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탐구(탐색)_41 요한복음 2:13~22

이제는 교회당과 나, 주님과 나의 관계로 상승 발전을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당”도 자칫 “성전”으로 위장될 수 있다. 우리는 단호한 결의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성전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사정없이 때려 부숴야 한다. 헐어버려야 한다.

예수께서 헐어내라고 하신다, 제대로 허물어라, 완전히 허물어라, 더 은폐물 사이에 숨지 말고 저기 사방으로 시야가 뚫린 골고다 해골산 만큼의 투명한 곳을 택하여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허물어라


가나 혼인집 일을 마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다. 이른바 “성전 청결” 기사로 표현하는 대목이다. 유월절 예루살렘 모임 때, 예수께서 성전을 방문하고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꼴들을 보시고 진노하사 채찍을 들어 후려치시는 이야기, 예수의 과격한 행동에 성전지기가 나타나서 네가 뭔데, 무슨 자격으로 이 같은 일을 하느냐고 가로막고 나선다.

이때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였다. 이 말씀에 놀란 성전지기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삼일 동안에 일으킨단 말이냐고 되묻는다. 이 말씀은 성전지기 뿐 아니라 제자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이해했다는 식으로 기록자가 요한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는 몇 가지 의문점을 발견한다. 성전에 나아갔으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지 늘 있는 일을 향해 지나치게 진노하셨을까. 또 너희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렇게 하면 내가 다시 일으키는데 그 기간은 사흘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성전지기는 물론 제자들마저, 그날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 마지막 하나는 공관복음 기록자들은 공생애 마지막 기록으로 수순을 잡았는데 요한복음 저자는 공생에 출발기에 이 기사를 취급했을까가 자못 궁금하다. 바로 여기에 요한복음 해석의 고단위 열쇠가 있다.

먼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계신다. 이는 다윗과 솔로몬 성전 또 제2성전이라고도 불리는 포로귀환 유대인들이 지은 성전인데, 이는 매우 불필요한 일이었고 하나님의 경륜을 모르는 시대의 자식들이 해낸 이른바 “복고성전”이다.

예수님은 지금 그가 바라보는 예루살렘 성전을 과거시대의 유물로 보고 계신다는 인식이 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이 임재하신 집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으심에 동의하면 좋기 때문이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님의 집이신데 어찌 예루살렘의 돌집이 성전이겠는가?

더구나 고레스, 그리고 그 후임 페르시아 황제들의 도움으로 지은 건축물이 예수 앞에서 성전노릇을 따로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비둘기 파는 장사치들에게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셨지 않느냐면서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관용어(관습어)로의 표현이다. 이의 뒷받침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심에서 드러난다.

‘이 성전을 헐라’ 하실 때 ‘이 성전’은 예수 자신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성전, ‘저’ 성전할 때 지시사인 이와 저가 혼돈되었을까? 하기는 이 단락의 예수 말씀을 성전에서 시비가 있을 때는 못 알아들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대다수가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난 성전에서의 시비 내용을 다 알지 못한다. 이 대목만 제대로 해석하면 기독교는 지금보다 그 순도나 가치가 일곱 배로 높아져서 세상이 무릎 꿇고 경배할 것이다.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율법사 사울과 그 일파들도 예수의 이 성전 헐라는 말씀을 오해했음을 사도행전 6, 7장은 말해주고 있다.

‘이 성전’이 어디 있으며 그리스도인과 어떤 관계인 줄 몰라서 성경 해석이 멈춰있다. 구약시대 말기의 혼돈 속에서부터 오늘의 기독교가 헤매고 있는 비극이다.

예수님이 만약 예루살렘 성전을 성전으로 보았으면 일단 주변을 탓하기 전에 자기가 성전에 온 그 필요한 행위를 먼저 행했을  것이다. 이치가 그렇지 않은가? 내가 성전이라고 믿었으면 불결한 주변 환경은 관리인들에게 맡기고 예수는 성전에 온 경배와 예물을 드리는 경건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는 경배나 제사 드리러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성전”이 무엇인가? 참된 성전이 어디 있는가를 가르쳐 주시려고 그곳으로 가셔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해석함이 사실에 가깝다.

그리고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성전 시비 사건” 기사 위치가 왜 다른가에 대해서 답안을 찾아봐야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첫 번째 방문에서가 되겠고, 공관복음은 마지막 방문으로 보이는데 왜 요한복음 저자는 순서를 바꾸었을까?

성전의 위상, 성전의 가치를 찾아야 메시아와의 시공간의 간격을 헤아릴 수 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신자, 곧 성령 하나님의 전(집)인 성도가 “성전”인데, 자기 가치를 망각하고 예배처를 성전이라고 착각하는 현대의 기독교 신자도 본문의 도둑떼들, ‘내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든 놈들’(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이라 하신 말씀을 깊이 새겨보라.

출애굽 이후 “성전과 나”의 문제는 “우상과 나”의 문제였다. 성전과 나와의 관계가 깨지면서 “우상과 나”의 관계는 동시에 파멸을 맞이한다. 다행히 바벨론 포로기에 일부 히브리들이 제 정신을 차리고, 회당시대로 대거 전환하면서 그들이 “교회당 시대의 기독교”를 불러내는데 공헌을 했다.

이제는 교회당과 나, 주님과 나의 관계로 상승 발전을 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당”도 자칫 “성전”으로 위장될 수 있다. 우리는 단호한 결의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성전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사정없이 때려 부숴야 한다. 헐어버려야 한다.

예수께서 헐어내라고 하신다, 제대로 허물어라, 완전히 허물어라, 더 은폐물 사이에 숨지 말고 저기 사방으로 시야가 뚫린 골고다 해골산 만큼의 투명한 곳을 택하여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허물어라. 이 작업 후에 참된 성전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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