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 승 준 작가

얼마 전 지인의 장로장립식에 다녀왔다. 그다지 큰 교회가 아니었음에도 예배당 주변에는 주차된 자동차로 넘쳐났고, 어떻게 알고 왔는지 꽃다발 파는 장사치들까지 눈에 띄었다. 예배당 안은 잔칫집 같았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될 사람들은 새로 맞춘 듯 양복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는 신랑신부처럼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예식이 시작되자 부토니에르를 꽂은 귀빈들이 강단 뒤 의자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설교를 맡은 목사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기로 결단하고 다짐한 주의 종들을 세우는 기쁜 날입니다. 다 함께 뜨거운 박수로 이들을 격려하고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가대는 정성스레 준비한 축하 연주를 했고, 가족과 친지들은 아름다운 꽃다발을 선사했으며, 곳곳에서는 카메라와 스마트폰의 플래시가 터졌다. 교회에서는 임직된 사람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안긴 것은 물론 돌아가는 참석자들에게까지 기념품을 잊지 않고 챙겨주었다.

설교 때 들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낮은 자리, 주의 종, 기쁜 날, 박수와 축하……. 도저히 병립할 수 없는 이 모순된 말들이 한 문장 안에 다 들어 있었고, 설교하는 목사나 임직하는 사람들이나 참석한 교인들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이 문장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때 사용된 종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둘로스’다. ‘둘로스’는 ‘데오’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데오’는 ‘줄로 단단히 묶다’, ‘족쇄를 채우다’는 뜻이다. ‘둘로스’는 자신의 주권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철저하게 주인에게 매인 노예를 가리킨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계약 관계가 아니다. 내 의사나 생각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완전히 주인에게 종속된 관계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스승인 예수가 왕위에 오르면 저마다 한자리씩 꿰찰 궁리를 하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이렇게 일갈했다. 마가복음 10장 44절에 등장하는 종이라는 단어 역시 ‘둘로스’다.

‘둘로스’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휘페르테스’다. 헬라어 ‘휘페르테스’는 배 밑창에서 죽도록 노를 젓는 노예를 의미한다. 배가 어디로 가는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선장의 명령에 따라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젓기만 하면 된다. 이처럼 ‘주의 종’이 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 스스로 ‘둘로스’나 ‘휘페르테스’가 되는 것이다. 뻔히 바라보이는 죽음을 향해 온갖 고난과 박해를 무릅쓰고 노예로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어렸을 때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툭하면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주의 종이라는 표현을 주의 상전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았다. 전혀 종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인들 위에 군림하면서 온갖 권세와 명예를 다 누리려는 사람이 상전이지 어떻게 종이겠는가?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이들이 정말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생각한다면 취임식이나 장립식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새 옷을 입은 채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이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꽃다발을 안기며 웃음을 터뜨릴 수 있을까? 교회에서 푸짐한 선물과 기념품을 준비해 돌릴 수 있을까? 아마도 대성통곡을 하거나 괴로움에 몸부림치거나 안 하겠다고 손사래 치며 도망하기 바쁘지 않을까?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직분을 계급으로 여기는 세속적 문화가 빨리 사라져야 한다. 직분을 맡은 자들이 상전의 자리에서 내려와 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장로장립식에 다녀온 날 한없이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는 언제쯤 주의 종을 세우는 제대로 된 예식을 볼 수 있을까? 아마 그 첫걸음은 예식에서 꽃을 치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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