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설 > 포럼
잡은 고래, 놓친 고래
홍종락  |  dsr123@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1713호] 승인 2020.01.02  11:29:4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오늘은 <모비딕>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이 책의 저자는 고래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주고, 궁금하지 않은 것까지 다 말해주기로 작심이라도 한 듯하다. 유명한 고래 이야기, 고래에 얽힌 사연, 고래의 멸종 여부에 대한 예측, 고래잡이배에서 벌어지는 온갖 작업들(고래는 어떻게 잡고, 어떻게 배에 붙들어 매고, 어떻게 해체하며 기름을 빼내고 보관하는 작업은 어떻게 되는가 등)에 대한 대목들도 꽤 흥미진진하다. 마치 피쿼드 호에 같이 타고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보고 같이 경험하는 것 같았다. 저자는 이런 몰입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바둑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젊은 날 인생을 걸고 배웠던 바둑의 관점과 통찰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에게 모든 이들의 삶은 자기만의 바둑이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은 둥글다며 인생을 축구에 비유하고,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생은 9회말 투아웃부터!’라고 외친다.

<모비딕>의 저자 허먼 멜빌은 인생이 고래잡이 여행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고래잡이 경력이 있는 멜빌에게 고래를 안다는 것, 고래잡이의 생활을 안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비딕>의 화자 이슈마엘의 입을 빌어 “포경선은 나의 예일대학, 나의 하버드”라고 선언한다.

그의 당당한 선언이 과연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들려준 고래 이야기를 다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나만 살펴보면 알 수 있으리라. 89장에 나오는 '잡은 고래와 놓친 고래'를 보자. 1850년대에 고래잡이는 정말 위험한 직업이었다. <모비딕>에는 그 위험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사람들이 그런 위험을 무릅쓴 이유는 그에 따른 큰 보상 덕분이었다. 모든 것은 고래를 얼마나 잡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어떤 배의 작살을 맞고 달아난 고래가 다른 배에 잡히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럴 때 고래잡이들 사이에서 고래가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없이 중요했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간단한 두 원칙을 소개한다. 1. 잡힌 고래는 잡은 자의 것이다. 2. 놓친 고래는 먼저 잡는 자가 임자다.

잡힌 고래란? "살았건 죽었건 사람이 탄 배나 보트, 또는 한 사람 이상의 점유자가 조종하는 여하한 장치에 연결되어 있으면" 잡힌 고래다. 그런데 한참을 잡힌 고래, 놓친 고래 이야기를 하던 멜빌은 은근슬쩍 그것을 은유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고래사냥이 펼쳐지는 바다는 어느새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상대로 제멋대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인간세상이 된다. 저자가 늘어놓는 ‘잡힌 고래’의 사례를 들어보시라. 러시아 농노, 공화국 노예, 탐욕스러운 지주에게 과부의 마지막 한 푼, 고리대금업자의 선불이나 공작이 물려받은 마을과 촌락이 잡은 고래다.

그럼 놓친 고래는 인간 세상에서 무엇일까? 영국에게 인도가, 멕시코가 미합중국에게 놓친 고래다. 바로 위에서 말한 ‘잡힌 고래’와 같은 선상에서 펼쳐지는 비유다. 그런데 곧이어 멜빌의 고래사냥 비유는 커다란 도약을 감행한다. 인간의 탐욕과 착취의 대상인 약자들로서의 고래, 약자들을 정복하고 강탈하는 강자들 간의 분쟁 해결의 원리에서 출발한 ‘잡힌 고래/놓친 고래’ 원리는 순식간에 ‘놓쳐서는 안 될, 그러나 엉뚱한 것을 좇다가 놓쳐버린 소중한 그 무엇’의 은유로 바뀐다. 이런 의미에서는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자유가 놓친 고래요, 모든 인간의 생각과 사상이 놓친 고래며, 신앙의 원칙이 놓친 고래다. 그리고 이 말을 적당히 옮기고 있는 나를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남의 말을 주워섬기는 사람에게 철학자의 생각이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인가?”

정리해보자. 먼저 이슈마엘의 선언을 내게 적용해본다. ‘번역 일은 나의 예일대, 나의 하버드’라고. 결국 내가 하는 일에서 배움을 얻지 못하면 어디서 배움을 얻겠는가. 나만의 자리에서 본 것, 나만이 경험하고 배운 것들이 올해 내게도 이웃에게도 유익을 주기를. 멜빌이 말한 잡힌 고래, 놓친 고래의 비유도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멜빌처럼 고래사냥의 현장에서도 거기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참으로 좇아야 할 것과 오히려 놓친 귀중한 것을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엉뚱한 고래를 쫓느라 놓친 고래들이 줄어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홍종락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460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16길 73-6(연건동)  |  대표전화 : 02-3676-3082~5  |  팩스 : 02-3676-3087
신문등록번호 : 서울 다 06483  |  등록일 : 1988.5.31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 조효근  |  이메일 : dsr123@daum.net
Copyright © 2013 들소리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