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 나의 예수 >8<

기독교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되찾고, 그 땅을 이슬람과 공유하는 지혜를 발휘해야만 기독교는 자기 사명 감당하는 겁니다. “들소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되찾아 복음으로 셈족의 화해, 인류의 터전 모두의 나라에 “주 예수의 평강”을 위해 종교들의 편견을 깨고, 기독교 복음 우위를 위하여 복음의 첨단지역, 지금의 “백병전 전투장”을 사양하지 않습니다. 누가 명하지 않았으나 지원하여 찬바람 부는 곳, 시련과 냉소가 흐르는 곳을 사양하지 않고 지켜갈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해 항변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어요. 이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해 추궁을 하는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창세기 15장을 봅시다.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창 15:1~)로 출발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깊은 기도 중에 만났고, 하나님이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하시네요.

바로 그때 아브람이 도발적 질문을 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독자여! 하나님과 아브람의
지금 심정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창 15장 초두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만나서 ‘나는 너의 방패, 또 지극한 상급!’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잔뜩 화도 나고 하나님에 대한 얼마간의 불신감도 쌓여가는 아브람의 귀에는 “입에 발린 허풍쟁이의 말인사”로 들렸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을 여기 소개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어떻습니까? 이 말씀은 아브람의 75살 하란을 떠날 때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으나 아마,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를 떠나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 약속 말씀으로 아브람의 가슴에 꿈의 사명을 가지게 하셨을 것입니다. 사람은 75살에 자기혁명을 못합니다. 이 글을 쓰는 사람도 가문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때가 자그마치 5살 때였으니까요. 어떤 문서를 보니까 아브람이 5살 때 갈대아 우르 집 마당에 심은 “아담 나무”에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면서 아담처럼 자기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했다더군요.

아무튼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방패 너의 지극히 큰 상급’, 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를 여러 번 두 귀로 들었다고 해야 합니다. 본문 해석의 빈 공간, 글과 글 사이의 행간까지 읽고 해독할 줄 알아야 하거든요.

본문 창세기 15장 아브람은 하나님께 따지고 덤벼듭니다. “하나님! 큰 민족도 필요 없소. 하늘의 별 같은 자손도 내게는 절실하지 않소. 자식 준다, 민족을 준다 하지 마시고 눈 먼 자식이라도 하나 주어 보시오. 지금 내게는 다메섹에서 데려온 내 집의 심부름꾼 엘리에셀 뿐입니다. 그럼, 내 상속자는 저 다메섹의 엘리에셀입니까?”라고 덤벼드는 겁니다.

하나님은 깜짝 놀라서 다시 한 번 축복의 약속을 하시고, 약속의 증빙으로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가에서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로 약속을 주셨습니다. 파격이요 축복이었죠.
 

야곱은 이 약속을 버리고
애굽으로 이민 떠나 430년 동안
자기 자손들을 노예생활로 방치했다

이스라엘과 세계 기독교의 비극성 또한 여기, 하나님의 약속을 소홀히 하는 믿는 자식들 때문에 발생합니다. 야곱은 그의 아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부모 형제를 편히 돌볼 수 있다 하여 앞뒤 생각 없이 애굽으로 갔습니다.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과 약속한 땅입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세겜 땅(현 사마리아, 요셉의 무덤이 있는 곳)에 첫 번째 장막을 친 후 흉년에 애굽을 다녀온 후 헤브론에 정착했고, 야곱의 아비 이삭을 낳아 “모리아 제단”에 산 제물로 드렸던 땅, 그 모리아가 예루살렘성전(현 이슬람의 팔각 모스크)의 한복판에 머릿돌처럼 자리한 곳에서 거룩한 응답을 받았던 땅, 야곱 자신이 ‘이스라엘’이라는 복을 받은 땅인데 야곱은 요셉이 부르니까 70명 그의 자식 손자들까지 이끌고 애굽으로 가버렸지요.

대책이 없었어요. 야곱은 그의 할아버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땅, 그 땅 이스라엘의 장차 영토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줄을 분명히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의 재산 양이나 염소 한 마리까지 모두 잃어버리지 말라고 할아버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상속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영토를 무방비 상태로 대책없이 애굽으로 갑니까? 야곱이 70명 가족을 이끌고 갈 때는 곧 돌아오리라 했겠지요. 대책을 세우고 떠났어야죠.

예를 들면 자식들 중에 강성한 서넛을 히브리 땅에 남겨두고, 가서 현지 사정을 보고 요셉(총리)과 상의하여 가나안 땅을 지키려는 대책을 세웠어야죠.

