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시대가 열리고, 천동설에 지동설로 바뀌고, 황제가 빚을 지고 자본가 앞에서 벌벌 떨기도 하는 15세기 무렵, 유럽 기독교는 변화를 의식했다. 드디어 마르틴 루터 등 16세기 개혁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중세교회를 바로 세우는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금년이 501년 째 되는 종교개혁의 달, 한국교회는 내부 결속, 조직 강화에도 힘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도 “정치적 눈”을 떠야 한다.

요즘, 조 아무개의 법무장관 파동에 시선을 모으다가는 또 당할 수 있다. 법무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이 어찌된다 해도 좌파 핵심들은 “다잡은 떡”을 아까워하면서 그들이 결집해 둔 “41%”의 에너지를 확대 재생산할 욕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주요 버팀목이 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좌파 41%는 50%까지면 모자라는 9% 보충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중세기형 가톨릭과 근·현대식 프로테스탄트가 지금까지 경쟁해 오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형 국가들은 튼튼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의의 틀이 견고해져 가는데 중세기형 가톨릭 국가들은 대개 경제나 문화의 형편이 뒤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단순비교는 쉽지 않지만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그만큼 삶의 방식이 건강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금년도 종교개혁의 달에는 한국교회가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만큼 자유롭고, 활발한 개인적 자유가 가능한지를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바벨론 포로기 남왕조 유다의 백성들이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울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전대신 회당, 회당은 다시 말씀(성경)으로 된 두루마리로 바뀌고 성경을 손에 쥔 자들이 모두 제사장이 되었다. 당시 수난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자기가 품고 있는 양피지 조각의 말씀(율법서)으로 변신했음을 발견했다.

앗! 이거다. 고난 받는 때는 말씀이다. 당시 바벨론 포로생활 중 유대인들은 고레스대왕을 만났고, 그날 이후 페르시아제국 안에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 행세를 하였다. 오늘의 한국교회 신자들은 바벨론 그때 유대인 심정을 헤아리면서, 또 16세기 종교개혁의 참된 가치를 찾아내는 신앙인의 날을 발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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