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지금의 우리를 보면 무엇이라 하실까. 2019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자기를 드러내실 때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역시 그를 더 알아보지 못했다. 성전의 종교 지도자들 역시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시는 말끝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생애 이후 처음으로 올라간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그 도시 한복판 성전에서 대노하셨다.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그 누구도 이런 말을 감히 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젊디 젊은 나사렛 촌놈의 행동에 많은 이들이 의아해 했다.

이런 예수님의 행보를 보고 두 부류로 나뉜다. 제자들은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했다고 돼 있고, 유대인들은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는 반응이다.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예루살렘 성전에 가보면 주변 일대가 성전 때문에 먹고 산다. 엄청난 상권이 형성돼 있다. 예수님이 방문했을 당시에도 그랬다. 로마 제국을 등에 업고 유대의 중심인 성전을 장악한 이들이 대제사장이었다. 제사장권을 돈으로 산 이들은 유대인들을 이용해서 경제권을 쥐고, 투자한 돈을 빼내기 위해 제물 비지니스를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예배를 이용해 장사하는 문화가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통치 좌소인데 대제사장이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벌고 있는 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놀랍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자 유대인들이 묻는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예수님의 행보를 보고 그 어느 누구도 왜 예수님이 저렇게 행동하시는지 몰랐고,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신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가 없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진정한 왕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서로의 위치를 인지하며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높여드리며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는 구약 모세시대 성막을 지으라 하시며 샤켄(임마누엘)의 하나님, 다윗시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며, 다윗의 위를 이을 영원한 왕이 오실 것임을, 무너진 성전을 회복하는 인자가 성전에 임하는 에스겔 성전시대, 유대 포로들이 조국으로 돌아와 재건했던 스룹바벨성전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며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삼일만에 부활’은 자기자신을 가리켜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그리고 그후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계신다. 보이는 성전이나 보이는 ‘나(사람)’이 아니라 그 내면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모든 생명을 주께 돌아오기를 소원하는 하나님의 소원과 열망이 예수님의 첫 공생 출발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일이었다. 예루살렘 중심부에서 이 메시지를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새삼 생각난다.

신약, 그리고 오늘의 사람들에게 구약처럼 제사 드리는 성전 개념은 차원이 다르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훤하게 열려있는 은혜의 길에서 찬양을 올려드리며 ‘아버지와 함께 살며 일하는’ 성도, 그 성도의 공동체로서 바로 지금을, 숨쉬는 생애 전체가 예배여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우리는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 눈빛과 목소리를 기억하고 경배할 수 있을까. 동방박사들처럼 그 구유에 누인 갓난아기에게 경배할 수 있을까. 오늘의 나(성도), 교회, 사회를 둘러본다, 무거운 성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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