3천여 년 전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야곱이 버리고 떠난 땅 ‘가나안 지대’는 그 이후 가나안 족속(헷 족속, 아모리, 브리스, 히위, 여부스 족속 등)들 특히 블레셋 족속은 청동 문화 이스라엘보다 뛰어난 철기문화 종족입니다. 이삭의 활동기에 지중해 지역으로 이동해온 블레셋(현 팔레스타인)은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사사기 시대를 고통스럽게 이스라엘을 괴롭혔지요.
 

에서 앞에서의 야곱과 모세를
비교해서 보시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형 에서를 속여 장자권 축복을 빼앗은 후 외삼촌 밧단 아람의 라반의 집으로 가서 성공하여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를 향하여 ‘나의 주여!’라고까지 했지요. 그때 그는 비록 환도뼈는 부러졌으나 이스라엘(황태자, 선민, 하나님의 친 백성)의 축복을 받았지요. 야곱은 자기 생애는 물론 후손들에게도 이스라엘 정신(이긴 자의 관용)을 심어주어야 했어요.

그러나 모세의 인도를 받은 출애굽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천신만고의 시련을 겪다가 가나안 입국과정에서 에서의 자손들과 마주칠때 도움을 받지 못했어요.

해변길이면 10일이면 올 수 있는 가나안 블레셋 때문에 통과할 수 없었고, 광야 길 따라 가나안 땅 돌아올 때 형 에서의 자손들, 모압의 자손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어요.

야곱이 이스라엘의 신분이 되었으면 아브라함의 축복을 승계 받아서 가족과 인척 간의 막힘도 뚫고, 오해도 풀고, 희년의 축복을 함께 나누어야죠. 그러나 야곱 자손은 430년만에 감격의 귀환, 금의환향 길에서도 동족의 축복과 축하를 받지 못했어요.

비옥한 초생달 지역,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재입국 자격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모세가 모압땅에 묻힌 뜻?

모세는 요단강 건너서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갈 수 있다고 자신했어요. 그러나 모세오경, 특히 신명기를 보세요. 모세의 눈물겨운 가나안행을 하나님이 막으셨지요.

왜 모세를 비스가산 언덕에서 요단 저 너머 여리고, 또 저 너머 예루살렘까지 맑은 날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요즘 말로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의 심장부에 갈 수 없게 했을까요?

그리고 그의 육신을 모압 땅(아브라함의 친조카 롯의 아들도 되고 손자도 되는 비극의 인물인 모압)에 모세, 다시는 이스라엘에서 모세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없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인 모세를 모압 땅에 하나님이 묻어두었을까?(아마 모르긴 해도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경각심까지 포함한 비밀이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시도하고
기독교가 완성해야 할 영토

여호수아는 알고 있었다. 여호수아는 메시아 예수의 상징이니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 오히려 당연한 것. 여호수아는 모세로부터 가나안 입국을 위한 “요단강 건너기” 직전에 이 문제를 언급한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수 1:3~4).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하신 명령이시다. 이 말씀을 보니 모세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앞서 야곱을 추궁하는 말을 했으나 야곱 또한 자기의 무기력과 함께 자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오늘날 역사의 전문 언어로 “비옥한 초생달 지역”과 동의어임을 현대 이스라엘 국가나 또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기독교인들은 알고 있을까? 세계교회사 학도들이나 학자들이 언급하지 않고 있으니 궁굼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현대 지역 언어로 표기해 볼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이집트 일부와 시나이 반도 일대 에돔 땅 전체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 전부, 레바논, 요르단, 페니키아(현 레바논), 시리아, 터키, 아르메니아, 이란 일부 이라크 전토 지중해 동서 사방은 물론, 아라비아까지가 아브라함과 여호수아에 이르기까지(확대된 족장시대)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현재 이스라엘 땅의 수십 배가 되는 땅이며,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이 기독교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도 버티고 있는 아브라함과 여호수아 땅의 90배 또는 100배의 젖과 꿀이 흐르는, 또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 거의 모두가 이슬람의 고유 영토 또는 이스라엘과 중세 기독교가 이슬람에게 빼앗겨버린 아브라함과 예수 자식들의 영토이다.

기독교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되찾고, 그 땅을 이슬람과 공유하는 지혜를 발휘해야만 기독교는 자기 사명 감당하는 겁니다. “들소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되찾아 복음으로 셈족의 화해, 인류의 터전 모두의 나라에 “주 예수의 평강”을 위해 종교들의 편견을 깨고, 기독교 복음 우위를 위하여 복음의 첨단지역, 지금의 “백병전 전투장”을 사양하지 않습니다.
누가 명하지 않았으나 지원하여 찬바람 부는 곳, 시련과 냉소가 흐르는 곳을 사양하지 않고 지켜갈 것입니다. 함께 가요. 동지들이여! 

송년의 시간에… 새해 모두승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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