 예수께서 자기에게로 오심을 보았다. 이 경지가 아시아식으로 말하면 “깨달음”이요 서양식으로는 “믿음”이다. 요한복음서를 놓고, 영지주의나 헬레니즘의 영향에 취해 있는 기독교인들은 내게로 걸어오시는 예수를 만날 수 없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같은 순수한 이스라엘 식 신앙을 가지지 못했기에 그들의 눈에는 내게로 걸어오시는 메시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구약인의 표현법)을 볼 수 없고, 마주할 수도, 그에게 경배할 수도, 그의 축복을 받을 수도 없다.
 

3. 요한은 도마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요한복음과 도마가 쓴 예수 이야기(복음이라고 단정하기 쉽지 않음)를 동일 계열인 헬레니즘의 아류로 생각하는데 도마는 모르겠으나 <요한복음>은 헬레니즘과 그 관계가 멀다. 마치 동쪽이 서쪽과 멀 듯이 멀리 있다. 물론 예수님이라면 같은 자리에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너는 예수가 아니다. 예수는 “그”다. 그는 어느 누구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으신다. 인간처럼 편애나 편견이 없으신 분이시다. 요한복음을 다시 생각해 본다. 요 1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히브리, 성공한 히브리의 노래이면서 이 노래는 세례자 요한의 창작품이다. 창작은 조금 무리한 표현이고 아브라함 이후 2천여 년 동안 히브리가 찾아낸 “창조적 언어”인 히브리 사상이다.

요 1장 29절에서 34절 내용은 마치 삼위일체 현장을 보는 듯도 하다. 예수는 하나님이시고, 세례자는 성령의 역할, 요한복음 저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역할이기도 하다.

이 같은 모형은 헬레니즘이나 영지주의에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나오지 않는다. 헬라주의 인본주의자들에게는 삼위일체 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도마가 아니라고 했다. 도마의 글을 “복음서” 대접하는 것이야 그들의 일이거니와 필자는 복음서로 보지는 않는다. 서양 기독교가 예수의 복음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기에 히브리 고유, 아브라함 이후 예수까지 2천여 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가 천신만고 끝에 메시아 하나님의 어린 양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냈는데도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식 기독교가 기독교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왔다.

바로 요한복음과 도마의 글은 동일형으로 혼돈시키는 것이기에, 이러한 해석력을 가진 사람들을 1천년 더 기다려도 도마복음에서는 요한복음의 예수가 나오지 않는다.

예수만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례자 앞으로 힘차게, 사랑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어오시는 예수는 없다. 그리고 세례자의 경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자가 이 같은 외침을 토해낼 때는 아마, 인간적으로는 기겁했을 것이다. 한 순간의 발견이었으니까.
 

4. 세례 요한을 사로잡는 성령의 힘

앞서 삼위일체 형이라고 했다. 30절에서 34절까지를 읽어보라. 나보다 앞서신 이, 나는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지금 이 순간 세례자 요한이 단 한 번 그의 평생에 처음 경험하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그 결과가 “내게로 걸어오시는 어린 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신앙의 고백이다.

참으로 사랑스럽다, 멋있는 고백이다. 이만하면 성공이다. 비록 예수와 십자가에 같이 매달려 죽을 영광은 얻지 못하고 분봉 왕 헤롯에게 목이 잘려 죽기는 하였으나 성공적인 생애를 살았다. 사람이 난 자 중에 세례자만큼 한 이가 또 있겠는가. 최상의 칭찬은 아니지만 세례 요한은 신앙과 인생 둘 다 성공했다.

흥분을 가라앉힌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좋으신 분, 훌륭한 신앙, 분에 넘치는 영광의 축복을 받았으나 그는 빈들에서 낙타털 뒤집어쓰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다.

빈들이 어딘 줄 아는가? 빈들은 유대 광야다. 낮에는 영상 기온이던 날씨가 밤에는 영하 20도 이하로 내려가는 것이 일상인 나라가 팔레스타인 한 구석의 세례 요한의 나라였다. 빈들에서 낙타털 뒤집어쓰는 대책이 없는 주거와 식생활을 하는 세례자가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 예수,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나는 기적 같은 이 순간 모습은 헬레니스트들은 맛보지 못한다. 도마 사도마저도….

조효근 / 본지 발행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460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16길 73-6(연건동)  |  대표전화 : 02-3676-3082~5  |  팩스 : 02-3676-3087
신문등록번호 : 서울 다 06483  |  등록일 : 1988.5.31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조효근  |  이메일 : dsr123@daum.net
Copyright © 2013 들소리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